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늘의 묵상(2022년08월11일)
.
.
얼마만인가요?
비가 그치고 잠시라도 햇빛이 비추고
그리 덥지 않은 쾌적한 날씨를..
예보와 달리 어제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젠 비가 그쳤나.. 했는데
밤이 되자 다시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늘 아침에도 조금씩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가물고
너무나 더워서 비라도 내렸으면 했는데
막상 단 몇 일을 쉬지 않고 쏟아지는 폭우를 만나니
일상이 순식간에 바뀌고 맙니다.
태풍이 불어온 것도 아닌데
북쪽과 남쪽의 기압 차이로 생긴 이 현상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요?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반 지하 방에 살던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에 깊은 애도를 드립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자연현상 앞에
슬픔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들입니다.
그저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이런 변명들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할 때가 지났습니다.
정부가, 이 사회가, 우리 모두가
어떻게 책임을 지어야 하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이번 폭우로 생명을 잃고, 재산을 잃고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들께 싶은 위로를 드립니다.
오늘은 제 천사 같은 작은 딸의 영명축일입니다.
착하고 예쁘고, 어디 내놔도 부족함이 없을
제 작은 딸은 한 남자의 지어미로
한돌 된 아가의 엄마로,
그리고 인천시민의 정신건강과 복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빠의 소망이 있다면
조금 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고
성녀 글라라를 닮아
조금 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제 작은딸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마태오 18,21―19,1입니다.
저는 과거에도 용서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여러 번 말씀 드렸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
큰돈을 빚진 사람이 탕감을 받았으나
정작 그는 아주 작은 돈을 갚지 못하는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는 내용에 누구든 분개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우리 주위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평생 뒷바라지한 아내를 속이고
다른 여자와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금방 부도날 줄 알면서도 친구를 속이고
돈을 빌리는 이도 있습니다.
게다가 국제적인 사기꾼 조직을 만들어
교묘한 수법으로 이른바 보이스 피싱이라믐
사기극으로 어수룩한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
전 재산을 털어가는 등
그렇게 해서 남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내면서
고통을 안기는 나쁜 인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도 용서해야 될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가만히 보면 형사법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다가 홧김에 주먹을 휘둘러
상대방의 코피를 터뜨리거나 눈두덩이를 붓게 하거나
이빨이 흔들리게 만들었다면
이런 경우는 단번에 폭력 등의 처벌법으로
구속이 됩니다.
그런데 사기로 상대방의 전 재산을 날리게 하고
그로 인해 가족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홧병이 들어 정신 이상이 되거나
심지어는 일가족이 자살을 하게 만드는
끔찍한 일을 제공한 사기꾼들의 형벌은
생각보다 너무나 미약한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기를 치고 거짓으로 꾸며대는 범죄는
모두 있는 자들, 사업하는 자들, 정치하는 자들의
전유된 소행이라서 그럴까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은 왜 생겼을까요?
예수님은 죄 자체를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아니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죄를 뉘우치지 않는 사람도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요?
죄를 결코 뉘우치지 않는 사람도
용서하라 하신다면
하느님은 왜 지옥을 만드셨을까요?
저도 사기를 당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사람으로
사기꾼만큼은 절대 용서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며
늘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기도를 해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결국,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용서를 하던 안 하던
죄의 심판은 어짜피 하느님의 몫이므로
그 사람들은 용서를 하되 그 죄는 잊지 말자...
자연은 죄지은 상대를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만이 용서의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닮으려면 자꾸만 용서를 베풀어야 한답니다.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한 답으로 주님은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숫자가 없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현대인들은, 저도 여러분도 숫자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숫자에 매여 살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시는 군요.
어쩌면 정작 우리가 베풀어야 할 용서는
단 한 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순간에 생긴 미움이 아닙니다.
쌓이고 쌓인 미움입니다.
한 순간에 용서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욕심일 뿐이지요.
그러니 미움이 생긴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주었을 수 있고
그래서 상대방이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하면,
그러니까 남을 용서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할 수도 있겠습니다.
끝없는 용서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이 내리실 때까지
기도하며 인내하며 살아봅시다.
어느 날 주님께서 도움의 은총으로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야기 · 공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묵상(2022년08월13일) (0) | 2022.08.12 |
---|---|
오늘의 묵상(2022년08월12일) (0) | 2022.08.12 |
오늘의 묵상(2022년08월10일) (0) | 2022.08.10 |
오늘의 묵상(2022년08월09일) (0) | 2022.08.09 |
오늘의 묵상(2022년08월08일) (0) | 2022.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