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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5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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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월 14일은 사도 성 마티아 축일입니다.
사도 성 마티아는 성경에도 딱 한 번 밖에
언급되지 않아서 궁금하실 것입니다.
우선 사도 성 마티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술자의 주보 성인인 성 마티아는 열두 사도 중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죽음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된
예수님의 제자임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성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서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후보자로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 다음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한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열두 사도로 선출된 사실 이외에
성 마티아에 관한 언급이 더는 나오지 않는데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한 72명의 제자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자캐오나 사도 성 바르나바)와
동일 인물이라는 전승도 전해지고 있다고
교회의 사전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 마티아에 대한 전승은 모호하고
불확실성을 포함하고 있지요.
그의 순교에 대해서도 두 가지 전승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가 된 후 오랫동안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지방을 거쳐 북쪽으로 가서
흑해 연안의 콜키스(오늘날의 조지아 일대)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는 설과
예루살렘에서 유다인에게 돌을 맞고
도끼 또는 미늘창(도끼와 창을 합친 무기)으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도 전해집니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그를 표현할 때
십자가를 들거나 도끼 또는 미늘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성 마티아의 유해는 나중에 성녀 헬레나 황후에 의해
발굴되어 로마로 이장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다시
독일 남서부의 트리어로 옮겨졌으나
나중에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분실되었다가 발견되어
다시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 마티아는 오늘날까지도
트리어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마티아 성인은 목수와 재단사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이상은 가톨릭 사전에서 옮겨 편집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 15,9-17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체는 바로
“서로 사랑하여라.” 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설명하시겠습니까?
혹시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라고
시작되는 남진씨의 히트곡 가사처럼
“눈물의 씨앗”이라고 대답하진 않으시겠죠? ㅎㅎ
60대 중반부터 80대까지 되시는 분들은
다들 잘 기억하실 유명한 노래였는데..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다시 묻겠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답하기가 어려우시지요?
질문은 분명해도 답은 모호합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닌 탓이기 때문 아닐까요?
연애를 해보셨습니까?
저는 연애를 못 해봐서 잘 모르는데
연애를 하면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진다고 하지요.
연애를 할 동안에는 모든 게 다 예뻐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모든 것을 다 참고 받아주고 인내할 수 있다던데
과연 그렇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체험만이 사랑을 느끼게 한다는 것...
그건 맞는 것 같습니까?
연애뿐일까요?
자녀에 대한 부모의 관심을 보노라면,
‘이게 사랑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부부간의 애정이나 형제간의 우애 역시
사랑을 짐작하게 하지요.
관심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사랑하고 있는데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바꾸어 본다면,
‘내가 너희에게 관심을 가지듯이
너희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라.’라는 말씀입니다.
관심은 돌보는 행위입니다.
“물을 주며 꽃나무를 가꾸듯
서로에게 생명력을 주며 사는 것”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하느님의 관심이 있기에
세상 만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겠고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곧
‘내가 너희를 감동시켰듯이
너희도 서로에게 감동을 주라.’는 뜻일 테고요.
그러므로 사랑은 감동일 것입니다.
감동을 주고받는 행동입니다.
감동을 주어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명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동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청해야겠습니다.
오늘 오후는 2차 연령회원 영성교육
두 번째 날입니다.
연로하신 수녀님 한 분도 강의를 하시는데
은근히 걱정이 되지만..
주님께서 잘 안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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