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기봉이가 행복한 이유

주님의 착한 종 2007. 6. 20. 10:02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우리가 불행한 이유>

작년 이맘때쯤 개봉된 영화 ‘맨발의 기봉이’ 기억나시나요?

호수처럼 잔잔한 남쪽바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기봉이란 노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실제 나이는 마흔이지만, 어려서 얻은 열병으로 인해

정신연령은 8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기봉이는 효심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기봉이는 이집 저집 불려 다니면서 동네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일당으로 양식거리를 받았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에게 가져다 주고

싶었던 기봉이었기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가곤 했습니다.

이러한 그를 보고 동네사람들은 ‘맨발의 기봉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려운 생활 형편이었지만 기봉이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면서 사는 기봉이의 얼굴은 항상 밝고 환합니다.

동네사람들이 굳은 일을 시켜도 늘 싱글벙글합니다.

일한 대가가 소홀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좋습니다.

그런 기봉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한편으로 속이 무척 상합니다.

어느 저녁,

뭐가 그리도 좋은지 뭔가를 만들며 싱글벙글하고 있는 기봉이를 향해

어머니가 묻습니다.

“아그야, 너는 인생이 그렇게 행복하냐?”

그 순간 기봉이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크게 대답합니다.

환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응, 행복해. 엄마!”

객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행복할 구석이란 조금도 없는 기봉이었는데,

지체 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그렇게 행복할까 생각해봤습니다. 하루 온 종일.

결론은 이랬습니다.

기봉이가 행복했던 이유는

삶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 이웃에 대한 기대치, 공동체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기봉이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너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단순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상대방 위에 놓기보다 상대방 밑으로 두었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가질 것 안 가질 것 다 가진 우리들이건만 이토록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기봉이처럼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큰 것만 바랐기 때문에, 삶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웃들과 너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워왔기 때문에, 남과

싸워 늘 이기려고만 했기에 그토록 불행했던 것입니다.

결국 행복해지는 비결은 내려가는 데 있습니다. 비우는데 있습니다.

지는 데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바보가 되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바보가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보십시오. 바보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결국 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보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바보처럼 산다는 것, 엄청 억울하고, 엄청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시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바보 중의 바보’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신부님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