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창업을 준비하며/중국무역·사업 경험기

중국 경제 총사령관 이름이 ‘코리아’ 알고 보니...

주님의 착한 종 2016. 6. 8. 11:48

글/강효백 경희대 중국법학과 교수 


"사공이 셋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국민속담’ 이다. 그런데 이 유구한 배달민족의 일반상식에 속하는 속담에 고개를 끄덕이는 중국인을 필자는 아직 단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30년 세월 동안.

“중국의 배는 사공이 여럿이어야 산으로 올라가지 않는가보다”

하기야 14억 인구, 56개 다민족 국가를 어떻게 1인이 통치할 수 있을까. 현대중국에서만 아니다 전편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반만년 노대국의 스펙을 톺아보더라도 극히 짧은 특수한 시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집단지도체제로 작동되어 왔다. 비단 정치 영역 뿐 만 아니다. 기업과 학교를 비롯한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단체와 조직에서 집단지도체제는 불문율처럼 정해진 정상적 조직구조다.

중국 배는 사공이 여럿이어야 산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중국은 참모와 계선 조직 기능이 엄격히 구분되는 사회다. 모든 정책은 집단 협의에 의해 결정되고 참모만이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중국은 참모와 계선기능을 공유하는 우리나라와는 그 체제상 성격을 달리하고 일례로 기업의 정책결정기구인 동사회(董社會, 한국의 이사회)와 그 구성원인 동사(董社, 이사)의 기능이 있다. 중국에서 동사장은 동사회를 군림할 수 없고, 동사장과 동사의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아닌 평등관계이다. 다같이 1인 1표 권한밖에 없다.

동사장의 경우 단지 절차상으로만 회의소집 및 회의 주재권한을 가질 뿐이다. 동사회는 정책결정기구로서만 존속하고 사장, 전무격인 총경리, 경리 등 계선 조직은 집행기구로서만 존속한다. 따라서 동사가 총경리나 경리와 같은 보직을 겸하지 않을 때, 그는 동사회의 결의가 없는 한 비록 부분적이라 하더라도 계선의 업무에 절대로 끼어들 수 없다.

이와 마찬기지로 2016년 5월 현재, 7인의 정치국상무위원(시진핑, 리커창, 장더장, 위정성, 류윈산, 왕치산, 장가오리)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치국 상무회의 총서기 시진핑은 중국의 최고정책결정기관인 동사회의 동사장이나, 또는 여러 명의 대통령급 위원으로 형성된 집단지도체제안에서의 대표 정도로 비유되는 게 가장 적합하다.

그런데 요즘 시진핑 1인 통치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일본과 서양 일각의 관측통들과 그 아류들의 목소리가 갈수록 소란스럽다. 그러나 “기찻길 오막살이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자듯” 여전히 중국의 핵심 권력은 정치국상무위원 7인의 집단지도체제로 작동되고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중국핵심권력은 ‘7두 체제’ 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또한 정치국상무위원을 겸하는 중국의 총리나 상무부총리를 대통령 중심제하의 그것 정도로 단순하게 보면 곤란하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 중국과 중국인을 바르게 이해할 줄 아는 천부적 심안을 가진 자는 가장 가까운 이웃에서 오랜 세월동안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 온 한국과 한국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분들 상당수는 여전히 천학비재한 필자보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저명대학 저명학자들을 훨씬 신뢰하려 들 것이다. 영화 「타짜』의 명대사처럼 “내 손모가지를 걸고” 누구 말이 정확한지 내기라도 걸고 싶다.

덩샤오핑이 맡았던 최고직위는 ‘상무부총리’

덩샤오핑은 단 한번도 국가주석이나 국무원 총리를 맡지 않았다. 정치9단, 경제10단 덩샤오핑이 3전 3기에 성공하는 순간부터 앉았던 정부 최고위직은 ‘상무(常務)부총리’였다. 덩샤오핑 이후 상무부총리는 제1부총리이자 경제부총리로서 중국 경제의 컨트롤타워의 수장을 의미한다. 덩샤오핑과 그의 후임 역대 상무부총리들은 개혁개방노선을 진두지휘하면서 경제건설을 당차게 밀고나갔다. 오늘날 G2 중국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상무부총리는 중국경제라는 경기장의 야구의 에이스 투수, 미식축구의 쿼터백 같은 핵심 포지션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경제에 가장 중요한 핵심인물(Key Man)은 누구일까? 장고려(張高麗 1946~ )정치국상무위원 겸 상무부총리이다. 그의 이름을 중국어 발음대로 ‘장가오리’로 부르자니 어감이 어색하다. 그에 한해서만 한국어 발음 ‘장고려’로 쓰고자 한다.

“왜 장고려 상무부총리인가?”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에 그렇다. 우리나라의 총수출액 비중의 31.8%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2015년 우리나라의 국가별 수출액 비중은 1위 중국 31.8%(중국본토 26.0%, 홍콩 5.8%포함)에 이어 2위 미국 13.3%, 3위 베트남 5.3%, 4위 일본은 5%에도 미치지 못하는 4.9%이다.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의 2배에 달하는 대중국수출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수지는 469억 달러, 역시 압도적 비중의 흑자 1위를 기록했다.

거듭 말하지만 중국의 장고려 상무부총리를 우리나라의 기획재정부 장관겸 경제부총리 쯤으로 여기고 지나쳐서는 곤란하다. ‘고려’, ‘상무부총리’, ‘일대일로’ 3가지 키워드로 인간 장고려 개인과 덩굴을 더듬어 참외를 따듯이 중국정치지도와 전략, 메가 프로젝트의 실마리를 따라가고자 한다.

첫째, 그의 이름, ‘고려’
둘째, 그의 직위, ‘상무부총리’,
셋째, 그의 고향이자 신 실크로드의 기점,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중국경제 총사령탑 수장은 모태 지한파?

일은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한 다음 이루어진다. - 정도전 삼봉집

이름이란 한 사람의 생애 동안 불리고 사후에도 그 사람을 대표하고 기리는 것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을 내다본다. 따라서 사람이 있고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고 사람이 있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필자는 딱 한번 장고려를 만난 적이 있다. 2003년 10월 28일(길일) 서울롯데호텔에서 개최된 한국-산둥성 고위경제인 좌담회를 필자는 옵저버 자격으로 참관했다. 장고려는 당시 산둥성 당서기 신분으로 100여명의 산둥성 고위 당정관료들을 이끌고 방한 중이었다.

‘고려’라는 특이한 이름과 함께 첫인상에서 온화하고 이지적인 외모에다 겸손함까지 몸에 배인 그에게서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우리나라 인구의 2배, 면적의 1.6배의 달하는 중국의 대성(大省)중의 하나인 산둥성 제1인자의 목과 어깨와 얼굴근육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음이 편해서 그랬던가?

“닌하오, 장 코리아(張高麗)”

프로토콜 경계선에서 10센티쯤 오버한, 필자의 발칙한 인사를 장고려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아 내민 손을 감쌌다. 그의 손바닥은 유난히 두껍고 따뜻했다.

장고려는 기조연설 서두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은 한국이라 했다. 한국기업들이 제일 많이 진출해 있는 산둥성의 수장을 맡고서부터는 한국을 더욱 더 좋아하게 되었지만 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국을 운명처럼 좋아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가문대대로 한국을 얼마나 흠모 경탄했으면 자기이름이 ‘고려’겠느냐고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대목에 청중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필자는 함께 웃었지만 박수는 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중국장기체류시절 중국의 허풍과 과장에 하도 많이 속아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를 좌우명의 하나로 삼았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정부가 얼마나 닦달을 해대면 한국기업들을 더 많이 산둥성에 유치하려고 성 1인자까지도 저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구나. 저 따위 속보이는 감언이설에 또 속아서는 안 되지” 다짐하며 한 쪽 귀로 흘리려 애썼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나머지 그의 연설은 하나도 기억에 남은 게 없다.

한 쪽 귀로 흘리려 했던 ‘이름이 고려라서 모태 지한파’ 라는 광고카피같이 달콤한 미사여구만 꿈결처럼 내 속귀 달팽이관 깊이 남아 있다. 장고려는 본론에 이르자 예사 중국고위관료들과 달리 매우 차분한 어조로 통계수자를 유난히 많이 나열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샤먼(夏門)대학에서 경제학과 통계학을 전공했다.

그때 졸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채했지만 머리 속으로는 온갖 의문부호들이 잡념의 군무를 마음껏 능력껏 추게 내버려 두었다.

“참 희한한 노릇이다. 이 산둥성 1인자의 성은 ‘장’씨고 이름은 ‘고려’라니?, 혹시 우리나라 신라말 해상왕국을 건설한 장보고의 후예가 아닐까? 하지만 장씨는 중국에서 왕(王), 이(李)씨와 더불어 3대 성이지, ‘장삼이사’란 말처럼 중국에 널린 게 장씨인데 장보고의 후예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런데 누가 그 수많은 한자 중에 하필이면 ‘고려’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설마, 중국인이 외국의, 그것도 망한지 6백년이 다 된 이웃나라의 국호대로 귀한 자기아들 이름을 지었을까? 아마 작명한 자가 높을 ‘고’, 고울 ‘려’ 한자 중에 좋은 뜻을 지닌 두 글자를 조합하다 보니 이름이 고려가 되었겠지? 고유명사 고려(KOREA)가 아니라 형용사 높고(high) 아름다운(beautiful)을 합한 합성 형용사겠지.”

나름대로 결론내고 그냥 진실 캐내기 굴착작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덮어버렸다.

일본 부총리의 이름이 ‘고라이(高麗)’ 라면?

만약 미국 국무장관의 이름이 ‘코리아(KOREA)’이거나, 일본 부총리의 이름이 ‘고라이(高麗)’라면, 우리나라 관·언·학계는 그냥 넘어갔겠는가?

필자는 장고려라는 실존인물을 오랫동안 잊어버렸다. 그런데 2012년 11월 시진핑 총서기 체제가 들어서면서 장고려는 중국정계의 핵심중의 핵심 7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등극했다, 이듬해 3월 중국경제의 총사령탑인 상무부총리를 맡은 지 이제 4년이 되었다.

이제 장고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어느 책에서인가 읽었던 예화 한토막이 떠오른다.

금광에 미친 미국 청년 아무개는 전소유주가 100미터 쯤 파내려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포기해버린 땅을 거의 공짜로 인수했다. 그런데 아무개는 거기서 1미터쯤 더 파내려갔더니 어마어마한 금맥을 발견해서 미국 금광계의 레전드로 남았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필자도 10여년전 파내려가다 중단해버린 그의 이름 ‘고려’부터 다시 파내려가기로 한다.

악마(실패)가 디테일에 있다면 천사(대박)도 디테일에 있다. 학문은 세상의 모든 마침표를 물음표로 바꾸는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갈구하는 진실은 종종 큰 데, 바깥 먼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소한 데, 안쪽 가까운 데에 있다.

장고려가 그저 장삼이사의 중국의 보통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가도 좋다. 그러나 미국과 함께 글로벌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G2중국의 경제사령탑의 수장의 이름이 고려(高麗)라니, 이건 뭐 그럴 수도 있는 걸 괜한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떨지 말라하며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다. 이건 엄청난 진실을 내장한 일대사건이다

우선 그의 이름이 ‘고려’ 일까? 한중양국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온오프라인을 찾아보아도 없다. 그때 그 이름을 누가 지었을까, 무슨 의미로 지었을까. 설마 우린나라의 고려라고 아닐까? 그때 산둥성 당서기 시절에 직접 물어볼 걸 후회막급이다. 직접 물어보기에는 그는 너무 높은 자리에 거하고 있다.

고려항, 고려촌, 고려집, 고려섬 그리고 장고려

“동해안 작은 마을, 그곳은 사랑스런 내 고향, 초록의 들판, 은백의 파도, 내 고향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 - 장고려, 사향가(思鄕歌)-

1946년 장고려는 동중국해 연안의 푸젠(福建)성 진장(晉江)의 한적한 어촌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현직 7인 정치국상무위원 가운데 유일한 바닷가 출신인 그의 나이 세 살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유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훗날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홀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산비탈 밭에다는 잡곡을 심고, 산에 올라 화전을 가꾸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야만 주린 배를 겨우 채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장고려의 친형제들 모두는 여전히 진장 근교 마을 거주하며 농사일을 하고 있다. 장고려의 고향 진장은 신발의 수도로 불리는 현급시로서 취안저우(泉州)시(푸젠성 3번째로 큰 대도시)의 관할하에 있다.

취안저우라, 필자의 고교시절 국사나 세계사 교과서인가, 참고서인가? 기억에 확실하지 않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은 지명이다. 세계문화사 관련 서적을 뒤적여 보았더니 확인했다. 중국의 취안저우는 해상무역이 번성하였던 고려시대 개성부근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3대항구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라비아와 유럽상인들이 취안저우를 거쳐 벽란도에 진출했고, 그들을 통해 고려의 영문 이름인 코리아(KOREA)가 중동과 유럽까지 퍼졌다. 고려인들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금속활자와 고려인삼이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중국의 취안저우를 거쳐 유럽으로 보급되었다.

중국의 온오프라인 자료를 열람해보았다. 놀랍게도 중국 전역에서 ‘고려’라는 지명이 제일 많이 남아있는 곳은 취안저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송나라 시대 취안저우에는 고려에서 온 수많은 승려와 상인, 문인들의 집단거주지, 요즘 말로 ‘코리아타운’이 있었다고 중국의 온오프라인 자료들은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취안저우의 구시가지 번화가에는 ‘고려 골목이라는 뜻의 '고려항(高麗港)'이라는 취안저우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유명한 골목이 남아 있다.

비록 골목길의 공식행정명칭은 규하항(奎霞巷)이지만 취안저우사람들은 천년부터 그래왔듯 여전히 고려항이라고 부르고 있다. 더구나 취안저우 10대 맛집이 바로 이 고려향에 있다. 그 맛집 명칭은 ’가오리샹 샤오츠덴(高麗港 小吃店)’. 중국 SNS상에서 널려있는 이 고려골목식당 맛집 기행기들을 읽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이번 여름방학에 그곳을 가서 고려의 맛을 한번 음미하고 싶다.

어디 그뿐인가. 취안저우시 관할하의 현급시 난안(南岸)시와 잉춘현(永春)현에는 각각 고려조(고려집이라는 뜻)마을과 고려촌(高麗村)이라는 마을, 취안저우 해변 가까이에는 고려섬(高麗島)라고 불리는 무인도도 있다.

사진 취안저우 고려골목(高麗巷)내에 위치한 ‘고려항 간이식당(小吃店)’ 간판 상단에 ‘푸젠의 유명맛집, 치안저우10대 유명 맛집’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인간은 환경에서 생겨나고 자란다.” 라고 헤로도토스가 일찍이 『역사』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고려골목, 고려촌, 고려집, 고려섬의 환경에서 장고려라는 이름의 인간도 생겨나고 자라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자연적 인문적 사회적 현상은 아닐까.

중국에서 출판된 『중국한어자전』(中國漢語字典)과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을 찾아보아도 ‘고려(高麗)’ 는 고려 또는 한국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즉 KOREA라는 의미 단 한가지 뿐이다. 즉 ‘고려’ 라는 고유명사만 있을 뿐 ‘높을 고, 아름다운 려’의 합성된 형용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중국 남성의 이름에는 아름다운 ‘려’를 거의 쓰지 않는다. 이상은 별도로 지난 2주동안 20여명의 중국인 친구와 제자들에게 확인해본 사항이다.

차이나(도자기) vs 고려청자, 송나라 진흙활자 vs 고려 금속활자

주류민족인 한족 위주의 중국역사상 하드파워면의 최전성기는 당나라였고 소프트파워면의 극성기는 송나라 시대였다. 그러나 이 당이나 송,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규모와 수량면에서는 세계 최고였으나 품질과 차원면에서는 우리나라의 신라와 고려를 따라올 수 없었다. 당과 송의 롤모델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은 각각 신라와 고려였다.

당나라가 그 시절,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국가, ‘중국(central dynasty)이었다면 통일신라는 세계를 향해 새로운 그물(new net)을 활짝 펼친 가장 아름다운 나라(beuty kingdom)였다.

당나라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제적으로 개방적이었던 다면 송나라는 문치주의적 자신만의 문화의 극성기는 송나라이다.

도자기는 중국문명과 중국인의 자존심의 중요한 상징이다. 아라비아로 도자기를 가리켜 Sini, 영어로는 China라고 하는데 SiniChina의 다른 뜻은 바로 중국(中國)이라는 뜻이다.

송나라 이르러서 도자기 기술은 최전성기에 달해 제조기술은 나날이 발전했다. 특히 북송의 영청(影靑)이라고 불리는 청색의 정교한 백자를 양산하였다. 이 도자기는 표면의 마치 옥과 같고 매끄럽기가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택하였다. 송나라 시대 경덕진(景德鎭, 중국발음은 ‘징더전’이지만 우리 눈과 귀에 익은 ‘경덕진’으로 읽겠다)에서 생산하는 도자기는 황실전용품이 되면서부터 그곳은 천하 제일의 도요지가 되었다. 필자도 상하이 장기체류시절 직접 손수 운전하여 장시성 경덕진을 가보았다. (중국최고 명산, 황산기슭을 경유하는 노선은 중국에서 보기 드문 명품 드라이브 코스라 할 만 하다. 강력추천)

경던진 시내의 건물벽과 대로에는 ‘세계도자기 수도’라고 표어가 휘날리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가로등과 전봇대조차도 도자기로 만들어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경덕진 도자기를 비롯하여 송나라 도자기는 취안저우항에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로 대량 수출되었다. 남송시대 대표 수출품은 오히려 실크보다 도자기였다. 그러나 송나라 최고의 경덕진 영청도자기도 도저히 따라올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려의 상감청자였다. 그들은 상감청자 제조 비법을 알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북송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는 고려가 밝고 은은한 바취옥색에 가까운 비색(翡色)청자를 완성했다고 찬탄조로 기록되어 있다. 남송시대에 간행된 「수중금(袖中錦)」이라는 서적에서도 천하제일의 명품청자는 고려청자라고 언급했다. 극상품 china(도자기)를 생산하던 송나라때 China(중국)도 짝퉁을 만들어 낼 엄두도 못내고 그저 경탄만 한 고려(Korea)의 상감청자였다.

흔히들 중국의 4대발명은 나침반, 제지, 화약, 인쇄술의 발명이라고 한다. 중국이 세계에 공헌한 불멸의 과학적 업적이다. 4대발명은 세계를 변혁시켰으며 인류의 역사를 약진의 발판위에 서게 한 동양문명의 휘황찬란함을 대표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중국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의 나침반,제지, 화약 등에 대해서는 미주알 고주알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인쇄술 분야는 듬성듬성 어눌하게 변한다. 그저 서기 북송 때 사람 필승(畢昇 960~1126년)이라는 평민이 진흙으로 활자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진흙활자도 활자인가? 인쇄의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도저히 목활자나 금속활자에 비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진흙활자는 진정한 의미의 활자가 아니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선조들이 처음 발명한 인쇄술은 1234년 상정고금예문은 세계최초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한 것으로 세계의 학계가 공인하고 있다. 서양의 구텐베르크의 그것보다 200여년 앞선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 2001년 9월에 지정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는 1372년(공민왕 21년)에 발간한 직지심체요절은 현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공인하고 있다. 그보다 70여년 늦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어냈다. 그의 활자는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의 바탕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중국의 4대발견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의 3대 발명이라고 해야 옳은 까닭이 인쇄술은 동양문화의 에센스를 이룩한 우리나라 선조들의 위대한 발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엽전의식을 벗고 중국의 사료의 사적을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면 중국이 우리 역사, 특히 ‘신라’와 ‘고려’에 대해서 보냈던 한없는 흠모와 경외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에 비해 ‘조선’에 대해서는 폄하와 경멸을 내포한 사료가 많다. 아마 조선시대의 사대외교와 특히 북한의 국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칭 ‘조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벽란도- 취안저우 간 해상실크로드가 활발히 운행되던 무렵부터, 특히 취안저우 일대의 중국인들이 천년을 한결같이 동경해온 지상낙원과 거의 맞먹는 이미지로 유전되어 있으리라.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지존의 높은 벽, 고려청자와 금속활자를 만들어내는 고려와 고려사람을 한없는 흠모와 경탄의 눈으로 보았으리라. 그리하여 고려의 부모 또는 집안어른은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의 이름에 유방백세(流芳百世)라, 꽃다운 나라 이름 고려처럼 후세에 길이 전해가리라는 염원을 담았으리라

이상은 필자의 황당한 논리의 비약이거나 제멋대로 추측에만 의존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님을 확신한다.

또한 필자는 장고려가 2003년 10월 28일 롯데호텔에서 산둥성 당서기로서 행한 연설이 그저 한국기업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한 미사여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제 산둥성에 진출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가들에게 탐문해보았더니 장고려가 성장, 당서기로 산둥성에 재임했을 때가 돈벌이가 쏠쏠한 황금시기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하고 있다.

즉 장고려가 선전시 당위서기에서 산둥성 성장으로 수직승진하여 부임한 2001년 봄부터 텐진시 당서기로 영전한 2007년 봄까지, 한국기업들에 대한 산둥성 정부 및 산둥성 예하 시와 현정부의 협조와 지원이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거의 만장일치로 증언하고 있다.

“내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가문대대로 한국을 얼마나 흠모하고 경탄했으면 내 이름이 ‘고려’이겠는가.”

이렇게 공언한 장고려가 지금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과 투자상대국의 경제사령탑의 총수를 맡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글/강효백 경희대 중국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