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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8월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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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말씀(마태오 16,13-23)을 읽다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르신들은 자주
“네 아버지가 누구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대개는 아이들이 개구쟁이 짓을 하거나
아니면 싸움을 하던지 해서
야단 맞을 때가 대부분이겠지만
드물게는 착한 일을 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왜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드리는 게
그렇게 겁이 났을까요?
그 어르신이 직접 우리들의 아버지에게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아버지는 물론 집안 모두에게 흠이 될까
어린 마음에도 겁이 났던 것일까요?
반대로 칭찬 받을 일을 했을 때는
큰 소리로 대답을 했었지요.
“예, 박 자, 무슨 자, 무슨 자 되십니다.”
그러면 그 어르신은 “역시 박 선생님 아이였군”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는데
그게 참, 장한 기분이 들었었지요.
요즘 청소년들에게 “이놈, 네 아버지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오늘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야”라고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바르요나’의 뜻은 다 알고 계시죠?
예 그렇습니다.
‘바르’는 아들이란 뜻이니까 “
‘요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옥신각신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요한 21,15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거든요.
그러니,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한”이냐? ‘요나’이냐? 어느 것이 맞느냐?
요한으로도 불리고 요나라고도 불렸느냐?
요나 혹은 요한에서 요한, 혹은 요나로 개명을 했느냐?
등등 논란이 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하더군요.
아마도 베드로의 아버지가
'요한’이라고도 불리고 ‘요나’라고도 불렸던지,
아니면 히브리식 이름을 헬라어로 바꾸어 쓰면서
이렇게 발음이 두 가지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하지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지요.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
하시는 예수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답을 들으며 살아왔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알기만 하면 뭐합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는 행위이며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일인데요.
주님은 ‘주인(主人)님’을 줄인 말입니다.
주인이라니? 무엇의 주인이란 말인가?
하는 비신자적 질문을 할 수가 있겠지만
우리는 “ 내 삶의 주인이며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라고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베드로 사도처럼 고백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역시 우리말로 ‘구세주’(救世主)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이란 뜻이지요.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 막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별 느낌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정도로 생각하고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연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게 주어진 세상’
‘내가 책임져야 할 세상’ 아닐까요?
그곳에는 운명적으로 내게 맡겨진 사람이 있고,
내게 의무로 주어진 일이 있고,
기쁘게 살아야 할 미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나의 세상’을
누가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것을 묻고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모범적인 고백을 남겼고요.
그럼 우리의 고백은 어떠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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