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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7월14일)

주님의 착한 종 2022. 7. 14.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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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7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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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쉬지 않고 비가 내렸습니다.

‘퍼붓는다’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남쪽 지방은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데

비구름이 남쪽으로 향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말씀 마태오 11,28-30을

몇 번이고 읽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다방이며, 식당에 가면

자기네 상호가 찍힌 라이터를 무료로 주었습니다.

물론 광고효과를 보려고 주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라이터가 흔하다 보니

어쩌다가 돈을 주고 살 수 밖에 없을 때는

왜 그렇게 아깝던지요.

 

세월이 변해서 금연이 일반화되고

이제 공짜로 라이터를 주는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대신 수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생겼으니

티슈나 물수건입니다.

 

티슈나 물수건은 남녀노소 누구든

유용하게 쓸 수 있으니 광고 대상도 제한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들의 포장지에는 ‘OO교회’라고

아주 선명하게 찍혀있고

그리고 큼지막한 글씨체로 성경구절이 써있는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오늘 복음의 한 구절(마태오 11,28)입니다.

 

 

그 물건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예수님을 만나려면 교회에 가야하고

그러니 교회에만 가면 모두 안식을 얻겠구나,

하고 생각할까요?

하기사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실 분도 아닌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으면 너희의 짐을 다 벗겨주겠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잘 못하면

본문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곡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더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 다음 11,29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멍에가 무엇이지요?

지금이야 소를 부려 농사를 짓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저희들 어렸을 때는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요.

 

멍에는 소에게 일을 시키기 위하여

등에 매다는 나무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줄을 이용하여 농사 도구와 연결해서

농사일을 하거나 우마차와 연결하여

운송수단으로 부리곤 했지요.

 

아니, 안식을 주신다더니 멍에를 메랍니다.

이거 완전히 사기네…

하며 거부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움에 닥치게 되고

고통을 받게 됩니다.

내 탓이든, 조상 탓이든 시련이 없는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시련은 늘 은총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저희 본당, 저와 가까운 곳에

정말 열심히 사시는 분이 게십니다.

그런데 이분이 얼마 전 사고를 당하여

오른 쪽 손가락 두 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형제 부부는 대단한 영성의 신앙인입니다만

제가 깊은 상처를 입은 그 형제에게 가서

“손 가락을 잃은 시련은 은총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형제나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시련이 은총임을 깨달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 이러한 시련이 주어지는지,

어찌하여 이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는 시간 말입니다.

 

예수님은 짐의 무게를 줄여주는 마술사도 아니고,

우리가 맡긴 짐을 대신 다 지고 가는

짐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오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마치

“내가 너희 대신 물고기를 잡아주겠노라”가 아니라

“너희에게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라고

하시는 숨은 뜻이 담겨있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여쭈어 보면,

어느 날 내 몫으로 주어진 시련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고통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더 이상 시련은 아픔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비로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게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선물을 주실 때 늘

고통이라는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보자기를 풀다가

그만둔다고 하지요.

조금만 참고 견디면 보자기 속의 선물을

만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왜일까요?

미리 실망하고 포기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요, 중요한 것은,

그렇더라도 주님께서는 선물을

거두어 가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아니, 오히려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련은 진정 은총일 수 밖에요..

 

그동안 우리는 시련의 의미를

축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은총이라기보다는 꾸중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주시는 분이지

징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