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을 바로 짓지 않기로 하였다.
우선 워밍업을 좀 해보고 지을지 말지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제조업을 한번도 안 해본 나로서는 이론상의 제조원가에 신뢰가 가지를 않았다. 시험삼아 몇 개월을 해 볼수만 있다면 제조원가를 근접하게 잡아낼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평소에 알고지내는 노(老)선배 한분에게 부탁을 했다.
"선배님의 공장이 꽤 크지요?"
"갑자기 왠 뚱딴지 같은 소린고.."
그가 중국에 드나든 시간은 나보다 몇 년이 앞선다. 홍콩을 통해 드나들다가 92년에 칭다오에 꽤 큰 공장을 세웠던것이다. 그 공장에는 약 40평정도의 창고가 하나있다. 그것을 빌려쓰기로 부탁을 한 것이다. 작업대와 몇가지의 공구는 직접 만들기나 시중에서 싼 것을 구입하였다. 생산제품은 코드류로 정했다. 중국공장에 정기적으로 주문하던것이다. 사실 말이 생산이지 원자재와 사출은 전부 외주로 충당하고 직접하는 것은 납땜과 완제품 조립만 하면 되었다. 생산공정을 짜 보니 기본 공인이 약 30명은 필요했다. 임시생산이므로 굳이 정기직 공인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마침 노선배의 공장은 3교대로 작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비번인 공인들을 희망자에 한해서 사용하고 그들에게 추가수당을 부담하면 어떤지 선배의 의견을 물었는데,쾌히 승락을 받았다. 수출을 위해서는 실비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선배의 회사명을 사용코자 하였다.
"문디이 자슥!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사실 이 모든 것은 선배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노선배는 나의 알뜰함을 잘 봤는지 오히려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것이다.
한편으로 생산을 하면서 공장터를 물색하러 다녔다. 그 당시 칭따오에는 시 외곽지(鎭=우리의 面에 해당/村=洞에 해당)에 한국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칭따오가 92년부터 외자유치를 주로 한국기업들을 상대로 활발히 한 관계로 각 鎭마다 그 유치실적이 해당지역 당서기의 역량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먼저 시작한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게 그리 쉬운일은 아니다. 처음에는 유치를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협조를 약속하고는 일단 공장이 완료되면 서서히 그 흑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결코 비용이 싼것만도 아니라 한다. 당시 공장을 세운후 해당 촌서기나 진서기에게 자동차를 선물로 건낸기업도 여럿이 된다 했다. 뒤를 봐주기나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달라는 일종의 보험금인 셈이다. 여기에 우리기업들의 평소습관인 뇌물성 공여도 톡톡히 한 몫을 하였다.
'그것도, 있는사람들이나 할 수가 있는 일이제…'
우선 공장 후보지를 위한 몇가지 나 자신만의 기준을 정했다.
해당지역의 촌장과 촌서기의 인간됨 및 합리적 사고 여부를 최대한 고려할 것.
미리 진출한 한국기업이 그 지역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것이 스스로의 역량에 합당한지를 판단할 것.
긍정적판단이 서면 비록 건물,토지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보름을 돌아다녀도 여기에 맞는곳이 없었다. 특히 두번째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란 문제에서는 영 자신이 없다. 만나본 업체치고 어려움이 없는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어려움도 보통 어려움이 아니라 그들 말마따나 한마디로 엿 같단다.
'기준을 바꾸자'
첫째. 촌장과 촌서기가 어떤 사람인가 판단을 먼저할 것.
둘째. 투자실적이 별로 없는 곳을 물색할 것.
셋째. 공장부지는 구입하지않고 임차해 쓸 것.(향후 여차하면 법인체 이전을 고려).
딱 한군데를 찾았다.성양구 모모촌.
물이좋아 복숭아를 주 생산품으로 하는 비교적 부유촌. 외국투자공장은 하나도 없고 중국공장이 명목상 몇 개가 있을뿐이다. 다시말해 촌장과 촌서기는 외자유치에 그리 적극적일 필요가 없는 안정된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투자를 유치하면 당서기와 주임등이 나서서 도와주는 대가로 여러가지 반대급부를 은연중에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처음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이런저런 비용명목으로 받아가지만, 투자업체가 늘수록 이제는 하나의 관습이되어 당연하다는듯이 이권을 챙기게 되는것이다. 몇 개의 투자업체가 모여 회의하여 어떤항목은 거절할것이냐 말것이냐를 결정해서 단체로 항의하곤 하였다. 이런 비조세분야의 부담은 지역마다 항목이 틀리는것도 많았다. 예를들어 공인들을 채용할 때 외지인의 경우 공안국에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1인당 매월 90인민폐(약 만원) 를 회사에서 부담하는 문제는 몇 년동안 큰 이슈가 되어 투자업체와 촌정부간의 줄다리기가 있었다. 어떤 지역은 단체로 단합해서 이를 거절하기도 하고, 응집력이 약한곳은 울며겨자먹기로 지급하곤 하였다.
유서기.
47세. 180센티의 장신에 둥글 넓적한 이마, 항상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언뜻보면 모택동의 젊은시절과 많이 닮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인 서른하나에 촌의 당서기에 임명될 정도로 당성이 철저한 엘리트다. 그가 촌의 서기가 된 이후로 전통적으로 농사만 짓던 토지를 물이 좋고,일광이 충분하며,양질의 토양인 지역특성에 맞고 고수익품인 복숭아를 재배할 것을 촌민들에게 설득했다. 이것이 적중하여 매년 촌에서 공동수매하여 말레이지아 등지로 수출을 하여 농가의 소득을 주위의 다른 촌보다 몇갑절이나 올렸던것이다. 그 공로로 촌장까지 겸임하게 되었고, 그런 그의 노력이 십수년 넘게 서기와 촌장을 다른사람에게 넘어가지 않게 한것이다. 항상 그는 촌민의 복지를 먼저 생각했기에, 다른 촌에서 외국기업을 유치하기위해 경쟁적으로 토지를 싸게 불하 하는 것을 늘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촌에는 아직 외국기업이 들어서지 않고있다. 정치적 인물이 못되는 그런 사람이다.
중국의 조직체계를 보면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행정라인과 당의 라인을 갖고있다. 촌정부에서 중앙기관에 이르기까지 이런 구조로 되어있다. 행정수반은 내치를, 당의 수반은 외치를 주로 담당하는 것을 볼수있다. 부락단위인 촌에는 촌장과 촌 서기(村書記)가 그 대표를 맡고있고, 시정부에도 시장과 시 서기(市書記)가 있다.성장과 성 서기(省書記). 국가행정의 수반은 총리며 당의 수반은 총서기이다. 전형적인 공산주의 체제다. 그중 힘의 강도는 서기에 쏠려있다. 유서기와 같이 행정수반과 당서기를 겸하고 있는경우도 있다. 따라서 외자기업을 상대할때는 서기의 직위로서 대 한다.
칭다오시에는 6명의 부시장이 있었다. 각자 맡은 분야가 다르며, 그중 당성과 행정력이 뛰어난 사람이 시장으로 선출된다. 반드시 당서기일 필요는 없다. 서기는 또 따로 있다.만약 행정력과 정치력이 뛰어나면 시 서기로 자리를 옮길수있다. 서기를 거쳐야만 명예와 승진이 보장되어있다.
※ 촌서기의 인물됨을 먼저 파악하고,그를 절친한 친구로 만들어 놓는것은 공장운영의 제일의 조건이다.
절대 비용이 싼 곳이 제일의 조건이 될 수가 없다.
스프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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