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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7월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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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많이 더우셨지요?
태풍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다행히도 일본열도 쪽으로 진로를 잡아
우리 나라는 태풍의 피해에서 벗어났지만
태풍이 몰고 온 더운 공기가
한반도를 끓게 하고 있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오늘은 우선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 기억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1821-1846년)는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나
15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의 주선으로
중국 마카오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하여
1845년 8월 17일 중국의 김가항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충청도 나바위에 상륙하여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만주에서 기다리던
메스뜨로 신부 일행을 입국시키려고 노력하던 중,
1846년 6월 5일 밤에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수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마침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79명의 순교자를 시복하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김대건 신부님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단순히 첫 사제였기에 기억하는 것만은 아니랍니다.
박해 시대의 희망이었던 분이었기에
기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교우들은 외국 선교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말 못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희생에
모든 것을 묻어 두고 지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합니다.
뿌듯하고 감동적인 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제 생활은 일 년으로 끝납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방인 사제가
이십 대의 순교자로 새남터에서 사라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교우들에게는 아픔을 넘어 크나큰 시련이었기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의심이 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고 인내할 수 밖에요…
그분의 순교가 희생 제물임을 깨닫기에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니 말입니다.
스물여섯 살의 죽음은 사제가 아니더라도
애절한 죽음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교우들의 슬픔은 절망에 닿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를 데려가셨는가?’
이 땅에 신앙의 자유가 시작되기 까지
그분의 순교는 조선 교회를 위한
희생제물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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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흔들리던 교회에
거름이 된 희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은총이 되어
우리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여.
이 땅의 평화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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