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청도 이야기

[스크랩] 이 아름다운 칭다오에,살며 생각하며..

주님의 착한 종 2016. 1. 6. 08:13

涛声依旧

(파도소리는 의구한데..)


带走一盏渔火,让他温暖我的双眼,

留下一段真情,让它停泊在枫桥边,


无助的我,已经疏远了那份情感,

许多年以后才发觉,又回到你面前; 

 
留连的钟声,还在敲打我的无眠,

尘封的日子,始终不会是一片云烟,


久违的你,一定保存着那张笑脸,

许多年以后,能不能接受彼此的改变? 

 
月落乌啼总是千年的风霜,

涛声依旧不见当初的夜晚,


今天的你我,怎样重复昨天的故事,

这一张旧船票,能否登上你的客船~~ 


 

상전벽해(桑田碧海)

딱 칭다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청도시의 작년(2014) 개인GDP가 약 $15,700입니다. 한중수교 당시(92년) 갓 $200이었는데 20여년만에 무려 80배나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뭍어 살다보니, 잘 느끼지 못했겠지만 경제성장과 더불어 삶의 환경과 질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시북구에 위치한 중산로를 빼면 건물다운 건물 하나 없이 빈곤하고 척박한 작은 어촌에 불과했는데,요즘 청도시 곳곳을 다니다 보면 해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발전되고 아름다운 도시가 세계 몇 군데 있을까 할 정도로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칭다오시의 총 인구 950만명 중 원주민은 현재 약 60만명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중 60세 이상 인구가 약 6할 정도 되는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유명한 제1해수욕장은 고사하고 저 외진 석노인 해수욕장에 조차 수영복 입고 해수욕을 한번도 안 해 봤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해변은 그저 배타고 고기 잡으러 갈 때만 나가는 그런 곳일 뿐 더도 덜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찌 그들만 그렇겠습니까. 청도 진출 25년 역사의 여기 사는 우리들도 객고에 정신없이 땅만 쳐다보며 걷는 바람에 혹 이 아름다운 칭다오를 잃어 버리지나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저는 청도 교민역사를 1989년부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89년에 투자기업 1호,2호가 등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97년 까지 칭다오 진출 교민은 제조업과 그 주재원 및 가족들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은 중국에 오래동안 머물 법적근거가 없었기에 90년 중후반 비자정책이 바뀔때까지 개인진출은 어려웠습니다.


초기 수백명이었던 89년부터 98년까지 약 9년간 칭다오 교민수는 약 1만5천~2만명 선 이었습니다.

1차 대규모 진출은 98년~02년까지 약 4년간으로  imf대란으로 개인상공인들이 대거 진출하여 갑자기 6만명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이제는 주재원과 그 가족보다 개인 상공인이 더 많은 역전현상이 일어났습니다.그러다 03년~05년까지 약 2년간은 또 카드대란 및 개인파산으로 물밀듯이 들어와 약 8만명이 되었습니다. 이때가 아마 최고점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시작된 세계공황은 여기 우리기업에게도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imf를 겪으면서 야반도주란 단어가 처음 나타났는데,몇 년 간 잠잠하다가 리먼사태 때부터 봇 물 터지듯 하루 건너 하나의 기업이 도주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아마 2010년이 피크였을겁니다. 서비스.요식업체들도 주 고객인 한국기업이 점차 사라져가니 단체회식이나 행사가 줄어 덩달아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교민수는 2015년 말 현재 제 주관적 판단으로는 이제 채 2만도 안 남았을것이라 생각됩니다.(영사관이나 단체에서 집계하는 것은 단 하루를 청도에 머물러도 보호해야 할 우리 교민이라 보고 있기에 피부지수보다 두배이상 차이가 나는 건 정상입니다.). 청도대학+해양대학 유학생 수는 1,200명까지 올라갔다가 지금은 합쳐서 약 400명 정도만 남았습니다.이제 20년전으로 되돌아 갔군요. 오랫동안 고생하며 칭다오를 이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발전시켜 놓고는 돈 벌어서 돌아 갔다는 기업이나 사람 아직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1년이던 10년이던 여기 이 칭다오에서 삶의 한 자락을 풍미했다거나 청춘을 묻었었다는 허허로운 추억만 남겼을 뿐...제 주위에도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기업들이 부지기 수 였습니다.


칭다오 시청이 있는 중심부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떨어져있는, 

현재 교민수가 제일 많다는 청양구는 2000년 초 만하더라도 볼품없이 황량한 동네였습니다. 저녁 늦게 청양으로 건너 가는 건 정말 큰 맘 먹지 않으면 단행하기 어려웠습니다. 변변한 주택이나 호텔.한국식당도 몇 개 없고 더구나 저녁 7시 이후엔 중국식당들도 거의 문을 닫아 자칫 쫄쫄 굶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로 구획은 바둑판으로 잘 정비되어있으나 다니는 차량도 없고, 가로등은 거의 사용하지 않기에 해만 떨어지면 온 동네가 컴컴한 곳이라 무섭고도 썰렁했습니다.


그러다가, 00년 초 한국의 악세사리 업체가 대거 몰려오는 바람에 청양도 점차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08년 한때는 약 1,200개 공예품 회사들이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공예품협회란 모임도 생겼는데 여러 단체중 제일 활동이 활발했던 단체였습니다. 당시 청양 아파트 임대료는 100평 기준 5천~1만위엔 정도로 청도시의 약 1/3 수준이었습니다.


08년 세계불황이 시작되자 지금까지 청도의 중심지역(시남구.노산구)를 거의 20여년의 긴 기간 동안 찬란하게 변화시킨 주역. 바로 우리 교민들이 본격적으로 청양구로 이사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말해 예전 선배들이 이 칭다오시에 했던 그대로 이제는 청양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팔을 걷어부쳤습니다. 청양 입구인 티엔타이 올림픽촌.와리촌.태양성.그리고 양푸자이 지역부터 시작해서 난탄.베이탄.후타오린까지 곳곳에 한국 요식업.서비스업 가게가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덩달아 거의 모든 중국 가게도 한글을 병기하지 않으면 장사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한인타운이 형성된 것입니다. 최소한 비자정책이 바뀔 때 까지만 말입니다..

아마 2012년 말 이였을겁니다. L.F비자로 요식업을 하는 외국인을 집중단속할 때가..

한동안 어느 곳에 단속원이 떴다하면 실시간으로 정보가 교류되어 서둘러 내부단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단속기관도 점차 암행잠입을 시도했는데, 통역 포함 두명이 한 조를 이루어 손님을 가장하고 슬그머니 작전을 짜는 겁니다. 그 작전에 걸려들어 인테리어 비용.임대료 비용 다 날리고 한숨을 쉬던 요식업이 여기저기 막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경기하강에 울고싶은 사람 뺨 때린 격이라 에라이 하는 마음으로 점차 현지 교포들에게 넘기기 시작했는데, 세월이 흘러 단속이 좀 느슨한 지금도 아직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지 경제상황도 예전과 다르게 만만치 않게 만들어져 있기도 하고..


교민 상대 서비스업에서 치명적인 요소는 뭐니뭐니해도 현지 기업의 어려움에 있습니다.

칭다오 교민사회는 태생적으로 주재원과 그 가솔들의 역사입니다. 비제조 업소들이 현지화를 위해 발버둥을 쳐도 대부분의 업소들은 아직까지 그 기본 매상은 교민들의 경제 상황에 달려있습니다. 듣기로 일주일간 기업체 회식을 두세팀 정도라도 받아야 현상유지라도 한다고 합니다. 요즘 칭다오에 진출해 있는 기업, 예전처럼 마음놓고 회식 자주 못합니다. 기업이 어려우니, 교민업소가 어렵게 되고, 그에 관련되는 모든 업종이 침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

저는 한 달에 네 번은 거의 빠지지 않고 고속도로를 타고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청양구로 넘어가서 밤이 새도록 이곳저곳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청양구는 앞으로 청도시의 중심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는 동네라, 몇 년 전 칭다오시 중심에서 건너 간 우리 이웃들의 삶이 궁금하기도 하고, 또 흘러가는 분위기도 좀 맛 보자고 말입니다.


결론은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힐링이 필요한 사람이 갈수록 더 많아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게 십 수년이 지난 지금의 코리아타운의 현실인지, 보면서도 잘 믿겨지지 않습니다. 교민생활의 하향평준화야 그렇다 치더라도, 미래의 꿈과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불법체류자.범죄도피자에다 아파트 여러채 얻어 갖고 별 이상한 사업을 하는 자. 더해서 불륜.사기.도박.이전투구 등 예전같은 청정지역일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불량 상품들이 백가쟁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저 청도시는 저렇게 너무나 아름답고,갈수록 발전해 가고 있는데,,,


예전에는 가끔씩 발생하는 교민사건이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있는 이웃들을 보호하는 것이 시급했습니다마는, 이제는 정상적인 해외생활과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을 오히려 분리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마저 듭니다. 돈은 청탁을 구분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예전처럼 명퇴금이 물 밀 듯이 몰려와 교민 경제를 살리던, 불법.사기.이전투구로 형성된 돈이 또 지금의 경제를 살리던 뭔 차이가 있겠냐마는 혹시나 이렇게 계속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면 그래서 과반 이상이 그 대열에 휩쓸려 간다면  예전의 그 가치있고 격조 있던 희망사회가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괜히 서글픈 마음이 듭니다. 앞으로 청도의 여러 민간단체,종교단체가 이 현상을 치유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그런 단체들이 집단 이기주의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올 해 초.

을미년 청양(靑羊)해를 맞아 대학교수가 뽑은 사자성어는 "정본청원(正本淸源)".

즉,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연말이 다가 오는 지금..

가만히 돌아보니,

아! 그 소망이 결국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이 되고 말았을까!!

다가 올 병신년(丙申年). 붉은 원숭이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볼랍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마을의 소망봉사회.오를레오합창단.수요호프모임.도우미산악회 등이 다행이도 우리 사회에 꿈과 희망을 주고 있으니생각만 해도 너무 귀하고 소중한거 있죠.


지금 듣는 저 노래,"濤聲依舊(파도소리는 의구한데~)"

송년회 때 함 부를까요?

이름 모르는 저 여성 가수가 아닌 오리지날 모닝(毛寧)의 창법으로..



회원이신 한원장님의 시집중에...


자연은..

(글:한상원)


어제의 바람을 동반한

폭우는 어디 갔는가


하늘은 맑아

서편 반달의

빛을 잃어 가는 모습 보이고

동편엔 구름들 다 쫒고

찬란한 빛을 뿜으며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해가 웃고 있으니 말일세


이보게

자연은 그런 거지

엎치락뒤치락

때로는 우리 삶도 그렇지만.

출처 : 칭다오 한국인 도우미 마을(칭도마)
글쓴이 : 스프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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