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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5월25일)

주님의 착한 종 2022. 5. 2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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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5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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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요한 16,12-16입니다.

어제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를 깨닫고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며,

사람들에게 심판을 확신시켜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영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왜 진리의 영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깊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진리를 위한 영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다시 말해서 성령은 진리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성령을 두고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나에게 내려 오시면

무슨 신비한 힘이 주어진다든지

신령한 체험을 한다든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영을

세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에 대해서는 세상도 곧잘 말합니다.

무당들도 신 내림을 받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신 내림을 받았다는 것은

곧 영이 오셨다는 의미이니까요.

 

영이 내려 오셔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신비한 힘이 주어지고

그 힘으로 앞일을 예언하기도 하고

병을 고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재의 우리 신앙인들 역시,

 성령에 대해서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신자가 성령을 받는 것을

마치 무당이 신 내림을 받은 것처럼

하늘에서 어떤 신비한 영적인 것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내가 신비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성령 받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성령 받은 표식을 자신의 경험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이 들어왔다면 분명 어떤 변화가

있게 마련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감정의 상태가 아무런 변화도 없는

밋밋한 상태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상식과 지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성령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지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 때문에 오셨으며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는

어떤 현상이 있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만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영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은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를 무시하고 깔보는 자는

성령께서 보낸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깎아 내리는 행위를

어떻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예사로 비난하고 거칠게 불평합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지요.

원망하고 공격한다고 마음이 편안해집니까?

아니지요?

마음의 평화는 주님께서 주셔야 가능합니다.

비판할 때에는 자신의 살을 깎는 느낌으로

하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신중하게 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만큼 아픔을 갖고 하라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늘 그분을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예고 없이 오시는 분이시지만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을 붙잡고

실천하는 일일 것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가 복잡할 리 있겠습니까?

사람인 우리가 머리를 굴리고 조건을 달고

까탈을 부려 순서를 따지며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주변은 늘 새롭습니다.

단순하게 인정하면 사람은 언제나 달리 보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함이 ‘성령 체험’의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