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청도 이야기

칭다오맥주’의 고향 청정해양도시 칭다오를 말한다.

주님의 착한 종 2016. 7. 27. 07:55



매년 8월 중순이 되면 중국의 맥주 마니아와 미식가들이 산둥성 칭다오로 몰려든다. 청정도시로 유명한 칭다오에서 해산물과 함께 맥주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다. 2주간 열리는 칭다오 맥주축제는 세계 3대 맥주로 유명한 칭다오 맥주와 칭다오 시정부가 함께 1991년부터 개최해 중국을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자리 잡았다.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칭다오 맥주는 칭다오 인근 노산의 지하수로 만들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제조된 칭다오 맥주보다 맥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산둥반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바다를 접한 칭다오는 다롄 샤먼 등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환경이 깨끗한 도시로 꼽힌다. 서구풍의 이국적인 주택과 청정 해안은 ‘이곳이 중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칭다오의 이런 모습은 최근 2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전에는 반세기 가까이 역사의 굴곡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중국해상교역의 중심지, 청나라 말기 시련

약 6000년 전부터 문명이 시작된 칭다오는 진나라 시황제가 직접 방문한 뒤로 한나라·당나라·명나라를 거치며 중국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칭다오의 시련은 청일전쟁에서 패해 국력이 쇠퇴한 청나라 말기에 시작된다. 1897년 독일이 선교사 피살사건을 구실로 함대를 파견, 산둥반도를 점령한 것. 전비조달조차 힘들던 청나라는 이듬해 독일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99년간 칭다오 자오저우만을 조차지로 할양했다. 독일은 칭다오를 극동지역 해양군사기지로 키우기 위해 현대식 항만과 철도를 건설했다.

당시 독일인들이 조차지에 지은 건물이 아직도 남아 칭다오는 중국에서 가장 유럽풍이 강한 도시로 꼽힌다. 구시가지에 보존된 100년이 넘은 유럽풍 저택 200여 채는 요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칭다오맥주도 독일 지배시기의 유산이다. 고국의 맥주를 그리워하던 독일인들이 독일 원료와 공법을 들여와 맥주제조를 시작한 게 칭다오 맥주의 기원이다.

하지만 독일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1차대전이 발발한 뒤 어수선한 국제정세의 틈바구니에서 1914년 일본이 독일군대를 공격,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반도 일대 지배권을 확보했다. 다시 8년 뒤에는 우여곡절 끝에 중국 민국정부가 거액의 배상금을 무는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칭다오에 대한 주권과 철도 운영권을 수복했다. 1945년 일본이 완전히 패망한 뒤에는 국민당 정부가 칭다오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자 세계최강 미 해군이 칭다오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던 국민당군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때 상주 미군이 7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하지만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몰아내자 미군도 칭다오에서 철수했다. 20세기 전반기, 불과 50여 년간 칭다오의 지배세력이 청나라, 독일, 일본, 민국정부, 국민당, 공산당으로 숨 가쁘게 바뀐 셈이다.



산업은행 칭다오 지점 개소식

▶통일신라시대 한중협력 주무대

한반도와 서해를 마주한 칭다오는 우리와도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은 도시다. 특히 통일신라 시대에는 한중 협력의 주무대가 바로 칭다오였다. 당나라에 유학 가는 유생과 학승, 양국을 오가며 교역하던 상인들이 서해 바닷길을 건너 칭다오에 대거 몰려들면서 신라인 집단 거주지역 신라방이 조성될 정도였다. 당시 해상왕 장보고가 법화원을 지어 해상교역의 거점으로 삼았던 웨이하이도 칭다오 인근에 있다.

시진핑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네트워크 복원) 사업을 추진하면서 칭다오가 다시 한국에 가까워지고 있다. 인천 또는 평택에서 서해를 건너 산둥성까지 닿을 수 있는 한중해저터널 건설방안이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논의된 것. 100조원으로 추산되는 막대한 사업비가 최대 관건이지만, 연간 1000만명에 달하는 한중 인적교류와 향후 일대일로 사업 연계성을 고려할 때 허무맹랑한 구상만은 아니다. 해저터널이 현실화되면 우리나라에서 기차를 타고 40분 만에 산둥성에 도착하고, 여기서 다시 중국 내륙은 물론, 유럽과 동남아까지 갈수 있게 된다.

중국 경제기획 부처인 발전개혁위원회도 지난해 ‘환보하이만 발전계획’을 통해 한중 간 서해 열차페리 건설 방안을 연구하기로 했다. 한중 열차페리란 인천에서 컨테이너선에 철도를 실어 산둥성까지 페리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양국 철도망을 연결하는 사업을 말한다. 천문학적인 공사비가 소요되는 해저터널에 앞서 실현가능성이 높은 열차페리를 먼저 추진해보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경제구조 전환의 롤모델

철강, 석탄, 석유화학, 조선 등 중국경제를 이끌던 전통산업이 구조조정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칭다오는 중국 도시들 가운데 경제 구조전환의 롤모델로 평가받는다. 내몽고와 지린성 등 동북지방이 세계경제의 흐름에 대처가 늦어 대규모 실업과 부채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칭다오는 비교적 발 빠르게 대응해 혼란을 최소화했다. 칭다오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8.1%로, 전국평균(6.9%)보다 훨씬 높았다. 올해 목표치도 7.5%로 중국 정부의 목표치(6.5%~7.0%)를 웃돈다. 특히 지난해 1인당 GDP는 사상 처음으로 10만위안(약 1만5000달러)을 돌파했다.

칭다오가 중국경제의 성장둔화 압력에서 벗어나 안정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도시보다 앞선 경제구조 전환 노력 덕분이다. 동부연안 도시들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80년대 이후 칭다오는 저임 제조업에 의한 수출주도형 경제가 근간을 이뤘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7년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시장으로 수출이 급감하면서 노동집약 산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된 것. 특히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해 임금이 크게 오르면서 경영여건은 더욱 악화됐다.

이때부터 칭다오 시는 체질개선에 돌입한다. 원재료를 수입해 단순 가공한 뒤 다시 수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체 브랜드를 육성하고, 첨단기술 개발구를 조성해 기업들의 기술경쟁력 강화를 지원했다. 이와 함께 금융, 관광 등으로 성장의 중심축을 이동해 도시의 면모를 단기간에 바꿔 놓았다.

이에 따라 현재 첨단기술기업 인증을 받은 칭다오 소재 기업은 1000여 개로, 5년 전과 비교해 무려 200% 넘게 증가했다. 연구개발(R&D) 지출액은 시 전체 GDP의 3%에 육박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저임 제조업에 의존한 수출주도 경제가 칭다오를 지탱했다면 현재 칭다오는 금융·관광·교육 등 서비스 분야가 GDP의 절반을 넘어섰다. 시 정부는 GDP에서 서비스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을 5년 뒤 최대 7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의류, 액세서리 등 저임 제조업 공장의 동남아 이전을 금융 등의 분야에서 메우면서 지난 5년간 칭다오 시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는 260억달러를 기록, 시정부 예상치의 두 배에 달했다. 예부터 인재가 많이 나오고 우수한 대학이 많은 산둥성 특성을 살려 젊은 인재들에 대한 지원도 활발하다. 대학생 창업자금과 창업공간을 지원하고 있는 칭다오 시는 향후 5년간 대학생 50만 명의 창업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바다에 접한 칭다오는 미래 성장동력을 바다에서 찾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해양과학기술도시로 자리매김한다는 것. 칭다오에는 해양과학분야 연구소만 30여 개에 달하고, 중국내 유일한 종합해양대학인 중국해양대학도 칭다오에 위치해 있다. 향후 5년간 해양개발 프로젝트 예산만 1200억위안(약 21조원)에 달한다. 이를 통해 해양설비 분야에서 2020년까지 1000억위안의 매출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칭다오의 구조전환은 현재진행형

한중 경협의 거점으로서 칭다오의 구조전환은 현재진행형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칭다오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기업들의 대중투자가 가장 집중된 곳이 바로 칭다오였다. 산둥성의 풍부한 노동력과 항만물류를 배경으로 신발·봉재·액세서리 등 노동집약 산업이 대거 진출한 것. 중국에서 생산해 미국 유럽 등지로 수출하는 사업모델 덕분에 한국에선 퇴출위기에 내몰리던 업종이 부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2005년만 하더라도 한국기업들의 전체 중국투자 3분의 1이 칭다오에 몰릴 정도였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후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이 급감하면서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기업들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칭다오를 떠나는 한국기업들이 급증했다. 신발·봉재·피혁 분야 공장들이 대거 동남아로 옮기거나 아예 폐업을 택했다. 이 시기 유행한 게 한국기업들의 무단철수, 이른바 야반도주다. 파산절차를 밟지 않고 직원들의 퇴직금도 못 주고 무단철수한 한국기업은 2007~2008년 칭다오와 주변도시에서 200여 개에 달한다.

1990년대 칭다오 경제를 들썩이게 했던 ‘투자한류’는 이제 옛말이 됐다. 한때 연간 1000여 개에 육박하던 한국기업의 신규법인 설립건수는 지난해 200건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문앞의 이웃’과 같은 칭다오는 운명적으로 한중경협의 거점도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과거 저임 중소기업들의 투자기지였다면 앞으로는 한중 FTA시대 물류허브로, 일대일로 사업의 한중 관문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는 세 번씩이나 칭다오 낭아대에 올라 바다를 바라봤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해오라며 동남동녀 500명과 함께 한국, 일본에 보낸 서복이 출정한 곳도 낭아대다. 바다를 향하는 칭다오의 시선 끝에 한국이 있는 운명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0호 (2016년 0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