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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8월05일)

주님의 착한 종 2022. 8. 5.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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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8월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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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자기중심, 자기본위적,

다르게 말하자면 에고이즘이 심해져

옆 사람이 설사 참혹한 일을 당해도

나 몰라라, 모른 척, 무관심으로 변해가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래도 가끔씩 의인들을 매스컴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과 안도를 느낍니다.

당신 같은 의인들이 있어서

세상은 아직 소돔과 같은 멸망을 겪지는 않겠다”

라는 안도입니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2001년 1월

일본 도쿄 신오쿠보 전철역 승강장에서

한국인 유학생이던 이수현(당시 26세)씨는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매년 1월 26일 신오쿠보 역에서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고 합니다.

 

이수현씨처럼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화재의 현장에서, 강이나 바다에서, 또는 길에서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뛰어들어

구출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의인(義人)이라 부릅니다.

 

 

 

그럼 의인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사전을 찾아보니 두 가지로 설명하더군요.

 

1.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타인에게

간단한 도움을 주는 것에서부터,

자신이 관여하지 않아도 되며

아무도 자신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의(義)라는 신념에 따라

스스로를 희생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거나

도움을 주는 자들을 말한다. 

 

2. 자신이 속하거나 속하지 않음에도

특정 조직의 부조리함에 대해 고발하는 등

사회적으로 공공의 이익에 해당하는

선행을 행한 사람들 역시

넓은 범주에서 의인으로 볼 수 있다.

 

그렇군요.

우리 사회는 그런 정의로운 일을 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어떨까요?

시편 1편을 보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시편 1,1-2).

 

여기에서 의인인 사람이라면,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서

악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악인이라고 하면,

품행이 못된 자로서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합니다만

성경은 ‘악인’이라는 이 단어를 조금

특별한 뜻으로 사용하네요.

 

히브리어로 악인을 라샤(rasha’)라고 부른다는데

이의 기본적인 뜻은 godless(=경건치 않은, 불경건한),

즉 ‘하느님 없이 사는 자’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이란

세상 윤리나 도덕규범에 비추어서

그것에 역행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자를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네요.

 

 

오늘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십자가는 본래 사형 도구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주동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어릴 때 ‘스파르타쿠스’란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십자가형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만

 

십자가형의 고통은 길고 과정은 끔찍했기에

무척 위협적으로 보였습니다.

반란자 대부분이 독립군이었기에 구경꾼도 많았고,

처형 장소도 따로 있었습니다.

- 일본놈들도 한국의 독립투사들을 처형하고

군문효시(또는 군문효수) 했었지요. -

사형이 확정되면 죄수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말로 ‘골골타’랍니다.

번역하면 ‘해골 터’이지요(마르 15,22 참조).
신약 성경이 그리스 말로 기록되면서

골골타’는 ‘골고타’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지요.

라틴 말로는 ‘갈바리아’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곳에는 커다란 성당이 세워져 있는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작은 형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희생과 봉사의 상징으로

바뀐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 말씀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글쎄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마다 모두 다른 것으로 느낄 수 있겠지만

삶에 아픔을 주는 고통” 정도로 표현하면 될까요?

 

그것은 자신의 성격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겠습니다.

건강이나 가족 관계가 십자가일 수도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억울함’이라고도 합니다.

억울함이 강할수록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려면,

먼저 자신을 치유해야만 한답니다.

 

그러니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누구나 자신을 꾸짖고 자책합니다.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른 이에게는 다정하고

그들의 잘못에는 너그러운 사람이

자신의 실수에는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큰 잘못이랍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남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