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중국 여대생의 한국체험기⑪ 한국에서 바라본 북한

주님의 착한 종 2011. 4. 27. 10:32

 

▲ 지난 1996년 포획된 잠수함
▲ 통일공원에 전시된 북한 잠수함

통일공원에는 북한 잠수함이 전시돼 있다.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1996년 6월, 25명의 북한 간첩들이 강 하류 해역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중 잠수함이 고장을 일으켜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운전기사에 의해 신고되었다고 한다.

북한 간첩들은 산으로 도망을 쳤는데 그 중 13명은 자살했고, 11명은 사살됐으며, 1명은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17명 사망자와 22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이야기를 듣고는 감동과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양측 병사의 애국정신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지만 동시에 젊은 청년들의 죽음이 참으로 안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동진 해안선을 따라 가다보니 한국 군인이 한반도의 안전을 위해 총을 들고 경계를 서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 해안 경비를 서고 있는 사병
▲ 해안 경비 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한국 군인

남북문제에 대해 나는 많은 한국인의 의견을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의 경제사정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당장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지금 막상 통일이 되면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량의 원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에 많은 세금을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소득이 많이 줄어든다는 얘기이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은 먼 훗날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주말 오전, 난 교수와 함께 오두산에 위치한 통일전망대에 올랐다. 통일전망대는 해발 118미터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역사상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현재는 서쪽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어 3.2km 너비의 임진강 사이로 북한과 마주보고 있다.

전망대에는 500원짜리 동전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망원경을 통해 강 건너편에 있는 북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망원경을 이용해 북한 사람들을 관찰해봤다. 소를 이용해 밭을 가꾸고,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모습이 마치 원시시대를 방불케 하였다.

부근에는 집들이 있었으나 안에는 창문도 없고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 북한에서 유학한 친구는 "평양에도 많은 고층건물들이 있지만 대부분 비어 있으며,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유는 그저 다른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 통일전망대 북한전시관에 전시된 북한 가정집 내부
▲ 통일전망대 북한전시관에 전시된 북한 가정집 내부

우리는 통일전망대 내에 있는 북한전시관에서 북한 사람의 옷과 집의 내부구조, 학교 교실과 책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북한 사람들을 형제라 여기고 있으나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또한 전시관에서 한국전쟁의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전쟁 중 한국군의 사망자는 616,702명이었고 북한군의 사망자는 607,396명이었다. 미국 지원군에 맞서 싸운 중국 지원군의 사망자수는 무려 972,600명이나 되었다.

이 숫자들을 보는 순간 누군가 내게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2백만명이 넘는 사망자 중 절반 가까이가 중국 젊은이였다는 사실에 나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는 우리세대는 느끼지 못하지만 이 기록들을 보면서 우리는 평화를 꿈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남북이 이성적으로 문제와 오해를 풀고 다시는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한다.

▲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
▲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

일반적으로 한국의 중년층은 중국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아직도 중국이 낙후하고 가난한 국가로 알고 있다.

이전에 친구로부터 재밌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한국에서 유학할 때 많은 어른들이 “아가씨, 중국에는 텔레비전이 있나요? 중국 사람들은 빵을 먹나요?” 라는 기분 나쁜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에는 아직도 중국 무술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런 장면들만 보고 중국 사람이 날아다니고 소림복장을 하고 다니는 줄 안다.

게다가 난 도저히 상식이라고는 통하지 않는 한국 아줌마를 만났던 게 기억난다. 귀국하기 몇일 전 머물 곳이 없어 성균관대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후배 집에 있을 때였다. 후배의 집은 3명이 누워있으면 꽉 찰 정도로 작은 방이었고, 에어컨도 없는 아주 형편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집주인은 매일 찾아와 영수증도 없이 물값과 전기비를 요구하기 바빴고, 매번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매너 없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후배가 참을 수 없어서 큰소리 한번 쳤더니 태도가 조금은 나아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