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특파원 칼럼] '평민 총리'의 수난

주님의 착한 종 2011. 9. 6. 11:06

 

지난 7월 말 원저우(溫州) 고속철 추돌사고 당시에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5일이나 늦게 현장에 나타난 일이 요즘 베이징 정가의 화제다. 대형사고 때마다 맨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작업을 지휘하던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원 총리가 방문이 늦어진 이유로 "11일이나 병상에 있었다"고 둘러댄 것이 더 엉뚱했다. 중국 관영매체는 그가 병상에 있었다는 기간에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우리의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국무원 상무회의에 참석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뻔한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정가 소식통 사이에서는 원 총리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의 갈등으로 칭병을 하며 태업했다는 그럴듯한 분석이 나온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명백한 인재(人災)였던 만큼 그가 현장에 가기를 꺼렸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어떻든 그는 이번 일로 '평민 총리'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오점을 남겼다.

원 총리의 수난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그의 정치개혁 발언은 해외에서는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대답없는 메아리였다. 당 기관지들은 대놓고 그를 '어설픈 자유주의자'로 맹공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홍콩에서 '연기의 천재 원자바오'라는 책이 나와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총서기 비서실장)으로 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를 모셨던 원 총리가 두 사람의 실각 뒤에도 승승장구한 이면에 화려한 줄타기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그의 '친민(親民)' 행보마저 가식에 불과하다고 이 책은 몰아붙였다.

지난 2003년 취임 이후 원 총리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경제는 전임인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가 만들어놓은 기반 위에서 연 12~13%의 고도성장을 이어갔다. 그 자신도 벽지 산골마을에서 탄광 지하갱도까지 현장을 뛰며 민생을 챙겼다. 현장시찰 때 10년 이상 된 낡은 점퍼를 입고 해진 운동화를 신은 사실이 알려져 중국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2008년 쓰촨대지진 당시에는 사고 발생 2시간여 만에 현장에 도착해 구조작업을 진두지휘하고, 가족을 잃은 이재민을 눈물로 위로해 깊은 인상을 심었다.

그랬던 원 총리가 임기 말에 잇달아 수모를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원 총리식 이미지 정치의 한계를 꼽는다. 그가 재임한 지난 9년은 고도성장으로 인해 각 계층의 욕구가 분출하고, 사회적 갈등이 격화된 시기였다. 이 시기 총리의 가장 큰 과제는 집과 의료·교육 같은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토대를 마련해 갈등의 여지를 최대한 줄이는 일이었다. 그런데 원 총리는 서민들의 손을 부여잡고 하소연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중국 지식인들이 그를 "한 일이 없는 무능한 총리"라고 비판하는 것이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내년 권력교체기를 앞두고 최근 '일 잘하는 총리'에 대한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어떤 총리가 들어서느냐에 중국의 향후 10년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이런 여론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가 내년 중국 정치 관전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