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이렇게 죽는 거야?
이게 다 꿈이었으면.. 그냥 푹 자고 일어났으면 좋겠어 ”
꽃마을에 입원할 당시 곱상하게 생긴 40대 초입의 위암말기 환자가
탄식조로 내 뱉은 말입니다.
아직 죽음을 받아 들이기에는 젊은 나이. 파란 만장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아직은 할 일이 더 남아 있고 또한 유종의 미를 거두고 갔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시간이 촉박함을 느끼기에 그녀의 탄식은 더욱 애절하기만
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왔을까?
그다지 많은 죄를 짓고 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제 살만한데, 이제 사람같이 살만한데 왜 이제와 나를 데리고 갈려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왜 나에게 이리도 힘든 이겨내지 못하는 병을 두 번씩이나 주시는 걸까?
하느님 왜? 왜?...”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야 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에 대한 애착,
분노와 좌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기까지 여러 날을 가슴 아파해야 했습니다.
이 자매의 삶은 어릴 때부터 평탄치 않았습니다.
사업의 실패로 매일을 술로 사시는 아버지와 생활고에 시달려 언제나
무뚝뚝했던 어머니...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늘 신세한탄을 하며 주정을 하셨고
그런 날이면 어머니와 자녀들은 폭풍을 맞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습니다.
유달리 바른 말을 잘했던 이 자매는 말대답을 하다가 매를 맞기를 수 차례,
그럴 때는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어 동생들과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이
꿈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첫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정에 목말랐던 이 자매는 오아시스를 만난 듯 모든 것을 첫사랑에 걸었고
첫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잠시, 불의의 사고로 첫 사랑을 떠나 보내고
남은 것은 25세의 젊은 나이에 간난쟁이 딸이 전부였습니다.
이 자매는 딸을 위해 한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렇게 살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이해해 주고 친딸처럼 키워 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 보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두 번째 행복을 꿈꾸었지만
정작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환경은 이제는 딸과도 떨어져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또 많은 날들을 눈물로 보내야 했고 어린 딸 또한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던 중 둘째 아이가 태어나 의지하며 안정을 찾아 갔지만 이번엔 남편의
노골적인 외도와 가정 경제에 대한 무성의, 자녀문제로 인한 싸움,
시부모와의 갈등들로 인해 가슴앓이는 깊어 갔고
끝내 위암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오히려 더 굳굳하게 병마와 싸워 이겨냈고
새 삶을 얻은 사람처럼 직장도 다니고 봉사 활동도 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편이 병들었을 때도 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그렇게 미워했던 아버지였지만 혼자가 된 후 아버지도 돌보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살았던 까닭에
결국은 10년 만에 위암이 재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신뢰가 깨져버린 남편, 엄마가 죽으리란 생각조차 못하는 아이들,
사랑이 없어져 버린 가정, 이 모든 것들이 이 자매의 투병생활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심적인 고통 앞에서 그녀의 신음소리는 24시간 계속 되었고
세상을 원망하는 눈빛이 선명했습니다.
뒤늦게야 아내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보고 남편이 잘해 주었지만
당장 죽지 못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고통이 너무 심해 가족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했는지 고통 없게 해준다는 성모꽃마을로 가자며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과의 정을 느꼈습니다.
묵묵히 남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직 세상은 살아 볼만한 곳인가 봐’ 라며 가슴이 따뜻해짐을 표현했습니다.
누구나 삶의 애착은 있게 마련이지만 하루는
“ 신부님 아침에 일어나 앉아 내 다리를 보고 있으면
내 다리와 내 팔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이 느껴져요.
몸도 마음도 제대로 움직여지지를 않아 이제는 엄마와 동생에게 신세지지
않으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네요. 그런데도 왠지 마음이 편안합니다.
사랑하는 엄마와 동생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위안이 된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 감사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한답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그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달라고요’
아마도 지난 세월 부딪쳤던 사람들과의 고통스런 갈등들이 너무 가슴 깊이
각인되어 있었나 봅니다. 미웠지만 사랑했기에 마지막을 사랑으로, 용서로,
화해로 마무리 하려는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가족 하나하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 어릴 때부터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보지도 못하고 떨어져
지내야 했던 딸의 가슴을 끌어안고
‘ 잘해 주고 싶었는데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이모를 엄마처럼 친구처럼 생각하고 꼭 붙어 다니고 모든 것을 상의해....
동생도 잘 봐주고... 미안해 내 딸아...“
형제들에게는
‘엄마 속상하게 하지 말고 잘해 드리고, 아버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보필하고 나중에 형제들끼리 엄마 아버지 산소에 모여 이런 저런 얘기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하느님 앞에서의 죽음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며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혼미해 질 때는 간간히
‘나 이렇게 죽는 거야? 집에 다녀오자, 애들한테 빨리 가자’는 말을
반복해서 했습니다.
아마도 자식을 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걱정이 되나 봅니다.
임종할 때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사랑하는 엄마와 딸, 남편, 그리고 동생들, 모두 모인 가운데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지막 숨이 편안해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마지막 죽을 때의 모습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래도 꽃마을에 와서 임종을 하는 이들은 마지막 가실 때의 복은 모두 받고
가는 셈입니다.
살아 온 일생이 어떠하든 마무리를 잘 매듭짓고 아름답게 장식한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세례와 견진까지 받고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임종을 맞는다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최고의 복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기도하고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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