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창업을 준비하며/大陸歌-대륙에서 부르는 노래

[스크랩] 대륙가-이제 잔을 채우자!

주님의 착한 종 2008. 4. 23. 11:34

春來不似春.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98 3월말.

나는 평소보다 일찍 아침밥을 찾았다. 아이들이 곤히 잠든 새벽녁에 일어나 부시럭거리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는 것 부터가 평소와는 좀 다르다고 느낀 아내는 서둘러 밥상을 차려 주었다. 중국에 온 이래로 아이들보다 일찍 출근한 적이 별로 없었다. 중국의 학교는 7시 30 수업이 시작되기 때문에 항상  아이들이 먼저 등교를 했던 것이다.무엇에 들떠있는 듯이 보였던가 보다. 몇가지 양복을 계속 바꿔 입어보고 넥타이도 이것저것 고르는 것을 본 아내가.

 

"오늘.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보제?"

 

당년 42.

30대 중반인 92년에 중국으로 건너온 이래로 이 6년동안 중국대륙을 휘젓고 다니면서 하기 좋은 말로 동토의 땅,거대한 대륙에서 남들보다 먼저 사업의 기회를 찾기위해 온 몸으로 부닥쳐 왔었다. 초기 2년은 생존과의 싸움 그 자체였다. 수년간의 직장생활을 접고, 퇴직금으로 받은 것으로 분양받은 아파트 잔금을 지불하고 나니 남는 것이 없다. 지인으로부터 빌린 25백만원이 이제부터 중국대륙에서 불려나가야 하는 종자돈의 전부였다.불퇴전(不退戰).지금까지 내가 이것보다 더 많이 속으로 읇조린 어떤 노래도 단어도 없다. 아마 수 천,수 만번은 되었으리라.

 

나는 무역(貿易)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지식산업이라 믿고있다. 대학 4년동안 경제와 무역을 공부하면서 선배들의 숱한 신화창조를 터질것만 같은 희열로 읽곤 했었다. 나는 또 무역이야 말로 상거래의 종합예술이라 생각한다. 기술,생산,수출입,판매,유통 등을 아우르는 종합지식이 필요한 분야인것이다. 어느 한 부분만 잘 알아서는 성사되기 어렵다. 혹 성사되어 앞으로 남았다 하더라도 잘 모르는 다른 분야가 뒤로 그것을 까 먹어버리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나는 사업을 하던 장사를 하던 무언가 하나의 조건은 충족해야 한다고 보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이 많던지,엔지니어로서 경쟁력있는 상품을 개발 하던지,인맥과 학맥으로 거래를 틀 기반이 있던지, 이것도 저것도 없이는 한국내에서는 무엇이든 쉽게 할 수가 없음을 알았다. 한국은 이미 그 규모에 비해 인문인력의 포화상태라 생각했다. 이미 선배들이 곳곳에 물샐 틈 없이 포진 하고 있어서 그 틈을 발견하기가 쉽지를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중국이다. 그 당시 중국은 누구도 가기 두려워 했던,미지의 세계요, 한국과는 이제 막 거래를 시작한 단계였다. 그곳에는 대기업의 백그라운드도 필요없고, 인맥과 학맥으로 무장할 필요도 없다. 오로지 개인의 역량에 따른 삶과 죽음만 있을 뿐인 동네였다.

 

아침 7.

홍콩중로를 따라가면서 차창밖의 사람의 물결을 무덤덤히 내려다 보았다. 평소보다 많다고 느꼈다. 그럴수밖에 당시 나의 평소 출근 시간대는 8시30이다. 이때까지는 이미 출근시간이 끝나가는 시간에 항상 그 길을 지나온 것이다. 중국사람들은 참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터로 나가는 시간이 꽤 이르다. 물론 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든다. 일반적으로 10면 이미 한 밤중이다.

 

"사장님.오늘은 기분좋아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냐?"

 

윤기사는 길림이 고향이다.

93년부터 오늘까지 항상 나의 옆을 붙어 다니다시피 한 청년이다. 좀은 무뚝뚝한 타입이나 의리가 있고,인간미가 넘치는 친구다. 학력만 대학을 나왔어도 뭔가를 해 보고자 열심히 설쳤을 친구다. 처음 그와 만날때가 23살이었으니까 당시 스무일곱이나 넘었는데도 도체 장가 갈 생각을 안 하는 친구다. 한번은 고향의 부모님이 참한 처녀를 소개해 줄 테니 고향에 한번 다녀가라 했는데 답변이 일품이다.

 

"칭다오로 보내보세요. 한 두달 같이 지내보고 살 만한지 어떤지 결정 할께요.

안 살아보고 어찌 참한 처녀인지 못된 것인지 알수있어요?"

 

이말 듣고 아따~그래 네 말 맞다.

맞장구 치며 귀한 딸을 이 먼 외지로 보낼 볼 만큼 강심장인 부모는 없는 법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중국회사의 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한번은 밤중에 공장에 강도가 들었는데, 그만 경비에게 들켜서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세명의 경비중 두명의 중국인은 고함만 크게 지르고 뒤로 숨기에 급급 하는데,회사물건을 들고 도망 갈려는 강도들에게 그는 단신으로 그들 두명과 격투를 벌여 회사재산을 지킨것이다. 결국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년후 그가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전 직장이 문을 닫아 새로운 일터를 찾던 중에 누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우리회사에 한번 가보라 했던 모양이다. 비록 회사에 인원이 다 찼으나, 중국인으로서는 드물게 회사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그 의기가 아까와 잡일이라도 하라고 채용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먼저 운전대 가죽카바를 하나 사 주었다. 운전을 배워 나중에 차를 사면 운전이나 해 보라고 말이다 그후 96년에 차를 샀으니까 윤기사는 거의 3년 동안이나 운전카바 하나를 매일 쳐다 보고 살았다.회사차를 구입한 날 나보다 기실 그가 얼마나 기뻤던지 눈물을 다 흘렸었다.

 

"그래.오늘이 바로 그 지긋지긋한 채무를 다 갚는 날이다."

 

내가 중국거래처에 빚진 채무를 1년반 동안이나 안 먹고 안 쓰고 해서 조금씩 갚아 오다가 드디어 오늘에야 그 잔금을 다 청산하는 날이다. 1년반 전의 악몽을 깨끗이 씻어내는 날인데 나로서는 오늘 만큼 보람있고 뜻 있는날이 다시 또 있을까? 그 오랜기간동안 믿고 기다려준 거래처의 취경리,펑사장이 눈물겹도록 고맙게 느껴진다. 그들과는 몇 년째 거래를 하고 있지만 그들이 평소에 하던 말을 잊지않고 항상 마음의 채찍으로 여긴다.

 

"우리거래처들이 박사장 정도만 신용을 지켜도 이리 어렵지 않을것이다."

 

평소 수표를 받아 갈 때마다 한 말이다.

그랬었던 것이 여차저차 해서 지불이 그만 딱 정지 된 것이다. 그런데도 공권력 보다는 끝까지 기다렸던 것은 수년간 거래해 온 나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것 외에는 달리 이유를 찾을 길이 없다. 평소에도 그들은 항상 수 건의 소송에 연유되어 법원을 밥 먹듯이 드나들던 사람들이 아닌가. 자동차가 바뀌면 아하! 오늘은 또 누구 차를 차압한 모양이구나하고 생각하면 딱 맞다. 특히 펑사장은 지독하다고 주위에 소문이 자자한 양반이다. 친동생과 거래를 하면서도 결제가 한 달만 밀리면 갚을 때 까지 자가용이나 기계를 실어 와 버린다.친동생이던 말던,공장 안 돌아가 망하던 말던,한마디로 지독하다.

 

그런 그가 나는 봐 주었다. 갚는 기한도 없고,각서도 한 장 없이...

나는 이 바닥에서 한 하늘을 이고 사는 한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싶은 생각은 털끗만큼도 없었다. 조금씩이나마 시간을 두고 갚아 나가다가 오늘에야 그 잔액을 깨끗이 정산하는 것이다. 한번도 그들이 먼저 돈을 재촉한 적이 없었다. 돈이 생기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에게 통지를 하여 일부라도 그것이 단돈 몇푼이던 결제를 하였다. 우리회사가 어려워진 전후사정을 훤히 알고있는 그들로서는 매번 일부를 받아 갈 때마다  꼭 한마디 하고는 하였다.

 

"了不起!!"

 

1년반이 걸렸다.

그 동안 그들과 그렇게 자주 먹고 마시던 만찬도 비록 그들이 돈을 낸다고 강권을 하더라도 굳이 거절했던 것이다. 오늘은 그들과 먹고 마시고 싶다.그리고 빈잔에 새로운 술을 따라 채울것이라~

 

※ 평소 중국거래처로 부터 믿음과 신용을 얻어 놓는다는 것은, 사업의 최후의 보루요.버팀목이다.

   

 

스프링/

 

출처 : 칭다오 한국인 도우미 마을
글쓴이 : 스프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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