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20) -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어느 수녀님

주님의 착한 종 2007. 9. 13. 19:20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어느 수녀님

(
이 글은 대한암학회 투병수기에서 가작을 받은 수녀님 투병 수기입니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장난처럼 말하곤 하였다
.
가톨릭 수녀의 목표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
대학 때 어떤 교수님이
너희는 굵고 짧게 살기는 텍도 없는 소리니까
,
가늘고 길게 살아야 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재미있기도 하고 그럴듯해서 그 때부터 나의 좌우명 아닌 좌우명이 되었다
.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어렸을 적부터 갖고 있었다
.
내가 제일 많이 닮았고 어쩌면 그분의 생의 모든 것이 비슷할 것만 같았던

증조 할머니는 90세까지 사셨기 때문이다
.

그런데 내 인생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
1996
년 여름 가슴에 무엇인가 잡히는 것이었다
.
비게 덩어리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를 6개월
.
그 다음 봄에 병원을 찾았고 조직검사 결과 수술을 하게 되었다
.
내 나이 만으로 30세가 되던 1997 3 9일 생일이었다
.
유방암은 아주 간단한 수술이라고 주위 분들이 위로와 힘을 주었다
.
감자 하나를 꺼내는 거라고 생각하라며...

그 말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아무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다
.

그런데 수술을 하루 앞두고 다음날을 생각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10시경 레지던트 선생님이 수술 계획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어느 부위를 얼마만큼 절단할 예정이라고, 마취를 해서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 등 여러 가지를 들었는데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고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
수면제를 먹고 자고 싶었지만 수술 때문에 12시가 넘은 시간에는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긴 밤을 보냈다.

수술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데 온 몸이 추워서 떨렸다
.
담요를 더 덮어도 마찬가지였다
.
아무리 마음으로
별거 아니야~ 하고 되새겨 보았지만

잠재의식에 두려움이 소리 없이 엄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

수술은 잘 끝났다. 임파선도 조금 잘라 냈다고 한다
.
지름은 1.5cm 정도 탁구공 만했다고 한다
.
나중에 2기말 정도 된다는 말을 들었어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
그로부터 한 달에 2회씩 6개월간의 항암제를 맞기로 하였다
.

수술보다 더 어려운 것이 항암제 맞는 일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견딜 만 하였다.
얼굴빛이 노랗게 되고 속이 조금 울렁거릴 뿐이었다
.
그런데 횟수가 더해 갈수록 사정은 달라졌다
.
얼마나 속이 뒤틀리고, 미식 거리는지

그러다가 토하기를 반복하는데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 만해도 토할 것 같아

기억하기도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
12
번을 맞기로 했으나 11번을 맞고 도저히 견뎌낼

힘이 없어 주사를 그만 맞고 싶다고 청했다.
다행히 뜻이 전해졌고 한 달에 한 번 진료를 보고

타목시펜을 먹기로 하였다. 그리고 6개월에 한 번씩 Bone Scane

초음파를 찍으며 체크를 해가기로 하였다.

항암제를 끝내고 그해 가을, 내가 소임을 하고 있던

천안복자여고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갔다
.
몸이 예전 같지는 않았으나 그만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
여고생들의 젊음의 열기 덕분인지 빠른 시간 내에 내 생활의 패턴으로

자리를 잡고 암 환자란 의식을 하지 않고 일상을 열심히 살았다.

그 다음해는 수녀원에서 일생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종신서원 준비를 위해 집중 수련에 들어갔다.
꽃동네에서 무의탁 할머니들을 위한 목욕, 청소, 식사준비 등

육체적인 봉사활동을 한달이 넘게 체험하면서
삶의 의미를 더욱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

1999
2월 종신서원을 하고 새로운 소임지에 파견이 되었다
.
아직 건강이 다 회복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수도회의 결정에 따라 본당(의정부1동 천주교회)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다
.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환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

한 달에 한번 환자들을 위해 방문을 갈 때면 내가 겪은 상태이기 때문에

진심어린 위로를 할 수 있었고,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는 시간들이 되었다
.
학생들과 체육대회, 소풍, 캠프도 함께 하고 자모회원들과

도봉산, 수락산, 소요산 등반도 하면서 의욕적이고 활동적으로 보냈다
.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옛 순교성인들의 삶을 본받고자 실시한

도보성지 순례에 2 3일간 함께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지향을 갖고 참여한 시간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흘리는 땀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성서에 보면 10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셨는데 아홉은 그냥 가버리고

1
명만이 예수께로 와서 감사를 드렸다는 얘기가 나온다
.
배은망덕한 아홉 명 중 한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는 자주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수술한지 5년이 지나도 이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
병을 이겨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정보를 들었는데

그렇게 무사히 4 7개월을 보냈다.

2001
9월 잔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
평상시에는 아무런 증세가 없는데 말을 하면 밭은 기침을 하였다
.
기침을 없애기 위해 도라지 삶은 물을 마시기도 하고
,
무우즙을 내서 먹기도 하고, 살구씨도 먹었다
.
11
월이 되어 바람이 차가워져서인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잔뜩 부어 침을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편도선이 부었다
.

동네 병원에를 갔다
.
증상을 이야기 하고 감기가 온 것 같다고 의사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
흉부 X-ray를 찍고 필름을 보시더니

조금 이상하다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신다.
필름을 복사해 가지고 내가 다니던 가톨릭대학교 성모자애병원

호흡기내과에 가니 필름을 보자마자 입원을 하라고 하였다
.

생각지도 않은 일이 발생했다. 입원하여 몇 가지 검사를 더했다
.
나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느낌이 오기 시작 했다.
"
이제까지 잘 견뎌왔는데 무슨 일이 더 이상 생기랴
"
하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숨겼다
.

3
개월만 지나면 수술한지 5년이 되는데
...
그러면 병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살리라 기대 했었는데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처음 보는 선생님이 몇 분이 더 오셨다
.
새롭게 나를 맡으실 혈액종양내과 선생님들이시란다
.

간단히 말하면 암이 폐로 전이 되었다고 한다
.
세상에... 세상에...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이토록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가?

하느님도 원망스럽고 세상도 미웠다
.
하느님의 사랑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
정말 미치도록 괴로워서 지레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

가족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
친구수녀님이 여동생에게 전화를 대신 해주기로 했다
.
전화를 하는 사람이나, 전화를 받는 사람이나
,
옆에 듣고 있던 사람이나 모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
며칠 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과 남동생 가족들이 병원으로 오셨다
.

어머니는 내손을 잡으시며
내가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

하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셨다.
평소 감정표현을 안하시는 어머니이셨는데, 너무나 우셨다
.
내 심장도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불효가 어디 있는가
?
부모님이 주신 몸을 잘 관리했어야 했는데

이런 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말이다.부모님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

사도직을 하고 있던 본당에서 임기를 3개월 앞두고 짐을 정리하였다
.
젊은 수녀가 병에 걸려 본당을 떠나는 것을 지켜본 분들도

자신의 고통처럼 함께 해주셨다
.
죽을 위험에 있거나 병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 위해 주는 병자성사도 신부님께 받고 본당을 떠났다
.
11
월 초였는데도 바람이 몹시 찼다
.

이제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주치의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
수녀님들이 무슨 걱정이 있어요? 맞는 말이다
.
책임져야할 자식이 있나, 챙겨 주어야 할 남편이 있나
,
병원비 걱정을 할게 있나, 살아도 하느님의 것이고 죽어도

하느님께로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죽음이 가깝게 내게로 와서 두려울 때마다 이 말씀을 생각했다
.
24
세에 갈멜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난 성녀 소화데레사도

그의 자서전에서
죽음이 나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데려 가는 것이다
라고 고백하셨다
.

죽기보다 싫었던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
5
년전 보다 더 강력하게
...
머리가 한 웅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무섭고 떨렸다. 머리를 밀었다
.
수녀가 아니라 스님이 된 것 같았다
.
머리카락을 잃은 상실감이 굉장히 컸다
.
아무리 부정해도 이제 나는 암 환자가 분명했다
.

우울해졌고, 계속되는 설사, 수면제 없이는 잠도 들지 못했다
.
백혈구가 떨어 질 때면 촉진제를 맞아야 했고
,
온 몸이 몸살기가 있는 것처럼 쑤시고 아팠다
.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
하루 하루가 마지막 이라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
삶도 생각하지 말고,죽음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오늘 만을 생각하며 살 뿐이었다
.

죽음은 완전한 자유다라고 본회퍼가 말했다
.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
내려 놓은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고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은가
?

그래 나는 결국 한번은 죽을거야
...
그 시간이 예상보다 빨리 왔을 뿐이야...

천수를 누리는 사람도 부럽지만, 가는 날을 알고
남은 날을 계획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군...

길지 않은 나의 삶을 정리했다
.
수녀원에 들어와서부터 썼던 일기장 8권을 불에 태웠다
.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고자 애썼던 흔적들
,
인간적인 미움과 사랑으로 몸부림쳤던 기억들을 없앴다
.
잘났건 못났건 간에 내 삶의 기록들은 소중했기에 없애기에는 아까웠다
.
그러나 내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 내 삶의 기록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
아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

가족들과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
엄마, 하느님이 부르시면 피할 방법이 없어요...

그럼, 하느님께 맡길 수 밖에...

귀엽고 사랑스런 조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
학교에 들어가고, 교복 입은 모습, 사춘기를 어떻게 겪을 것인지
?
어떤 이성 친구를 만나고 결혼하게 될는지 궁금한 것이 많은데

...
포기해야만 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가족 여행을 설악산으로, 양평으로 다녀왔다
.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가면서
.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

2002
년 새해를 맞았다
.
매년 그랬듯이 목표를 세웠다
.
그러나 여느 해와는 다른 목표였다
.
1)
병 이겨내기 2) 주님께 모든 것 감사하기

참 어려운 목표이기도 했다
.
그해 겨울 몸과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다
.
때로는 길고, 외롭고, 지치고 힘든 시간이었다
.

손 발이 저리기 시작하고, 글씨도 삐뚤빼뚤 이라

일기도 쓰기 어려워 졌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뎠는지 그럼에도 대지에 봄은 찾아왔다
.
병원 앞에 벚꽃이 아름답고 화사하게 피었다
.
벚꽃을 보는 기쁨으로 눈을 떴고, 하루 종일 벚꽃을 바라보았고

내일 또 벚꽃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눈을 감았다
.

벚꽃이 모두 떨어질 즈음 8차 항암제를 맞기 위해

심장 초음파를 검사하니 안 좋다고 한다.
입원을 했는데도 앉지도 못하겠고, 눕지도 못하겠고
,
서지도 못하겠다.숨이 찼다
.
그동안 잘 견뎌왔는데 이제 올 것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목욕도 혼자하기 힘들어 졌다
.

간호사인 친구수녀님이 근무가 끝나고 피곤한 중에도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어 목욕을 시켜주었다
.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
매일매일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염려와 사랑을 주는

수녀님들이 있어 내겐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내일이 아름다운 이유는? 꿈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며

마지막 기도를 드리지만 아름다운 내일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은총이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선물 말이다
.
결국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였고

6
18일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들었다.
게임이 끝난 시간은 밤 12 30분이었고 우리 국민 모두가

그랬듯이 감격과 환희와 기쁨은 나에게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
동생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언니 불가능은 없어,단지 어려운 일이 있을 뿐이야
,
언니 병도 나을 거야


나는 그날 두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이탈리아를 이긴 감격 때문에
,
감동적인 문자를 받고
.
이 문자메시지는 지금도 가끔 보곤 한다
.
월드컵은 나에게 꿈을 이루어 주었다
.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시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
축구를 중심으로 나의 컨디션을 조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나에게도 왔다
.
9
3일 주치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
무사히 12번을 맞았다고...

3
개월마다 추적 검사를 하자고 하신다.

항암주사를 맞는 동안 매일매일 삶과 죽음을 왔다 갔다 했다
.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평화와 불안이 쉴 사이 없이 교차되곤 했다
.

병중에서 의지적으로 노력한 몇 가지가 있다
.
첫째, 일기쓰기이다
.
나약한 내 자신을 만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질병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둘째는 독서이다
.
기도생활에 도움을 주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심화시켰다
.
죽음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
또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유우머를 잃지 않게도 하였다
.

셋째는 운동이다
.
운동은 곧 생명과 직결된다. 매일매일 걸었다
.

넷째는 식사이다
.
암에 좋다는 민간요법을 찾아헤매지도 않았고

가리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

그동안 나와 비슷한 시기에 발병했던 코메디언 이주일씨
,
그리고 얼마 전 탤렌트 이미경씨의 죽음을 보았다
.
현대의 가장 큰 사망원인인 암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
이겨냈다고 생각했다가도 또 발병하기 쉬워서

치료를 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현실임을 안다.

3
개월 후면 항암주사를 끝낸 지 2년이 된다
.
아직도 한달에 한번 흉부 X-ray를 찍으러

병원에 가려면 불안하고 초조하다
.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암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이 더 큰 고통임을 체험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우리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가지는 불행은
,
우리를 천국에다 매달아 놓는다
라는 말을 나를 행복하게 했다
.

나는 이 질병()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다라고.
내 자신에 대한 실망과 무능을 통하여
,
또 잃어버린 건강에 대한 슬픔 속에서 아픔과 고통의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 자신을 깨뜨리고 열어놓을 수 있었기에
은총이고 선물일수 있었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의 일상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
수도원에 5시 기상음악이 울릴 때 오늘 하루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눈을 뜨고,
도서관에서 책들을 만날 때 반갑고 고맙다
.
할머니 수녀님들이 저를 만나면

기적이야~하시는 소리가 듣기 싫지 않다.
기적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며 발생하는 것이지만
,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행복의 기적을 붙잡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암으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이에게 말하고 싶다
.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마더 데레사의 기도로 나의 체험을 마치고자 한다
.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당신에게서

고통스런 죽음과 일상의 투쟁을 본받게 하시어

더욱 충만하게, 더욱 창의적으로 살게 하소서
.
끊임없이 자신에게 죽고
,
이기적인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때에만

진정 살 수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
당신과 더불어 죽음으로써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후기>
수녀이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흐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신앙이 나를 견디게 한 가장 큰 힘이었기 때문이다
.
다만 암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수녀도 암에 걸리고 고통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그래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

조카의 문병을 가기 위해 들른 서울대 병원게시판에서

암중희망이란 공모를 우연히 보았다
.
준비할 시간도 촉박했지만 다시 찾은 삶을 정리하고자

부족한 글을 내놓는다
.
가늘고 길게 살고픈 나의 바램은 과연 이루어질것인지
...^^*
끝으로 함께 고통을 나눈 가족들과 아낌없는 기도를 해준

수도공동체의 자매들과 한치화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수녀님 글을 읽으며 희망은 가장 큰 치료법이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수기가 길어 망설였지만 지금 어디쯤에서 병과 싸우다

마음이 두렵고 나약해진 교우님들에게는

희망과 용기가 될 수 있기에 올립니다.
질병과 싸우시는 모든 분들에게 수녀님의 투병수기가

따뜻한 사랑의 힘이 되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