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 : 3ㆍ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조직적 항거를 통한 조국의 광복을 목적으로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자주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실제 임시정부청사는 상하이(1919)를 비롯해 항저우(杭州, 1932), 전장(镇江, 1935), 창사(长沙, 1937), 광저우(广州, 1938), 치장(綦江,1939), 충칭(重庆, 1940) 등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했다.
◆ 간민회 : 간민회는 1913년 1월에 조직된 북간도지역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주요 간부로는 김약연•김영학•정재면 등을 들 수 있다. 본부는 연길 도태道台가 있는 국자가에 위치해 있었다. 이 단체는 민국법이 허가하는 범위 내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단체로서 인정 받았다. 특히 재만동포들의 자치기관으로서 그 일익을 담당하였다. 지방조직은 한인밀집거주지에는 지방총회를 두고 그 밑에 다시 지회를 두었다. 간민회는 3•1운동이후 대한국민회 등 북간도 지역 주요 독립운동단체의 근간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가 패망한 후 중국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이들의 귀환을 위해 1945년 11월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주화대표단을 설치하였다. 주화대표단은 남경에 본부를 두었고, 톈진, 칭다오 등 중국 각지에 모두 8개의 분단을 설치하였다.
손문孫文이 광동정부를 수립한 후 국민혁명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군관학교로, 1924년 1월 장개석蔣介石을 교장으로 임명하여 개교하였다. 황포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이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4년 12월 한인청년 4명이 제3기생으로 입교한 이래, 중국 각지에 설립된 분교에도 많은 한인청년들이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여기서 군사훈련을 받은 한인청년들은 졸업 후 중국군에 복무한 경우도 있었고, 상당수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중국은 대한민국 국가 탄생의 요람이었다" 대륙의 위성지도를 펼쳐놓고 특정 위치에 역사 자료를 담아내면서 크게 세 가지 점에서 놀랬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선조들이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전 대륙을 누볐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국은 나라 잃은 조선인의 근대 국가 성립과 반제 운동에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해서 대륙과 반도는 화학적 연대를 실현했다는 것이다.
중국 전 국토를 횡단하게 된다. 북으로는 헤이룽장성에서 남으로는 광둥성, 윈난성까지 서쪽으로는 산시성 첩첩 산중에 까지 선조들의 영혼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중국에서 생활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중국 대륙에 뿌린 애국 선열들의 피의 의미에 진지했던 적이 없었다. 같은 땅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생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펼쳐진 것으로 인식됐던 것 같다. 한 공간에서 다른 시간대를 산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의 국부 손문이 세운 중산대학이 황포군관학교와 함께 광저우지역 한국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며 많은 운동가를 배출한 곳임을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애국 선열들과 한 공간에 섰지만 나의 무지로 한국인으서로의 정신적 혈통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선진사상을 받아들이고 선진 학문과 기술을 공부하며 새 나라 건설에 매진했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대륙에서 만난 동지들과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이념과 이론, 방법을 모색하며 함께 총을 들고 일제에 항거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으며 보호했다. 조선의 청년들은 대한광복군이 됐건, 국제주의에 입각해서 중국 항일군이 됐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총을 들었다. 내년이면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경제교류에서는 교역액 2천억 달러가 넘어설 정도로 성과를 냈지만 과거로부터 단절됐던 양국의 역사를 복원하는데는 미흡했다.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과 복원에 기초해서 양국의 우의를 다지고 조선족 동포들과의 연대를 모색하지 못했다. 19세기 초반기 항일운동 연대정신의 연장선에 서지 못했다. 우리가 오늘날 대한민국 여권을 들고 대륙 땅에 다시 설 수 있었던 원인도 따져보면 일제 하 중국의 협력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은 '천재정치가' 덩샤오핑의 실사구시 철학을 따라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좌와 우를 따지지 않고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정신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하고 있다. 놓치는 경향이 있다. 한중 20주년을 맞아 양국의 관계를 새로운 반석 위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 20년 교류를 돌아보며 북한의 붕괴와 한중FTA를 계기로 새롭게 펼쳐질 한중 관계의 새로운 장을 대비해야 한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가상의 지도 공간 위에 현재의 정보 뿐 아니라 과거 역사도 담아 오늘날 우리 생활의 뿌리를 찾고 연속성을 갖게 하고 싶다. 한국 뿐 아니라 중국의 항일역사 자료도 한국어,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담아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애국 선열들의 생을 기억하게 하고 싶다. '주변검색' 기능을 이용해 과거의 역사를 불러와 잊혀지는 민족의 기상과 혼을 불러내고 싶다. 그리하여 민족과 국적, 언어의 장벽을 초월한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아를 만들고 싶다. 공간은 넓지만 정지해 있고 시간은 물처럼 흘러만 간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살고 있는 생의 의미도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연속성의 안목을 가질 때 분명해 질 것이다. 개인도, 국가도, 민족도... 중국은 우리에게 타국이지만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오히려 국내에서보다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세울 유리한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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