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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8월04일)

주님의 착한 종 2022. 8. 4.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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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8월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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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말씀(마태오 16,13-23)을 읽다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르신들은 자주

네 아버지가 누구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대개는 아이들이 개구쟁이 짓을 하거나

아니면 싸움을 하던지 해서

야단 맞을 때가 대부분이겠지만

드물게는 착한 일을 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왜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드리는 게

그렇게 겁이 났을까요?

그 어르신이 직접 우리들의 아버지에게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아버지는 물론 집안 모두에게 흠이 될까

어린 마음에도 겁이 났던 것일까요?

 

반대로 칭찬 받을 일을 했을 때는

큰 소리로 대답을 했었지요.

예, 박 자, 무슨 자, 무슨 자 되십니다.”

그러면 그 어르신은 “역시 박 선생님 아이였군”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는데

그게 참, 장한 기분이 들었었지요.

 

요즘 청소년들에게 “이놈, 네 아버지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오늘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야”라고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바르요나’의 뜻은 다 알고 계시죠?

예 그렇습니다.

바르’는 아들이란 뜻이니까 “

요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옥신각신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요한 21,15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거든요.

 

그러니,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한”이냐? 요나’이냐? 어느 것이 맞느냐?

요한으로도 불리고 요나라고도 불렸느냐?

요나 혹은 요한에서 요한, 혹은 요나로 개명을 했느냐?

등등 논란이 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하더군요.

아마도 베드로의 아버지가 

'요한’이라고도 불리고 ‘요나’라고도 불렸던지, 

아니면 히브리식 이름을 헬라어로 바꾸어 쓰면서 

이렇게 발음이 두 가지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하지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지요.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

하시는 예수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답을 들으며 살아왔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알기만 하면 뭐합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는 행위이며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일인데요.


주님은 ‘주인(主人)님’을 줄인 말입니다.

주인이라니? 무엇의 주인이란 말인가?

하는 비신자적 질문을 할 수가 있겠지만

우리는 “ 내 삶의 주인이며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라고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베드로 사도처럼 고백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역시 우리말로 ‘구세주’(救世主)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이란 뜻이지요.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 막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별 느낌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정도로 생각하고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연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게 주어진 세상’

내가 책임져야 할 세상’ 아닐까요?

 

그곳에는 운명적으로 내게 맡겨진 사람이 있고,

내게 의무로 주어진 일이 있고,

기쁘게 살아야 할 미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나의 세상’을

누가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것을 묻고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모범적인 고백을 남겼고요.

 

그럼 우리의 고백은 어떠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