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64) -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주님의 착한 종 2007. 12. 26. 14:33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50대 초입의 직장암 환자가 입원했습니다.

키는 자그마했지만 조용하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분이셨습니다.

원체 말이 없고 조용했기 때문에 옆에서 숨을 쉬고 계시는지 확인을

해야 할 만큼 참을성과 인내심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묻는 말과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평화롭고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자매의 이름을 떠올리면 조용한 분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어느 누구도 감당해내기가 어려운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임종이 임박해서야 알 수 있었으니

아마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었기에 차라리 침묵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인가

“두려워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하며 말문을 꺼내셨습니다.

 

“죽는 게 무서우세요?

지금까지 잘 견디시더니 마음이 약해지셨나 봐요?

 

“그게 아니랍니다. 내가 죽으면 먼저 간 남편을 만날까 두려워요.

사실 그 한마디에 지나온 세월의 아픔이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이 자매의 이 말 한마디가 임종을 준비할 무렵에 엄청난

두려움에 떨게 하는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20살에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자매의 인생을 뒤바꿔버린 악연이 되고 말았습니다.

착한 줄만 알았던 남편이 어느 날 인가부터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심심풀이로 하려니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신혼의 꿈을 안고 사진관을 차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박으로

가게를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시골로 가서 버섯재배를 하기도 하였지만 술과 도박은

끊을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폭행까지 시작되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술과 도박, 폭행으로 몸은 점점 더 망가져갔고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피신 다니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찾으러 다녔고 또 도망가고, 찾으러 다니고......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2 1녀의 자녀를 둔 엄마로서 너무나 힘이 든 나머지 죽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도 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은 망가져갔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큰애와 둘째가 결혼할 때까지 만이라도 버티면 그때는 훨훨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 위안을 가지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습니다.

 

그런 힘든 와중에서도 한 번도 남편을 원망하거나 욕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지독한 사람’ 이라고만 표현했고 가끔씩 한숨을 쉬며

‘언제 인연이 끊어지려나’ 하며 탄식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마침내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막내가 자립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자매는 막내아들과 함께 도망쳐 나왔습니다.

본격적인 도피생활인 셈입니다.

 

그렇게 2년을 숨어서 살았는데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느 때 남편이 불쑥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끝까지 수소문을 해 찾아내서는

집으로 끌고 가 괴롭혔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다시 나타날지 몰라

늘 불안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불행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2년쯤 되는 어느 날 남편이 불쑥 직장에 나타났는데 그때의 심정이란

저승사자가 나타났어도 그보다는 덜 무서웠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끝은 있는 법 얼마 후에 남편이 간경화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습니다.

평생을 해온 술과 담배가 원인이었는데 이미 말기가 될 때까지 몰랐던

것입니다. 변변한 치료조차 할 겨를도 없이 남편이 혼자 집에 있을 때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불행한 말로였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이젠 정말 숨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그 해 가을에 직장암이란 청천벽력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20살에 결혼해서 30년 넘게 남편에게서 받은 학대와 고통 스트레스의

결과였습니다.

 

1년 후에 다시 재수술을 받고 그때부터 긴 투병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이 기간이 지난 30여 년의 세월 중에서

가장 사람답게 살았던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긴 투병생활은 자식들에게까지도 점점

부담이 되었습니다.

 

2003년도에 간과 폐까지 전이가 되었을 때 오히려 잘 되었다.

또 수술하자는 소리 할까 봐 두려웠다고 하면서 안 아프고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빨리빨리 다 퍼져서 얼른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통증이 오는데도 무조건 괜찮다고 했고 정 못 참겠으면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정도로만 표현을 했습니다.

진통제를 쓰면 더 오래 살 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참아야 빨리 죽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성모꽃마을에 입원을 한 후에도 음식은 전혀 입에 대지를 못 하고

링거에만 의지한 채 생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누워있는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부종이 심해지자 손발이 통통해

지니까 살이 찌는 게 아니냐며 링거를 빼야겠다고 할 정도로

이미 삶에 대해서는 포기한 지 오래였습니다.

 

말을 시키지 않으면 하루 종일 가도 말 한 마디 안 할 정도로

조용했는데 두 달이 지날 무렵부터 상태가 점점 나빠졌습니다.

임종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밤에 잠을 자야 하는데 눈을 감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잠이 드는 약과 주사제를 써도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곯아떨어져야

할 터인데도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지 않으려고, 잠이 들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 역력했습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정신 상태로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왜 그런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는데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말했던 자신이 죽으면 먼저 간 남편을 만날까 두려워 눈을

감을 수가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막상 죽음이 가까이 오자 잠이 들어 죽게 되면 남편을 만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나 큰 나머지 낮이고 밤이고 잠이 들지 않기 위해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아무리 다시 만나 살 일이 없다고, 괴롭힐 리 없다고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거의 열흘 이상을 끌었는데 사람이 최악의 상태에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남편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게 했으면 환자가 저 정도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짐작케 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분입니다.

임종도 다른 사람보다 두 배는 길었는데 이분의 한과 두려움을 짐작케

했습니다. 결국엔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남편을

만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