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후진타오, 원자바오 순순히 물러날까?

주님의 착한 종 2011. 7. 12. 10:30

정치개혁체제 논의 톈안먼사태 재평가로 이어져
후·원의 정치적 스승 후야오방·자오쯔양 복권 수순
 
▲ 후진타오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와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왼쪽)는 2012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의 급부상에 따른 후진타오(胡錦濤)와 원자바오(溫家寶)의 대응이 관심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와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는 2012년 10월 제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전후해 공식 퇴임을 앞두고 있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후꺼(胡歌·후 형님)’와 ‘원예예(溫爺爺·원 할아버지)’란 별명을 가질 만큼 대중적 지지가 높다. 반면 당내 정치적 기반에는 아직까지도 의문 부호가 따라다닌다.
   
   이는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퇴임 후 안전 보장 문제’와 직결된다. 중공(中共) 수뇌부에는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한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2007년 자신의 대권에 공공연히 도전한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서기를 수뢰 혐의로 쳐내며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에 기반한 정치세력)과 일전을 불사했다. 천량위의 구속으로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쩡칭훙(曾慶紅) 부주석을 비롯한 상하이방은 일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시진핑 차기 보장’은 막후협상 카드였다
   
 
당시 상하이방이 후진타오에 대한 마지막 견제구로 남겨둔 것이 시진핑이다. 상하이방의 좌장격인 쩡칭훙 전 부주석은 “시진핑에게 차기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후진타오와 막후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다. 장쩌민의 ‘꾀주머니’로 불리는 쩡칭훙은 한때 후진타오에 맞서 공산당 총서기직에 거론된 인물이다. 쩡칭훙의 희생으로 시진핑은 후임 상하이 서기가 되어 천량위 수뢰 사건을 뒷수습하며 상하이방의 안전을 지켜냈다. 상하이방이 후일 후진타오를 겨냥해 정치적 보복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반면 상하이방에 맞서 후진타오의 안전을 지켜줄 카드는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정도라는 평가다. ‘단파(團派·공산주의 청년단 파벌의 약칭)’의 리더격인 리커창은 후진타오의 직계다. 리커창 부총리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에 오를 것이란 설(說)도 나돈다. 전인대 상임위원장은 우리의 국회의장격으로, 권력서열 2위지만 실권은 없다.
   
   원자바오의 당내 입지는 더욱 불안하다. 원자바오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내에 계파 자체가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정치체제개혁’ 발언으로 공산당 보수강경파는 물론 자유파로부터도 공격받고 있다. 최근 자유파 작가 위제(余杰)는 홍콩서 출간한 ‘중국의 영화황제, 원자바오(中國影帝, 溫家寶)’란 책을 통해 “근본개혁에는 나서지 않고 정치적 쇼맨십만 있는 정치가”로 원자바오를 평가절하했다.
   
   
   후·원 콤비, 역대 최상의 조합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콤비는 신중국 건국 후 마오쩌둥-저우언라이(周恩來) 콤비에 이어 역대 최상의 조합으로 평가된다. 이전에는 권력서열 1위인 총서기와 권력서열 3위인 총리 간의 불화가 빈번했다. 자오쯔양과 리펑(李鵬), 장쩌민과 리펑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반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지난 2003년 각각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후진타오), 국무원 총리(원자바오)로 지명된 이후 이미 8년째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일각에서는 “후·원(후진타오-원자바오) 콤비가 정치체제개혁 논의를 이용해 2012년 대권판도를 뒤엎으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는 미국 CNN 인터뷰를 비롯해 ‘정치체제개혁’이란 단어를 최근 공식 석상에서만 7번 넘게 언급했다. 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은 최근 “선전에서 정치체제개혁을 주장한 연설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비견될 정도”라고 평가했다. 남순강화는 1992년 당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이 남방을 돌며 경제체제개혁을 주창한 연설이다.
   
   후진타오도 “정치와 경제 다방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더욱이 베이징 정가(政街)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부), 국가주석(외교), 공산당 총서기(당)를 한 사람이 독점하는 구조를 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심상치 않다. 정치체제개혁의 연장선으로 최고권력을 분점하자는 구체적 주장이다. “정치체제개혁 논의가 후·원 콤비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추측이 나오는 것은 이같은 까닭이다.
   
   1989년 6·4 톈안먼사태 이전만 해도 국가주석, 공산당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주요 핵심 요직은 분점돼왔다. 중국 공산당은 6·4 톈안먼사태를 ‘서방의 화평연변(和平演變·평화적으로 중국을 붕괴시킴)’으로 규정하고, 사태 수습 후 주요 직위를 한 사람에게 몰아줬다. 결국 정치체제개혁 논의는 1989년 6·4 톈안먼사태의 재평가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톈안먼사태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권력구조를 이전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톈안먼사태 재평가 노림수는
   
   6·4 톈안먼사태의 재평가는 더욱이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의 명예 회복과 연관된다. 6·4 톈안먼사태는 당초 후야오방 공산당 총서기의 불명예 퇴진에 이은 죽음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서 촉발됐다. 개혁개방의 상징인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이 가장 일찍 후계자로 낙점한 인물이다. 반면 개혁개방에 불만을 품은 강경보수파는 덩샤오핑을 압박, 1987년 후야오방을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끌어내렸다.
   
   후야오방의 뒤를 이어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자오쯔양은 보수파 리펑(李鵬) 총리와 각을 세웠다. 개혁개방파인 자오쯔양이 단식 중인 시위대를 만나 울먹이며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 대목은 유명하다. 반면 저우언라이의 양자로 소련에서 유학한 리펑은 보수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학생시위대는 리펑을 ‘돼지코의 나치장교’로 묘사했다. 당시 사태에 대한 과장 보고로 계엄군의 유혈 진압을 끌어낸 것도 리펑으로 알려져 있다.
   
▲ 후진타오(가운데)와 그의 정치적 스승 후야오방(왼쪽) 전 공산당 총서기 .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정치적 스승격이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를 지낸 후야오방은 공산당 총서기 재직시절 젊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했다. 공청단 출신인 후진타오 역시 후야오방의 선발로 중앙 무대에 데뷔했다. 더욱이 후야오방의 장남 후더핑(胡德平)은 후진타오와 막역한 사이다. 후진타오를 처음 후야오방에게 소개한 것도 후진타오의 친구 후더핑이었다.
   
   후야오방의 전격 경질에도 불구하고 후진타오가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후더핑을 보호해준 일화는 유명하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에 대한 공개적 비판도 거부했다. 훗날 덩샤오핑은 후진타오의 이 같은 의리를 높게 평가해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뒤를 잇는 4세대 지도자로 낙점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진타오가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직후 후더핑은 중화공상연합회 부주석에까지 올라갔다.
   
   
   ‘정치개혁’은 대권판도 변화 메시지
   
   원자바오 역시 자오쯔양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않다. 홍콩 아주주간은 최근호에서 “원자바오는 보수파로부터 ‘자오쯔양 집단’으로 매도당한다”고 보도했다.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을 경질한 후 두 번째 후계자로 낙점한 인물이다.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개혁파로 분류되며 국무원 총리와 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다. 톈안먼사태 때 자오쯔양을 수행해 당시 시위학생들을 만난 것도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었던 원자바오다.
   
   ‘정치체제개혁’ ‘민주화’ 같은 정치적 화두로 정국을 뒤엎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어왔다. 덩샤오핑이 대표적인 예다. 1976년 극좌파인 ‘4인방’에 의해 궁지에 몰린 덩샤오핑은 ‘정치개혁’이란 메시지로 판 바꾸기를 시도했다. 당시는 저우언라이에 대한 추모 열기가 가득한 시점이었다. 덩샤오핑은 4인방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려 공산당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 부주석 직함을 한꺼번에 박탈당했다.
   
   덩샤오핑은 2년 뒤인 1978년 ‘민주화’를 정치적으로 이용, 복귀에 성공한다. 당시 화궈펑(華國鋒, 2008년 사망)과 대권을 다투던 덩샤오핑은 민주화 요구에 대해 방임적 태도를 취했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지명한 공식후계자다. 중국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웨이징성(魏京生)이 부상한 것도 이 즈음이다. ‘민주의 벽’을 허용, 웨이징성에게 ‘제5의 현대화(민주주의)’ 주장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덩샤오핑이다. 결국 덩샤오핑은 화궈펑을 꺾고 대권을 잡았다.
   
   6·4 톈안먼사태도 “지도층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촉발됐다”는 시각이 강하다. 1989년 당시 최고결정권자인 덩샤오핑과 당 원로로 보수파를 대변한 천윈(陳雲, 1995년 사망), 리셴녠(李先念, 1992년 사망) 등과 개혁개방의 속도조절을 두고 각을 세우고 있었다. 각각 부주석과 국가주석을 지낸 천윈과 리셴녠은 마오쩌둥과 함께 대장정에 참가한 최고위 원로였다. 덩샤오핑에게 압력을 가해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연이어 낙마시킨 것도 이들 보수강경파였다.
   
   결국 1987년 자신이 낙점한 후야오방을 자기 손으로 폐한 덩샤오핑이 1992년 남순강화 때 “야오방 동지는 너무 일찍 죽었다. 애석하다”고 통탄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을 경질했을 때도 그는 후야오방의 당적은 그대로 살려둬 복귀의 여지를 남겨둔 측면이 있다. 또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개혁개방파인 자오쯔양을 후임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했다.
   
   더욱이 천윈과 리셴녠 등 보수파의 압력에 밀려 장쩌민의 후계자로 낙점했을 때, 덩샤오핑이 안전장치로 마련한 것이 후진타오다. 덩샤오핑은 후진타오를 제4세대 지도부로 직접 지명해 장쩌민을 견제했다. 한 중국 전문가는 “서방에서 후진타오는 ‘포커 페이스의 리더’란 평가를 받는다”며 “후진타오가 그를 낙점한 덩샤오핑의 전례를 따라 오는 2012년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 유지에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