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21) - 아기를 살리려고 죽음을 택한 엄마

주님의 착한 종 2007. 9. 14. 19:31

                         아기를 살리려고 죽음을 택한 엄마


29살 된 젊은 엄마가 아기 사진을 어루만지며 울고 있었습니다.

병명은 자궁경부암 말기.

자궁암이 전이가 된 상태에서 장폐색까지 겹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

코에는 위장관을 삽입해 가스와 위산을 뽑아내고 있었고 복부에는 가스가

가득 차 빵빵한 상태. 관장을 시도했지만 잘 빠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옆구리에는 신장에 직접 소변 줄을 박아 빼내고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못 먹는 상태에서 옆으로 눕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를 않아

등에서는 막 욕창이 생길 듯 벌겋게 짓물러 있었고,

목에는 C-line을 꽂아 수액이 들어가고 있었는데 유일한 생명줄이었습니다.


엄마는 그 아픈 와중에도 벽에 붙여놓은 이제 한 살쯤 되어 보이는 아기의

얼굴 사진을 어루만지며 눈물지었습니다.

“내가 얼른 나아서 아기를 키워야 하는데......”

“그래. 마음 굳게 먹고 이겨내야 한다.”

하며 남편이 옆에서 위로를 합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신부님! 제 아내는 인내심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합니다.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질 않아요.

지금 암과 투병중이면서도 고통을 참으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아마도 현재의 고통이면 다른 사람들은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일 텐데도

아내는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아프다고 하면 정말로 엄청난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겁니다. 아프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우선 통증을 없애기 위해 점차적으로 진통제의 양을 늘려갔습니다.

듀로 패취제를 25마이크로에서 50마이크로로 올렸고 중간 중간

타라신이나 디클로페낙 같은 보조진통제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급격한 통증이 올 때마다 황산 몰핀좌제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장에 차인 가스를 빼기 위해 항문에다가는 줄을 삽입해 장 깊숙이 관장약을

넣어 꽤 많은 양의 가스와 피가 섞인 묽은 변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편안해 보입니다.

남편 말로는 지금까지 이렇게 편안한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옆에 누워있는 할머니가 아프실 것 같다고 걱정해주는 것을 보니

이제 살  만한가봐요.” 

오랜만에 남편 얼굴에 웃음이 환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의 일생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내 아내는 참으로 불쌍한 여자입니다.

어릴 때 술주정뱅이인 아버지 밑에서 온갖 주정과 폭력으로 많이 맞으면서

지내왔습니다.

오죽하면 보다 못한 처가 쪽에서 강제로 이혼을 시켰다고 하니까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자 14살에 가출을 했습니다.


본인의 힘으로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와 온갖 굳은 일을 하면서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나마도 2학년까지밖에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한양여대를

입학했지만 1년 정도 다니고는 휴학계를 냈습니다.

혼자 힘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버거웠던 것이지요.


여자 혼자 힘으로 돈을 잘 벌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유흥업소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그럭저럭 생활이 안정되면서

친정 동생을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기도 했답니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갈 때 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잘나가던 때라 아내가 있는 술집에 자주 갔었는데 아내의

성격이 굉장히 착한 것을 보고 그것 하나보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신6개월이 될 즈음 자궁에서 출혈이 생겨서 병원에 가보니

자궁경부암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병원에서는 2기라고 하더군요.


의사 선생님 하는 말이 아기를 포기하면 산모가 살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아기를 계속 자궁에서 키우면 치료시기를 놓쳐

산모가 죽을 수밖에 없으니 택일을 하라고 하더군요.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기를 지우고 우선 치료를 하자고 했습니다.

아기야 없어도 살고 데려다가 키울 수도 있으니

우선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아기는 살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 살자고 우리 아기를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뜻이 너무 강해서 그냥 낳기로 했는데 체력이 따라주지를 못해서

결국 달 수를 채우지 못하고 임신 8개월 반 만에 제왕절개수술을 해서

낳게 되었습니다.


아기 때문에 약도 제대로 못 먹고 손도 못 쓰다가 뒤늦게 손을 쓸려고 하니

이미 말기가 된 상태였습니다.

삼성의료원으로 국립암센터로 옮겨 다니면서 항암제에 방사선 치료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지만 도저히 가망이 없었습니다.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서 모두 포기하고

마지막으로나마 편안하게 지낼 수 있길 바라면서 이곳에 왔습니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기 사진을 바라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지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되는데,

아기를 내가 키워야 하는데 하고 곧잘 중얼거리면서 웁니다.

딸 녀석도 엄마 젖 한번 빨아보지 못하고 떨어져서 크고 있습니다.

제 아내 정말 불쌍한 여자입니다.

솔직히 이곳에 올 때는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치는 남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임종당일

오전 11시쯤 급격히 호흡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종호흡이었습니다.

남편은 일이 있어서 새벽에 서울로 올라갔는데 큰일입니다.

이틀 후에나 아기를 데리고 온다고 하고 갔는데......

임종이 시작되면 짧게는 1시간에서 이틀 후에는 사망을 합니다.

거기다 청색증이 나타나는 걸 보니 3시간을 버티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오후 1시쯤 남편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아기 엄마는 마지막 숨을 쉬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봉사자들의 외침과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는 합창 기도소리에 섞여

29살의 젊은 영혼은 이승의 끈을 놓고 있었습니다.

1분만 더 버텼어도 남편의 작별인사를 받을 수 있었는데,

사랑하는 아기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지체할 수 없었나 봅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장과정 때문이지만 외로움도 많이 타고 사람을 좋아했던 여자.

자신의 아픔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를 잘 했던 여자.

속이야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너무 밝고 당당한 그런 여자였습니다.

아내를 닮은 예쁜 아기가 있으니

아내는 죽은 것이 아니라 늘 내 곁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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