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세 여공으로 입사, 글로벌기업총재가 된 사연
▲ 세계 최대 에어컨 회사 'Gree' 총수 동밍주. Gree 홈페이지 화면 캡처
업계의 라이벌 하나가 그녀와의 경쟁에서 참패하자 울부짖었다.
“언니는 사람을 통째로 잡아먹고도 뼈 한 조각 뱉어내지 않을 여자야!”
그녀는 담담하게 답했다.
“상업상 전쟁이 무정할 뿐, 내 잘못이 아니야”
살기! 동밍주의 살기는 너무 무섭다. - 샤오미 총재, 레이쥔(雷軍)
알리바바나 샤오미와 같은 가상기업은 Gree같은 실체기업의 지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 알리바바 총재, 마윈(馬雲)
그녀의 몸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철근의 뼈와 철사의 핏줄만 있는 철의 낭자(鐵娘子)이다. -중국 네티즌 1
독선, 편집광녀, 여자돈키호테, 그녀가 지나간 길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 중국 네티즌 2
나는 단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영원히 옳다. -동밍주
남이 나를 모방할 수는 있어도 추월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동밍주
필자가 그녀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그녀가 중국을 대표하는 여성 기업가라는 이유만이 아니다.
중국의 여자 부호와 여성 기업가중 상당수는 기실 누구누구의 아내 또는 딸이다.
필자가 경악하며 주시한 대목은 ‘0’과 ‘무(無)’에 가까운 그녀의 출발점이다.
돈도 배경도 없고, 인맥도 관시도 없고, 젊음도 미모도 없고,
심지어 남편도 애인도 없는, 36세의 과부가 말단여공으로 출발하여
세계 최대 에어컨 회사의 총수가 될 수 있다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하나 없는 중년의 과부를 중국 대표 여성 기업가가 되도록,
아니, 그대로 놓아둔, 중국사회가 한편으로 부럽고 한편으로 두렵다.
36세 과부, 여공으로 새출발
동밍주(董明珠)는 1954년 8월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서
한 평범한 집안의 7형제 자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녀는 착해도 성깔 있는 아이였다.
매사에 주의 깊고 예의가 발랐지만 은근히 고집이 세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좋아했다.
그녀의 학교성적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교 졸업 때까지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우수했다.
그녀는 우등생답게 규칙을 잘 지켰지만
자기가 만든 규칙대로 다른 아이들을 통제하기를 즐겨했다.
혁명은 죄가 없고, 반역은 정당하다는,
‘혁명무죄 조반유리(革命無罪, 造反有理)’ 구호가 앙칼졌던 문화대혁명시대(1966~1976)에
사춘기 소녀시절을 보냈던 탓이었을까.
그녀는 가끔씩 부모와 교사에 말대꾸를 하거나 앙칼진 반항도 했다.
그녀는 매사를 정확하게 빠르게 계산하길 좋아했다.
특히 수에 관한 문제를 추리하고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수리능력이 탁월했다.
1973년 당시 전국평균 대학진학률이 1%도 채 안 되었던 시절에
그녀는 난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훼이성 우후시의
간부교육학원(3년제 단과대학)통계학과에 입학했다.
주더,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공산중국의 붉은 별들이 차례로 유성으로 사라지던 1976년,
대학문을 나온 그녀는 난징의 국영 화학공업연구소에 초급간부로 배치되었다.
1978년, 덩샤오핑이 3전3기에 성공하면서 중국의 키를 ‘우향우!’ 로 확 틀었다.
덩샤오핑은 1978년부터 2000년까지 기본 의식주를 해결하는 단계인 원바오(溫飽)사회를 이룩하고,
2020년까지 의식주가 해결된 중산층의 삶을 누리는 샤오캉(小康)사회를,
2050년까지 태평성태인 다퉁(大同)사회를 이루겠다는 3단계발전 목표를 제시했다.
일찍이 덩샤오핑을 단순한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그야말로 ‘자본주의로 향하여 질주하는 주자파(走資派)의 수괴’로
경계했던 마오쩌둥의 혜안은 참으로 경이롭다.
2015년 현재 강산을 네 번이나 바꾸는 세월의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어귀에서
중국은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이름의 중국식 자본주의로 줄곧 질주하고 있으니.
반만년 상인종(商人種), 중국민족성에 가장 맞지 않는
사회주의계획경제체제실험기간 30년 세월의 질곡에서 가위눌렸던 노대국이
덩샤오핑의 구령에 따라 ‘우향우(右向右)!’로 급선회한 1978년 말,
동밍주는 직장에서 추천해준 직장선배와 결혼했다.
그녀는 착실하고 과묵한 남편과 ‘원바오’ 단계를 단숨에 건너뛰어
의식주가 해결된 ‘샤오캉’의 신혼생활에 만족했다.
아들을 낳고부터 엄마들과 육아 수다도 떠는 등 중국의 중산층 엄마로서 살림하는 재미를 느꼈다.
1984년 어느 날 남편이 돌연 세상을 떠났다.
서른 살 그녀의 ‘샤오캉’ 은 끝났다. 외벌이 월급만으로는 ‘원바오’조차도 힘들어졌다.
당장 남쪽의 경제특구도시로 내려가서 돈을 벌고 싶었으나
두 살 자리 아들이 눈에 밟혀 떠날 수 없었다.
동밍주는 남편과 사별한 지 6년째 되던 1990년, 14년간 몸담았던 난징의 국유기업을 사직했다.
여덟 살 초등 2학년 아들을 시부모에 맡기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36세 중년 과부의 첫 행선지는 ‘경제특구1번지’, 광둥의 선전이었다.
국영기업 재직 경력은 취직과 직장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아주 수월하게 한 화학공장의 생산직 평사원, 즉 여공으로 취직했다.
난징의 국영기업 초급간부시절 월급의 두 배가 넘는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그녀는 선전에서 월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사실을 좀 더 일찍이 알았더라면
진즉 남하했을 것이라는 즐거운 후회도 했다.
그러나 동밍주는 선전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선전의 전반적인 도시 분위기가 인접한
홍콩의 번화한 겉모습만 따라하는 것이 싫어졌다.
선전에 만연한 배금주의 풍조, 횡행하는 지하경제, 열악한 치안상태가 거슬렸다.
선전은 유들유들한 성격에 잔머리에 능한 자들이 돈 벌기에는 좋으나
자기처럼 강직하고 원칙주의인 사람에게는 적응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굳어져갔다.
동밍주는 마카오에 인접한 ‘경제특구 2번지 도시, 주하이(朱海)’에 출장을 나갔다가
선전에 비해 한적한 편이지만 질서정연한 도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선전으로 돌아 온 다음날, 그녀는 신문 광고란에서 주하이의 하이리(海利, 格力(필자주1)의 전신)라는
가전제품 제조회사가 18세 이상 36세 이하의 여공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는
즉시 입사지원서를 내었다.
당시 하이리는 연간생산량 2만대도 못 미치는 중소규모의 국영 에어컨부품 조립공장이었다.
여공들의 잦은 이직으로 일손이 딸렸던 회사는 그녀에게 입사합격통지서를 보냈다.
영업의 여신, 마케팅의 동천무후인가, 편집광녀인가
동밍주는 신입여공 중 최고령자였다.
회사는 그녀의 연령과 경력을 감안하여 생산부서의 여공이 아닌,
영업부서의 말단판매사원으로 배치했다.
회사는 그녀에게 판매와 영업의 개념조차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물건을 많이 팔기만 하면 좋고, 미수금을 받아오면 더 좋다고만 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배당받은 지역은 빌린 돈 떼먹고, 배째라식 배짱부리기로 악명 높아
‘통뼈’로 불리는 안후이(安輝)였다.
어느 날 저녁 영업부장은 동밍주를 안후이 중심도시 허페이(合肥)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태웠다.
그녀가 회사로부터 받은 것은 편도열차표 한 장과 목적지에 도착하면 개봉하라는
편지봉투 한 통이 전부였다.
열차에서 파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먹거리와 또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는 승객들의 몰골에
비위가 상한 그녀는 이틀 낮 밤을 꼬박 굶었다.
허페이역에 도착하자마자 허기부터 때우려고 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녀는 음식을 시켜놓고 기다리는 차에 편지봉투 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하여 개봉하여 보았다.
편지지를 반으로 찢은 쪽지 한 장이 나왔다.
쪽지에는 “N사장에게서 기한초과한지 5년이 다 되도록 받지 못한 미수금 42만 위안을 받아 오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회수불능 미수금이나 다름없는 돈을 받아 오라는 ‘미션 임파서블 불량채권추심’ 지령문이었다.
밥맛도 일할 맛도 싹 달아났다.
선전에서 주하이로 직장을 옮긴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녀의 첫 상대, N사장은 참으로 다루기 곤란한 악질채무자였다.
지난 5년 동안 같은 임무가 주어졌던 사원들을 매번 ‘돌아온 꿀 먹은 벙어리’ 또는 함흥차사 아닌,
‘허페이 차사’로 만들어 버린, 통뼈도 보통 통뼈가 아닌 ‘용가리 통뼈’ 였다.
예상대로 N사장에게 문전박대를 당하자 계획대로 동밍주는 문전대치로 버텼다.
다음날 오후 사장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잽싸게 안으로 들어섰다.
툭 튀어나온 배에 번질번질한 개기름이 흐르는 낯가죽을 걸친 한 중년남자가
소파에 45도 각도로 누어있듯 앉아있었다.
N사장이었다. 동밍주는 시궁창 악취의 몇 십 배나 되는 악취가 역겨워 코를 틀어막았다.
N사장은 그녀를 힐끔 보고는 입꼬리가 처진 얇은 입술 사이로 느글느글한 목소리를 게워내었다.
“이렇게 자꾸 보채면 곤란하다. 돈 생기면 갚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안후이 성장이 내 형님이고 허페이 시장이 내 동생이다.
너희 구멍가게보다 못한 회사 사장놈에게 전해라,
상황파악이나 제대로 하고 장사를 하라고 해라. 그리고 어이, 아줌마,
낫살이나 먹어 궂은 일 하느라 고생이 많은데.
아줌마의 얼굴이 이 몸이 한때 데리고 놀던 어떤 여자와 많이 닮아서 그런지, 마음이 짠해진다.
얼마 안 되지만 아줌마 회사 월급보다는 많은 돈을 줄 테니,
옷을 사 입든 아이 과자를 사주든 생활비에 보태 쓰라.”
동밍주는 순간 노기가 비등점을 뚫고 탱천함을 느꼈다.
그러나 치 떨리는 분노를 이내 차가운 용기, 인내로 치환했다.
그리고는 한 번 물면 목이 잘려도 놓지 않는 한 마리 악어가 되었다.
그녀는 예리한 이성의 이빨로 멧돼지의 몸과 독사의 혓바닥을 가진 악질채무자의 후안무치를
갈기갈기 찢어 ‘일말의 양심’을 발라내려고 했다.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 앞에 부끄러움을 느껴 무릎을 꿇게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N사장은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멧돼지의 몸과 독사의 혓바닥을 가진 괴물이었다.
드라이아이스처럼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편집광녀’의 집요한 공세에
‘어라, 이것 봐라. 이 여자 여간 아닌데.’ 움찔했지만 멧돼지처럼 맷집좋게 버텼다.
오히려 그녀에게 온갖 협박과 모욕, 희롱과 회유를 가하면서 독사의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톱으로 박을 켜는 듯 지구전이 40일 째를 맞던 날 아침,
동밍주는 가방에서 금박지로 예쁘게 포장한 물건을 꺼내 N사장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 오늘 밤 열차편으로 주하이로 돌아가겠다.
그동안 많이 배웠다. 이건 조그만 성의표시인데 웃으며 받아라.”
N사장은 “잘 생각했다. 진즉에 이럴 것이지” 구시렁거리며
선물포장을 뜯었다. 카세트테이프 한 개가 드러났다.
“어, 이게 뭐지?”
동밍주는 목소리를 낮게 깔아 말했다.
“여기에는 귀하가 지난 40일 동안 내게 가한 협박과 공갈, 사기와 모욕, 뇌물공여, 살인 및 자살교사,
마약과 밀수, 방화와 유괴, 조직폭력 등 온갖 범행과 관련된 어록 중 알짜만 담겨있다.
형법을 따로 볼 필요가 없을 만큼 거의 모든 범죄유형이 총망라되어 있는 진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것과 함께 카세트테이프 12개 전질선물세트 수십 개를 공안당국은 물론
귀하의 형님 아우라는 성장과 시장뿐만 아니라 장쩌민 총서기를 비롯한 7명의 정치국상무위원 전원에게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어떠한지?”
그녀는 도표가 인쇄된 A4 용지를 한 장 펼치며 상대방의 낯가죽에 파르르 이는 경련의 번개자국을 주시하면서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어갔다.
“이것은 선물 보낼 대상자 리스트인데 혹시 귀하께서 빠뜨리면 섭섭하다고 생각할 인사가 있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가필해 달라, 아 참, 선물세트들은 이미 여러 곳, 여러 사람들에게 맡겨놓았다. 만일 3시간이 넘도록 나의 소식이 끊긴다면 즉시 일괄발송될 것이다.”
N사장은 “설마?, 아니다. 이건 분명 엄포가 아니다, 저 여자는 저러고도 남을 여자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무릎과 머리를 땅바닥에 찧고 또 찧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편집광녀’’에게 10% 지연이자 4만 2000 위안을 합친 46만 2000 위안을 바쳤다.
이 ‘미션 임파서블’을 ‘미션 파서블’로 바꾼 쾌거는 오늘날 중국의 경제계,
특히 마케팅업계와 채권추심업계의 불멸의 신화로 살아 있다.
악질채무자의 용가리통뼈를 발라내버린 동밍주는 자신감이 붙었다.
우후, 통링, 안칭 등 안후이 남부지역, 후이난(徽南)지역을 싹쓸이 하듯 훑어내려 갔다.
후이난은 송나라 성리학의 비조, 주자와 그 후학들의 족적이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유학자 시늉을 하며 살아온 얼치기 상인들의 무리, 유상(儒商(필자주2))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동밍주는 안후이에서 2년째 주둔하면서 매출액 1600만 위안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일개 영업사원의 매출액이 회사전체의 총매출액 8분의 1을 돌파하는 ‘안후이 대첩’이었다.
평범한 외모, 중년의 과부 외판원 동밍주는 일약 판매의 여황, 영업의 여신,
‘동천무후’(필자주3)로 등극, 중국 천하에 위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빛이 환하면 그림자도 짙은 것인가. 명성이 자자해지는 그만큼 악명도 자자해졌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녀, 집념 집요 집착의 끝판왕 편집광녀, 독선 독종 독신의 3독녀(三毒女),
과부 돈키호테, 공주병과 황후병 합병증 환자......”
동밍주에 대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평 중 비교적 정갈한(?) 악평이 필자의 눈길을 끈다.
“그녀에게서 피와 눈물을 기대하지 말라, 그녀는 철근의 뼈와 철사의 핏줄로 이루어진 철의 여인이다.”
거절하기 어려운 어떤 유혹.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1992년 가을, 회사명을 하이리에서 ‘Gree(格利)’로 바꾼 회사는 휘황한 ‘안후이 대첩’을 거둔 동밍주에게
그녀의 고향 난징으로의 진군을 명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철근의 뼈와 철사의 핏줄로 이루어진 금속성 여인,
그녀는 오로지 피로써 사랑하고 눈물로써 그리운 아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난징은 동밍주 개인에게는 홈그라운드였지만 Gree 회사에게는 어웨이 그라운드라고도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춘란(春蘭), 훼이펑(匯豊) 등을 비롯한 내로라할 유명 가전업체들이
난징의 가전제품시장을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춘란’ 에어컨은 당시 현직 국가주석 장쩌민과 부주석 후진타오의 고향인 장쑤성 양저우(楊洲)와
타이저우(泰州)에 각각 본사와 공장을 둔, 양덕과 음덕을 겸비한 중국 가전업체 서열 1위 기업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난징에서 동밍주는 1992년 한겨울 비수기에 200만 위안 상당의 Gree제품 주문서를 받아내었다.
1993년 한 해 동안 그녀 개인이 거둔 1억 6천만 위안의 판매실적은 Gree 회사 총매출액의 4분의 1을 넘는,
거짓말 같은 희대의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고향 난징의 소비자들은 듣도 보도 못한 Gree브랜드 에어컨을 산 것이 아니다.
난징의 자랑스러운 딸, 동밍주 이름 석 자를 샀던 것이다.
그들은 돈도 남편도 관시도 없이 아등바등 고군분투하는 한 동향 중년 과부의 삶에
자신들을 투영하면서 위안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눈물 나게 안쓰러운 동밍주가 사라는 제품을 사는 동시에 자기위안과 자기격려를 샀던 것이다.
그러나 1994년 여름, 동밍주와 Gree에 큰 위기가 닥쳤다.
참다못한 호랑이 ‘춘란’이 주제넘게 까부는 하룻강아지 Gree 난징 총판 사원을
집단으로 빼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밍주는 24명의 배신자들이 연명으로 낸 집단사직서를 받고서
멍하니 정신을 잃고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망연자실한 그녀에게도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그녀를 춘란의 난징 지사장으로 영입하여 거액의 연봉으로 우대하겠다는 제의였다.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제의였다.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머무름과 떠남’, 양자택일의 갈등으로 동밍주는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뇌의 즙을 짜내듯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날이 새기 시작하는 첫새벽, 그녀는 결단했다. 떠나기로 했다.
놀랍게도 그녀가 떠나기로 한 것은 ‘회사’가 아니라 ‘지역’이었다.
난징을 떠나 Gree 본사가 있는 주하이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주장홍(朱江洪)총재 겸 회장에게 자신을 주하이 본사로 소환하는
복귀명령처분을 내려줄 것을 자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후일 한 공개석상에서 어떤 사람이 그녀가 그때 왜 그런 ‘어리석은 의외의 선택’을 했는가? 라고 물었다.
그녀는 ‘어리석은 의외의 선택’ 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반박하며
선택의 세 가지 이유를 털어놓았다.
첫째, 자신을 믿고 맡겨준 Gree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었다.
둘째, 대기업 춘란의 횡포에 대한 저항감, 고향의 강자보다 타향의 약자 편에 서고 싶었다.
셋째, 집단사퇴를 막지 못한 데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Gree 수뇌부는 동밍주를 주하이 본사로 불러들여 인사와 총무를 관장하는 경영부 부장으로 임명했다.
직위는 수직 상승했지만 보수는 10분의 1로 수직 낙하했다.
난징에서 일선 영업사원으로서 그녀가 받은 연봉은 장려수당을 포함, 100만 위안을 넘었지만,
본사 영업부장의 연봉은 10만 위안도 채 안되었다.
황금시대에서 다이아몬드시대로
동밍주의 진가는 야전에서 내근으로 돌아온 1994년 가을부터 발휘되었다.
영업여왕의 황금시대를 건너 중국대표 여성기업가의 다이아몬드시대로 진입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매니지먼트 시스템 디자이너’로 설정,
Gree의 틀과 룰을 바꾸는 제도개혁가로 변신했다.
그녀가 맡은 경영부는 회사의 인사와 조직을 관장하는 중추부서임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없었다.
그저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서 수다를 떨면서 서류만 뒤적이다가
월급만 축내는 잉여사원들의 집합소였다.
어려서부터 규칙을 만들기를 좋아했고 또 그 규칙대로 자기와 다른 아이들을 다스리길 즐겨했던 그녀는
조직발전을 위해 참신하고 효과적인 시스템과 룰을 창안해내는 일에 골몰했다.
우선 간단한 사무실 근무수칙을 제정 공포했다.
무단결근, 무단 지각·조퇴와 무단 이석을 엄금하고
근무시간에 사무실 내에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여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벌금을 부과하고
3회 이상 위반할 경우 해고 등 인사조치한다고 규정했다.
어느 날 한 여자 팀장이 퇴근 몇 분 전에 팀원들과 음식을 먹다가 동밍주에게 발각되었다.
여자 팀장에게는 100위안, 기타 팀원들에게는 50위안의 벌금을 부과했다.
직원들은 동밍주에게 그 여자 팀장의 가정형편이 아주 어려운데다가
월급의 5분의 1에 달하는 벌금 100위안이 너무 가혹하다며 조금만 깎아달라고 읍소했다.
사장까지도 나서서 관대한 처분을 당부했다.
그러나 동밍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규정대로 집행했다.
며칠 후 그녀는 남몰래 자신의 사비에서 100위안을 꺼내 여자 팀장에게 쥐어주었다.
그 후 사무실 근무수칙은 공장 작업장, 직판장까지 확대 적용되어
현재는 전세계 Gree의 모든 부서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엄수하여야 할
근무 준칙의 하나로 시행되고 있다.
동밍주는 기업과 사회, 국가의 모든 규칙과 제도는 흑이면 흑, 백이면 백, 흑백이 분명하여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엉거주춤한 회색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며 한 가지 실례를 들었다.
“몇 해 전 상하이에서 교통사고에 관련한 조례를 제정하여 시행한 적이 있다.
만일 행인이 교통신호를 어기고 교통사고가 발생할 경우 운전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조례가 시행된지 얼마 못되어 한 택시기사가 신호등을 무시하고 횡단하던 고등학교 교사를
치어 죽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법원은 택시기사가 책임을 지도록 판결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조령모개의 전형이다.
한번 제정한 제도는 제도 그대로 집행하여야 한다.
그래야 제도가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있다.”
동밍주는 전통적인 매출액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판로개척 및 시장조사연구, 가격감독의 업무량을 종합평가했다.
영업부서의 인원을 대폭 감축하여 정예화했다.
23명의 Gree 영업사원이 라이벌 회사의 영업사원의 1000명과 맞먹는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절대 관시로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
“물이 맑아야 물고기가 산다.” 동밍주가 항상 하는 말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고?,
물이 너무 맑다고 안모이는 물고기는 물고기가 아니다. 벌레들이다.”
그녀의 세계는 모든 게 투명하여야 한다.
한 점의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Gree의 도처에는 “뇌물을 주거나 받은 자는 반드시 해고하고 죄질이 엄중한 자는 형사고발한다” 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Gree의 현대화 공장 작업장이나 사무실에도, 식당과 복도에도
‘공평, 공정, 공개’의 붉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 여섯 글자는 마치 절집에 들어서는 순간 만나게 되는
사천왕상의 그 섬뜩한 모습처럼 마음을 으스스하게 만든다.
부장급 이상의 집무실에는 ‘공평공정, 공개투명, 공사분명’ 12자 방침의 액자가 걸려있다.
Gree의 모든 임직원들은 동밍주를 경외한다.
그러나 누구나 그녀의 충실한 심복이 되길 원한다.
‘명령만 내려주소서’
카리스마적 리더쉽은 그녀의 솔선수범과 공정무사의 업무태도에서 나온다.
Gree를 한 번 떠난 자는 두 번 다시 Gree로 돌아올 수 없다.
동종 업종의 임직원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스카우트하지 않는다.
다른 기업이 배양한 인재를 빼오는 행위는 기업윤리에 반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동밍주는 원칙 앞에는 일가친척 부모형제는 물론 친생혈육에게도 예외가 없다.
한번은 중개판매상 하나가 그녀의 친오빠에게 접근하여 Gree와의 3000만 위안 상당의
물량 공급을 성사시켜주면 2%의 커미션을 주겠다며 꼬셨다.
친오빠는 동밍주에게 선처를 부탁했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동밍주는 그 중개판매상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친오빠와의 왕래도 거의 끊어버렸다.
동밍주는 자기 아들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아들을 Gree 요직에 발탁할 수 있는 지위와 능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관리 범위내에 출현하길 원치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아들은 완전히 자기의 힘으로 창업했다.
다른 모든 나비들이 살기 위해 꽃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동안,
그녀는 반딧불이 되어 그 빛으로 자신과 기업의 길을 밝히려고 했다.
동밍주는 주색향응으로 판매망을 넓히려 하지 않았다.
‘음주량’을 ‘판매량’으로 치환하려 하지 않았다.
성심성의로 판매망을 넓히려 했다.
‘심혈의 량’을 ‘판매량’으로 치환하려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가?
동밍주는 중앙TV의 '수석야담'(首席夜談) 프로그램에 나와 이렇게 잘라 말았다.
“절대 관시로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
현재 8만 여명의 종업원, 시가총액 1천억 위안의 글로벌대기업 총수 동밍주는
대부분 인사들을 ‘구내식당’에 초대한다.
Gree는 매년 접대활동비조로 500만 위안을 초과하지 않는다.
동밍주는 외부 출장에 비서를 대동하지 않는다.
한해 평균 6개월은 외부에서 활동하는데 불필요하게 수행비서들을 대동하여 항
공료와 숙박비, 식대 등 몇 십만 위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상업의 강호에서 20여년 떠돌아다니며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을 안했기 때문에
홀로 먹고 홀로 자고 홀로 입고 홀로 움직이는 생활이 습관이 되었다.
관시는 ‘빽’ 이 아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관시’에 대해 한마디 더 하고자 한다.
적잖은 우리 기업들은 아직도 중국이 관시를 절대시하는 나라라고 지레짐작하고,
인맥형성에만 주력하면서 공식화된 투자환경인 중국의 법률과 법규, 정책의 파악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오류와 잘못된 태도는 중국진출실패의 근본요인이 되어왔다.
‘관시란 무엇인가?’ 관시의 개념부터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관시는 한자 그대로 관계(關係)다.
하지만 관시와 관계가 있는 뜻과 쓰임새, 사회적 메커니즘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관시는 우리말 가운데 문화적인 뜻을 함축하는 ‘인맥’에 더욱 가깝다.
영어의 릴레이션십(relationship)은 영미식 개인주의가 물씬 풍기는 단어로 ‘관시’와는 다른 의미이다.
관시가 인맥이나 릴레이션십과 비교하여 가장 다른 점은 의무의 특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일단 관시가 형성되면 상대방은 언제든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
상대방이 자신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공통인식이 형성된다.
만일 관시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에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때 이를 거절한다면
상대방은 관시가 파괴되었다고 여긴다.
의무보다는 도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인맥’이나 그런 것이 아예 없는 ‘릴레이션십’은 이런 점에서 다르다.
연못에 돈을 던지면 원을 그리며 퍼지는 동심원처럼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된다는 것도 관시의 특징 중 하나다.
관시는 상호간의 통로나 연결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개인과 개인, 회사와 회사 등의 관계로 해석되기 때문에
단순히 뇌물 같은 의미가 아닌 서로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의 의미가 강하다.
즉,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갖는다.
또한 중국의 관시는 우리나라의 ‘빽’과도 차이가 있다.
우리의 ‘빽’은 높은 사람의 권력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오는 형태인 반면에
관시는 실무담당자를 통한 직접해결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중국에서는 한국식의 ‘빽’은 잘 통하질 않는다.
고위층에게 가라오케에서 술을 몇 번 사고 뇌물(또는 선물)을 주었다고 해서 관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국에서 한국식의 빽을 쓰다가 호되게 망신만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관시는 주로 개인대 개인 사이에 형성되지만 조직 대 조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한 조직이 다른 조직에게 큰 도움과 신뢰를 주며 관시를 구축하면 그 조직은 대부분 반대급부를 얻을 수 있다.
한국의 빽과 달리 중국에서 좋은 관시를 맺는데 주력하여야할 대상은
간혹 회장이나 사장 등 직함상 최상급자가 아니라 부(副)자가 달린 실세
(최고권력자 덩샤오핑의 최고직위는 부총리였음을 기억할 것)이거나 현장실무자인 경우가 있다.
그리고 공조직 사조직 막론하고 거의 모든 중국의 조직은 1인 단독결정제가 아니라
복수의 집단이 결정하는 집단지도체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한 놈만 팬다”는 특정1인에게만 외골수로 접근하는 방식이라면 바람직한 관시를 형성하기 어렵다.
▲ ⓒ강효백
외국인으로서 사업이나 또는 개인적인 일을 볼때 관시의 위력을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다.
관시를 오랫동안 유지하면 ‘라오펑요우(老朋友: 오랜친구)의 단계에 이를 수가 있는데
이 정도면 관시의 구축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라오펑요우는 관시의 꽃 한 가운데 꽃술과도 같다.
라오펑요우는 오랜 친구라는 일반적인 개념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애 이상의 믿을 수 있는 친구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고충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인 것이다.
라오펑요우의 꽃술 주변에는 또 다른 라오펑요우가 있기에 서로서로 아름다운 힘을 사방으로 뻗친다.
그런데 아직도 중국에 진출한 많은 기업들이 관시 없인 중국 진출이 힘들다고 한다.
심지어 얼마 전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중국의 관시를 기업의 경영수단으로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중국법서적조차도 중국에서는 법제보다 관시가 더 중요하다는,
쌍8년도(단기4288년, 서기1955년)식 기막힌 구절이 적혀있다.
아직도 중국 사업시 관시는 절대적으로 중요할까. 과연 그럴까?
답은 과거엔 그러했지만 현재에는 그렇지 않다.
관시는 적어도 개혁개방 초기 중국에서 사업을 잘하는 것은 관시를 어떻게 만들어가고
또는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21세기 중국에서 관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법제와 국가정책, 다음에 오는 3순위정도로,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인식의 오류 3대 키워드: ‘사회주의’ , ‘관시’, ‘아직’
필자는 중국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범하게 하는 키워드 3개만 든다면
‘사회주의’, ‘관시’, ‘아직’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오래가는 중국의 잔상(殘像)과 그 잔상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중국의 실상을 단 한 줄로 축약하자면 이렇다.
잔상: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서 사업에는 ‘관시'가 중요하고 ‘아직’ 우리보다 뒤졌다.
실상: 중국은 ‘자본주의 개발독재국’으로서 사업에는 ‘법제’가 중요하며 ‘이미’ 우리보다 앞섰다.
이 대목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심지어 일종의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몇 마디 반문하고자 한다.
중국이 아직도 평균과 배분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사업에는 ‘관시’가 제일 중요하다면
어떻게 미국과 함께 G2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
8만 명의 억만장자와 121만명의 천만장자가 어떻게 나올 수 있겠는가?
중국이 원대하면서 정교한 법률과 법령, 제도인프라 구축없이
공산당 일당독재의 인치와 관시로 움직여왔다면 어떻게 대외무역액, 외환보유고, 외자유치액,
세계1위의 3관왕을 차지할 수 있고, 세계 500대기업 중 106개가 중국기업이 차지할 수 있겠는가?
조그만 구멍가게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름의 시스템과 룰에 의해 운영하여야 할진데
하물며 13억 거대중국의 정부와 기업이 법제보다 관시를 중시하여왔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오늘의 부강한 중국은커녕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지 이미 오래거나,
동북아의 IS(이슬람국가)나 다름없는 북한 짝이 났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
강호제현의 고견은?
1위 법제, 2위 정책, 3위 관시
21세기 중국 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시하고 주력하여야 할 역점사항의 우선순위는
1위 법제, 2위 국가정책, 3위 관시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법치사회는 거리가 먼, 인치와 관시가 지배하는 사회주의국가로 알고 있으나
이는 오래된 잔상(殘像)이거나 위험한 착각이다.
21세기 중국질주의 비결은 구호나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정책을 구체적으로 법제화하여 강력히 실행하는데 있다.
G2시대 중국은 인치와 관시의 나라에서 법과 제도에 의한 의법치국(依法治國)의 국가에로의
전환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과거 최고지도층이 이공계 출신 일색이었던 것과는 달리, 현 중국 최고수뇌부는 시진핑 주석,
리커창 총리, 리웬차오 부주석, 리우엔둥(여) 부총리 등 모두
법학도, 법학박사라는 메가트렌드의 변화에 주목하여야 한다.
중국사업에서 법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관시가 아니라 국가정책이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국가정책은 불문법의 일종이다.
관습법과 조리를 불문법을 우리와는 달리, 중국은 법률의 규정이 없는 경우
국가정책을 준수하여야 한다 라고 [민법통칙]에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중국의 정책동향에 주의를 기울이고 정책변화에 영민하게 대응하여야 한다.
돈도 배경도 없고, 인맥도 관시도 없고, 젊음도 미모도 없고,
심지어 남편도 애인도 없는, 36세의 과부 동밍주가 말단여공으로 출발하여
세계 최대 에어컨 회사의 총수가 될 수 있었던 성공제1비결은
“절대 관시로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며 관시를 철저히 배제하고 법과 국가정책에 따라
자신과 회사를 관리하고 경영했기 때문이다.
즉 동밍주가 오늘날 중국의 대표적 여성기업가가 된 최대 비결은
관시 대신 법제와 국가정책을 누구보다 면밀히 파악, 준수하였을 뿐 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과 회사의 경쟁력강화와 경영전략전술핵무기로서의 효용성을 극대화 시키면서
능란하게 운용했기 때문이다.
1)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를 빗댄 별명.
2) 후이난은 안후이의 남부지역을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주자학(성리학)의 전통이 가장 뿌리박힌 곳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주자학이 중국천하를 군림한 시절은 송나라 때뿐이었고,
송나라 이후 주자학의 직할 지역은 후이난 주변지역으로 국한되었다.
안후이상인은 상업을 벼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거나 진득이 대를 이어 장사하지 않았다.
인생의 초중반에 부자가 되면 후반부터는 관리가 되려고 노력했다.
이웃한 저장이나 장쑤 상인처럼 상업만을 인생의 유일한 생업으로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번 돈으로 관직을 사든지 의연금이나 기부금을 많이 바쳐 조정의 환심을 사는데 몰두했다.
앞서의 중국최초의 벼락부자, 넨광지우도 안후이출신이다.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안후이상인의 부유와 낙후한 안후이의 오늘의 몰골을 목도하면서
나는 아시아적 가치와 더불어 한때 유행했던 용어인
‘신유교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감지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의 기반이 공자의 원형이 아닌 주자의 변형이라면 감히 단언하겠다.
신유교주의의 미래는 없다고.
강효백, 「중국인의 상술」, ‘주자님의 방귀는 향기로운가 안후이상인’ 한길사, 2002. pp.101-114 참조.
3)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를 빗댄 별명.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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