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의 묵상(2022년05월23일)
.
어제 날씨는 마치 한여름 같았습니다.
마님의 오빠이니까 나이와 관계없이
제게는 손위분인 처남의
칠순잔치가 있어서 다녀왔는데
술도 몇 잔 마신데다가 날씨마저 더우니
양복이 거추장스럽더군요.
처남은 부인이 먼저 떠나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외아들과 살고 있는데
외로운 아버지를 위해 마련한 어제의 잔치는
두 딸의 정성으로 곱게 펼쳐졌습니다.
“딸이 최고다.”라는 말이 증명되더군요.
하긴 저도 부모님 생전에 불효를 많이 저지른지라
매일 매일의 기도 속에 부모님 영복을 기원하지만
부모님 제사 때나 생신, 영명축일 때면
세심한 마음 씀씀이로 부모님을 대했던 누님들께
무척 고마움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 15,26-16,4 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환난과 핍박이 닥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말씀대로 거의 모든 사도들을 비롯해서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하였고
우리 나라도 유례없는 탄압 속에
103위 성인을 비롯하여 일만 명 이상의
교우들이 순교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 성당 가보셨나요?
저도 여러 번 방문했었는데
마지막 방문은 혼자 전국 성지순례를 시작한
작년 이맘 때입니다.
(전국 성지순례는 광주교구, 전주교구 남쪽,
대구와 부산 교구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빨리 완결해야 할 텐데..)
풍수원 성당 주차장에서 성당으로 가다가
왼쪽에 예쁜 2층 집이 있습니다.
그 집 주인은 풍수원 성당의 증인이라 할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김 회장님의 아들 김 동ㅁ 비오 형제의 집입니다.
이름 끝자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저와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늘 메시지를 주고 받는 사이입니다.
금명간 한 번 만나야겠군요.
어쨌든 그래서 풍수원 성당에 관심이 많았지요.
풍수원은 떠나온 자들의 교회이며,
이주자들이 모여 신앙으로 일군
새 하늘 새 땅이었다고 표현합니다.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는 순교자들의 유가족과
박해를 피해 이주한 이들이 모여
신앙으로 교우촌을 형성하고
본당으로 이어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지요.
기록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우촌’입니다.
풍수원 성당이 설립된 이후에는
신자와 사제가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성당을 짓고 신앙을 지키며,
성장하고 나이 들어간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분들의 삶에 녹아 든 신앙은 노래와 이야기로
표현되고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분은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남긴 글들을
‘풍수원 천주교 문학’으로 부르자고 하시더군요.
자료를 찾아봤더니
‘신태보 옥중수기’, ‘빈낭유학기’ 및
정규하 신부의 서한에 수록된 이야기,
‘문베드로 자탄가’, ‘경축가를 비롯한 천주가사’,
‘조 마리아 할머니 이야기’를 비롯한
구비 전승된 이야기,
소설 ‘용문산 김회장’ 등이
문학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풍수원 천주교 초기 공동체의
삶과 신앙을 조망하고 분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풍수원 성당은 1백여 년 동안 40명에 가까운
사제와 많은 수도자들을 배출한
성소의 요람으로도 유명합니다.
사제 양성은 한국천주교가 시작될 때부터
조선 천주교회의 절실한 과제였는데.
풍수원 공동체는 사제 양성을 위해
페낭에 신학생을 보내고,
그분은 나중에 사제가 되어 풍수원으로 부임하는데
바로 위에 언급한 정규하 신부님입니다.
정규하 신부님은 김대건, 최양업에 이어
한국에서 강도영 신부, 강성삼 신부와 함께
세 번째로 서품을 받으신 분이고
한국에서는 최초로 서품을 받으신 사제가 됩니다..
그분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목지가
풍수원 성당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태보 옥중수기’의 주인공인 순교자 신태보 베드로는
주문모 신부님께 세례를 받고
정약종, 황사영, 강완숙 등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로 피신합니다.
그들은 풍수원에서 함께 살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후 교우들은 선교사를 청하는 편지를
교황청과 북경 주교에게 여러 번 보냈는데.
청원서의 서명은 언제나 ‘신태보’의 이름이었습니다.
밀사를 보내는 경비 역시 신태보가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열정적이고 중요한 인물이었지요.
하지만 성직자 영입은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정해박해’는 1827년 호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해의 여파로 신태보는 경북 상주에서
붙잡혀 전주로 이송됩니다.
가혹한 심문과 형벌을 수없이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습니다.
당시 전주 부윤은 배교하지 않는 교인은
무한정 옥에 방치해 굶주림과 탈진으로 죽게 했답니다.
신태보 역시 죽음의 고통을 겪으며
12년을 감옥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839년, 71세의 나이로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합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너희는 나를 증언할 것이다.’
복음의 말씀처럼 신태보는 무려 12년을 견디며
예수님의 믿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인내의 순교자입니다.
'내 이야기 · 공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묵상(2022년05월25일) (0) | 2022.05.25 |
---|---|
오늘의 묵상(2022년05월24일) (0) | 2022.05.24 |
오늘의 묵상(2022년05월22일) (0) | 2022.05.22 |
오늘의 묵상(2022년05월21일) (0) | 2022.05.21 |
오늘의 묵상(2022년05월20일) (0) | 2022.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