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한 번 찍혀 보는 게 소원이에요.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해서 환자는 부모님께 따뜻한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 한 채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갈 때에도 그 흔한 김밥
한 줄 싸갈 형편이 못 돼 배를 곯아야 했고 남들 다 찍어보는 사진
한 장 찍지를 못 해 추억거리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가난과 무지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모님 사랑조차 변변히
받아보지를 못한 채 커왔으니 일찌감치 공부는 뒷전이 되었고 여기저기
돈을 벌기 위해 어릴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의 유혹을 못 이겨서 절도죄를 지었고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칠 때쯤 자궁암이란 진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발견되었을 때에는 이미 많은 부분 전이가 된 상태라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형집행 정지로 꽃마을로 오게 된 것인데 처음에는 꽃마을이
교도소와 연계된 것인 줄 알고 무조건 집으로 가려고만 했습니다.
결국 1주일 만에 갈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지만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자 편안해했습니다.
통증은 비록 심했지만 같은 방에 있는 다른 환자들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지내려 애를 썼습니다.
거의 10개월이란 시간을 꽃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이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를 바쳐주었습니다.
때로는 엄마뻘 되는 사람이, 때로는 언니나 이모쯤 되는 사람이 떠날
때마다 친근하게 호칭을 부르면서 먼저 가 있으면 뒤따라가겠노라고,
지금은 내가 기도 많이 해줄 테니까 천국 가면 자리 좀 잡아놓으라며,
임종할 때까지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루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갈 때는 신부님이 임종을 지켜주세요.
내 앞에 가는 사람들처럼 나도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꼭 옆에 있어줄게. 그리고 자매님 기도 받고
먼저 천국 간 사람들도 같이 기도해줄 거예요. 그 사람들 임종할 때 기도
많이 해줬잖아요.”
“고마워요, 신부님. 저는 줄 게 하나도 없이 신세만 지고 가네요.”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데....
준 만큼 100배로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니까.
죽어서 천국 갔는데 기도를 안 했다! 그럼 각오해야 될 걸?
쫓아가서 혼내줄 테니까. 기도 많이 해요. 알았어요?”
“예.”
모처럼 활짝 웃는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사실 이 환자가 밝은 모습으로 지내긴 했지만, 한쪽에는 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엄마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형집행 정지로 풀려 나와 갈 곳이 없었을 때 암 통증을 참으며 집으로
찾아가 보았지만 본인 말로는 문도 안 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픈 것을 숨기고 간 이유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속을 많이 썩여온
터라 내놓은 자식이라고 상대조차 안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 한 채 자라왔는데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도 사랑을 받지 못 하고 가니 늘 가슴 한쪽이 저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연락이 되던 언니를 불러 엄마와의 재회를 준비했습니다.
절대 엄마에게는 딸 때문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겠다는 것과,
지금 죽을병에 걸렸으니 마지막으로라도 한번 얼굴이나 보여 달라고
사정하게 했습니다. 일단 얼굴을 한번 보고 나면 핏줄은 속일 수 없으니
실마리는 풀리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엄마를 만났고, 서로가 잘못을 청하는 모녀의 눈물로써
그 동안의 아픔들이 치유가 되었습니다.
역시 천륜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 후로 임종할 때까지 시간 날 때마다 엄마가 싸오는 음식을 먹으며
엄마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주교님께 꽃다발을 드리고 플래시 세례를 실컷 받은 후 두 달이 지날
무렵부터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습니다.
<임종 전 날>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말기 암 환자 중 30-40%는 임종 전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암 덩어리의 마지막
발악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는 진통제를 그야말로 쏟아 부어야 하지만 그러나 2-3시간은
그 끔찍한 통증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잠깐 잠깐 통증이 가라앉을 때면 환자가
“신..부님 제발 주..ㄱ ...여...주...세...요. 주...ㄱ...여...주....세요”
하고 흐느끼며 애절하게 바라보던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손을 붙잡고
“그래, 조금만 더 참아. 약을 계속 쓰니까 조금 있으면 통증이 가라앉을
거야.”
하는 말을 되풀이하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기만 할 뿐...
차라리 빨리 데려갔으면......
<임종>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서서히
눈을 감았습니다.
뼈에 가죽만 입혀놓은 것처럼 말랐는데도 끝까지 화장실 출입을 할 만큼
강한 정신력을 가졌던 여인이었습니다.
자궁으로 변이 흘러나와 화장실에서 하혈과 함께 피똥을 쏟을 때는 몇
초 만에 온 몸을 진땀으로 샤워를 하고 나오면서도 눈이 마주칠 때는
미소를 잃지 않던 여인이었습니다.
모진 통증이 올 때에도 입 밖으로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면서 잘 참던 젊은 나이의 여인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 세상 가서는 아무런 통증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요.
그 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행복한 시간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이 다음에 천국에서 만납시다. 잘 가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미소를 머금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지금은 사진을 많이 찍었던 지하성당 내 납골당에 안치되어 꽃마을의
하루 일과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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