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62) - 아버지께 죄송해요

주님의 착한 종 2007. 12. 18. 16:35

아버지께 죄송해요

 

 

마스크를 쓴 채 아빠와 함께 찾아온 재영이는 키가 무척이나 컸습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21살 재영이......

건강한 키에 큰 눈매를 가진 재영이는 겉보기에도 잘생기고 씩씩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생긴 젊은 청년이 무슨 병을 앓나 싶을 정도로 건장했는데

몸 안에서는 이미 말기 혈액 암으로 서서히 생명의 불꽃이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혈액 암은 처음 대하는 터이라 무엇을 어떻게 간호해야 할 지,

무엇을 도와주어야 할 지 몰라 아버지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곳에 와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병원엘 다녀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비정상적인 백혈구가 무제한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수치를 자주 점검해서 수치가 늘어나면 떨어뜨려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피 주사와 혈소판만을 걸러낸 혈액을

맞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도 길어야 20개월을 버티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한 번 수혈할 때마다 22만 원 정도, 다른 비용까지 합하면

꽤나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한 달 비용이 적어도 100만 원,

이 젊은 청년을 살릴 수만 있다면 돈 100만 원이 아까우랴 만은

단지 죽음을 기다리면서, 죽을 때까지 드는 비용이 이 정도이니 한숨이

절로 났습니다.

 

1차 수술할 때 골수이식을 했는데 7,000만 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조기퇴직을 하셨고

그 퇴직금과 함께 그 동안 모아둔 돈을 모두 아들의 수술비에 썼다고

했습니다.

 

전 재산을 써서라도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냐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재영이가 제일 미안해했던 것도 바로

아버지의 이런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서 이제는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아버지께 받은 은혜를 어떻게든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투병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6개월 전에 이미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아둔 터라 빨리 치료해서

군에도 갔다 오고, 취직도 하고 아버지께 효도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지냈는데, 두 달 전부터 몸이 다시 안 좋아지더니 병원에서 재발이라는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수술을 하려고 해도 재발은 보험처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아버지가 평생 모은 퇴직금까지 다 써버린 상태에서

더군다나 보험처리가 안 된다면 재수술은 꿈도 꿀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삼키면서도 수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영이도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봐요. 그 동안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전 잘 견딜 수 있어요. 죄송해요.

건강해서 아버지께 보답하고 싶었는데......

 

두 부자는 서로를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습니다.

 “미안하구나......너무 미안해......

 “괜찮아요, 아버지!

 

아버지는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가슴 아파했고, 아들은 아버지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건강으로 보답을

못 하고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앞서 가야 한다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나마 죽기 전까지 목숨을 부지 하는데 드는 돈이 한 달에 100

원씩이니 마지막까지 부모에게 폐를 끼쳐야 한다는 생각에 젊은 아들은

더욱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꽃마을에 입원한 후에도 그의 일기장을 보면 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그리움, 죄송스러움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날 무렵 재영이의 심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건의 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안건

1. 원장신부 위해서 기도 10

2. 팜플릿 접기 하루 100

3. 자기 일생 자서전 식으로 매일 쓰기

위 내용이 지켜질 경우 일주일에 10만 원씩 지급하기로 함.

 

                                   2002. 5. 15.

                                        ()

 

재영이는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신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위안을 얻었는지

처음 며칠간은 통증도 적었고 기분 좋게 지냈습니다.

 

재영이는 어릴 때 가난하긴 했지만 생활력이 강했던 터라 중학교시절

3년 동안 내내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학비와 용돈을 벌어 쓰는

억척이기도 했습니다.

 

남달리 덩치가 크고 자신의 말로는 성장속도가 빠른 탓에 초등학교 때는

전교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크다고 했는데 덕분에 시비를 걸어오는

아이들과 싸움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실업계로 가면서 한때 방황을 하기도 했으나 선생님을 잘

만나 폭발하는 에너지를 운동 쪽으로 돌릴 수 있게 되어 학교에서

인정도 받고 대학에도 들어갈 수가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2년제 대학을 졸업한 다음 군에 입대하기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을 무렵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직장을 구하게 되었지만 수시로 몸이

떨리고 열이 나는 현상들이 발생해 병원에 갔더니 급성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1차 수술 때까지만 해도 죽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발이 되면서 죽음이 코앞까지 닥쳐오고 나니 왜 내가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지,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

신에게 원망도 많이 했고 돈이 없어서 끝까지 치료를 못 하고 가는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분노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재영이는 놀랍도록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젊은 나이라서 그런지 상태가 빨리 악화되어 병원에 자주

입원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백혈구 수치가 갑자기 올라가거나 열이 발생

하면 어떤 때는 병원에 일주일씩, 열흘씩 입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열이 안 떨어 질 때가 많았습니다.

몸에서 염증이 발생했다고 백혈구가 이상증식을 일으키니 몸에서는

자동반응으로 그것들을 죽이기 위해 또 열을 발생시킵니다. 속에서는

불이 나니 계속해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있습니다.

 

살갗을 만져보면 저체온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가운데도 24시간

선풍기를 틀고 열을 식히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일생을 일기 형태로 조금씩

적어나갔습니다.

 

하루는 창문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다가 내 기척을 듣고

“신부님 제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부모님 속만 많이 썩여드리고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가 보구나.

내가 보기에 너는 확실히 천국에 갈 거야. 나쁜 짓을 했어도 네 수준에

맞는 것일 테고, 시간으로 따져도 남들보다도 더 짧지 않니.

또 이만큼 잘 준비하고 가니까, 너 같은 사람이 천국 못 가면 누가

가겠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아직 정신이 맑을 때 가족들과 네가 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특히 부모님을 위해서. 살면서 다 못하고 가는 효도......

기도로라도 해드리고 갈 수 있게. 알겠지?

 

“예. 그럴게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열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도 해보고, 수혈도 하고, 별별 방법을 다 써도

회복되지를 않았습니다. 작별의 시간이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너무나 속을 썩여서 아버지께 제일 죄송해요.

병이 나아서 효도하고 싶었는데...... 

정신이 잠간잠간 들 때 마치 유언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의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신세만 많이 지고 갑니다.

다음 생애에 갚을 수만 있다면 꼭 갚고 싶어요.

그게 마지막 말이었나 봅니다.

2~3일을 고열 속에 앓아 눕더니 결국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고통도 불행도 없는 하늘나라에 가서 행복하게 살거라......

끝까지 너를 지켜주지 못 해서 미안하구나. 못난 애비를 용서해다오......

아들아......

재영이는 오열하는 아버지의 품에서 작별인사를 들으며 22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천국에서 질병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