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마음을 열고

딸을 시집 보내면서 내 나이를 알게 되었으니

주님의 착한 종 2007. 11. 22. 08:51

(가톨릭 인터넷 박 영효 님)

 

딸을 시집 보내면서 내 나이를 알게 되었으니......

 

성당의 커다란 은행나무, 잦은 가지를 감추고서 빼곡히 붙어있던

노란 은행잎이 금요일 오후의 장대비에 많이 떨어져 나가고

추위에 밤새 떨었다.

내일 비가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안절부절이다.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어찌됐던 일기예보는 괜찮다.

 

다음 날!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딸을 시집 보내고 나니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 애!

모든 예식을 마치고 뭘 타고 갔는지, 애비하고 인사를 하고 갔는지

생각이 안 난다. 그렇지만 내 느낌이었는지 어땠는지

성당 문 밖까지 배웅을 했던 것 같다.

 

주례신부님과 오신 손님들을 예를 차려 정중히 모셔드리고 나니

왠지 허전하다. 1시 예식이었던 지라 출출한 배도 허전하지만

그것이 꼭 내 허전함을 채워주지는 않을 것만 같다.

휑하니 마음 한구석이 뚫리고 옆구리에 찬바람이 분다.

쓸쓸한 기분이 느껴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정신이 든다.

갑자기 내 나이가 10년을 더 먹은 것 같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나이를 잊고 살았는데......

손자는 없어도 딸을 출가 시켰으니, 왠지 할아버지 기분이 든다.

무엇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주마등을 타고서 추억의 창고로 달려갔다.

추억의 창고에는 어렸을 적 모든 것들이 들어있었다.

한 창고엘 들어가 봤다. 그곳엔 팽이와 팽이채가 있었다.

 

추억의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색 바랜 팽이 얼굴에,

크레파스로 무지개 색을 그려 넣고서는 두 손으로 잡고 힘차게 돌려본다.

좌우로 기울며 뒤뚱뒤뚱 거리다 쓰러진다.

팽이를 들고서 꼭지를 확인한다. 쇠구슬은 박혀있다.

다시 힘차게 잡아 돌렸다.

탄력이 붙은 팽이 옆구리를, 메리야스 조각으로 길게 늘어뜨려 만든

팽이채로 두들겨 패줬다. 사정없이 패주니 정신 차리고 잘도 돌아간다.

패주니까 정신을 차리는 거 같다.

 

다른 창고로 들어가 봤다.

그곳엔 재기가 바구니에 곱게 자리 잡고서 술을 늘어뜨린 채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있다.

손으로 들어서 살펴보니 나이가 제법 많이 들었다.

습자지를 구해서 아리따운 아가씨로 만들어줘야겠다.

 

습자지위에 구멍 뚫린 엽전을 가운데 자리 잡고 몇 번 접은 다음

구멍을 뚫고서 그 구멍 안으로 양 끝을 잡아 뺀 다음

치마를 입혀주고서는 옷을 빚어줬다.

술이 달린 치마가 되었다.

술마다 날개를 펴 준 다음 허공에 띄운다.

발로 차며 하나 둘 세어보니 다섯 개를 못 넘긴다.

키 킥 하고 웃음이 나온다.

 

그 다음 창고엔 멍석이 깔려있고 소쿠리가 있다.

소쿠리 속에는 새끼로 꼬아 만든 줄넘기가 담겨있고,

소쿠리 밑으로 공기 돌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어렸을 적 이 모든 것으로 내기를 하였고,

내기를 한 즐거움이 입가에 웃음으로 번져 나온다.

 

또 다른 창고로 향하니 그곳은 나쁜 추억의 창고였다.

그곳에서는 필름을 돌리는 장치가 되어있었다.

머리를 땋아 내린 예쁜 댕기머리의 여자 아이가 나오더니

그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보니 그 예쁜 여자아이 뒤로 살금살금 허리 굽히고

걸어가는 악동 하나가 보인다.

내 어렸을 적 나를 너무나도 많이 닮았다.

그 악동은 예쁜 여자아이의 댕기머리채를 잡고서는 흔들며 즐거워한다.

아이는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또 다른 장면이 나왔다.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 먹으러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 번 넘으렴.

파알짝 팔짝 팔짝 날도 정말 좋구나.

이 노랠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데 그 악동아이가 다가간다.

그 아이는 그곳엘 가서도 가만있질 못하고 고무줄을 끊어놓았다.

 

추억의 다음 창고는 썰매와 송곳이 있고 연과 얼레(연자새)

놓여있었으며 자치기가 들어있다.

동구 밖 조그만 연못에서 얼음을 지칠 때 썰매 위에 무릎을 꿇고서

송곳으로 힘차게 찍어내며 얼음판 위를 쌩~쌩 달렸던 추억이

새롬 새롬 떠오른다.

사알짝 꺼져가는 얼음 위를 달릴 때는 스릴을 맛보며 마냥 깔깔댄다.

추위도 저 건너 쪽으로 달아나 이쪽을 살피고 있다.

이미 옷은 다 젖은 뒤다.

 

방패연과 얼레를 들어봤다.

촉감을 통하여 얻어진 추억은 나를 연 날리는 냇가로 인도한다.

얼레에서 무명실을 조금씩 풀면서 연을 바람에 맡긴다.

연은 이내 사랑하는 바람을 껴안고서 높이 올라갔다.

하늘 높은 공중 바람에 탱탱해진 방패연은 대장부의 기개처럼

건방을 떤다. 너무 자만해진 연은 하늘 길의 미아가 되기가 싫은지

얼레에게 애걸을 한다. 풀어달라고 사정을 하는 연의 애절한 모습이

내 모습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옆의 아이에게 다가가 연 싸움을 걸어봤다.

그 아이도 제 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얼레를 감고 풀고 하기를 여러 차례, 드디어 싸움이 걸렸다.

얼레를 잡은 손에 긴장감이 돈다.

팽팽한 느낌이 전달되는 순간 얼레를 감으니 저 아이의 지친 연은

인연을 끊고 하늘로 승천한다. 사람과 끈 떨어진 인연이었다.

 

연을 만들어봤다.

과연 지금은 얼마나 잘 만들어질지 모르겠지만

우선 머릿속으로 만들어본다.

대나무를 얇게 갈라 깎아서 다듬고 살을 만든다.

창호지를 접어서 가운데 구멍을 뚫고 펴보니

직사각형의 방패연 모습이 갖춰진다. 대살을 창호지에 단단히 붙이고

나니 골격이 갖춰지고 대장부 연이 되었다.

얼굴에 천하대장군 모습을 물감으로 그려 넣었다.

 

무명실타래를 풀어 얼레에 감는다.

아교풀을 허드레양재기에 담아서 풍로 위에 놓고 열을 가하니

설탕 녹은 죽처럼 되었다.

유리가루를 빻아 아교풀과 적당히 혼합하고서 얼레에 감긴 무명실에

매기기 시작한다. 무명실은 아교풀의 옷으로 무장하고 출전을 할

채비를 갖췄다.

방패연에 꽁숫구멍을 뚫어 연줄을 매고 잘 날 수 있도록 좌우 길이와

각도를 준 다음 얼레에 묶는다

어렸을 적 연을 만들 때의 정신은 장인정신으로 했었다.

 

자치기를 들어보니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동무들과 같이 엎드려서 한 자, 두 자 셈을 하며 내기를 했던 모습이

선하다.

자치기를 할 때 쓰는 나무의 길이와 굵기는 잊은 지 벌써 옛날이다.

요즘 아이들 이 놀이 하다가는 교통사고 나기 일보 전이다.

 

운동화도 못 신던 시절에 까만 고무신을 신고서 축구를 한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찾아와 어두워 질 때까지 열심히 뛴다.

축구공을 고무공으로 대신하고, 고무신이 벗겨지면 공 보다 더 멀리

날아갔고, 그럴 땐 어김없이 뒤로 벌러덩 넘어진다.

잘못하여 뒤땅이라도 칠 땐 엄지발톱이 빠져야 하는 수고도 따랐다.

물론 절뚝거리며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의 불호령은

이 글을 보는 많은 사람들도 다 같이 겪었을 터이다.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매미채로 매미를 잡던 일이며,

거미줄의 끈적거림을 활용하여 잠자리채를 만든 다음

가을 푸른 하늘을 향하여 휘두르며 잠자리를 잡던 일,

풍뎅이를 잡고, 도토리와 상수리를 따고, 칡뿌리를 캐어 먹고

풀잎을 씹으며 즐거워했던 어린 시절이 왜 생각이 났을까?

 

50년 전 먼먼 옛날로부터 오늘을 향해 부는 바람에 묻어오는 향긋한

냄새는 나를 어린아이로 만들어 놓았다가 딸이 시집가는 바람에

내 나이를 찾았다

바삐 살다 보니 모르고 지났던 지금까지의 내 나이를 딸 덕에 찾았는데

딸이 떠나고 보니 그게 바로 내 나이더라

시집 간지 이제 며칠 됐다고 제 엄마에게 김치 달라 뭐 달라 하고선

가져 갈 줄만 아는 딸이 되었다

 

딸을 시집 보내고서 느꼈던 바를 적어보았습니다. – 박 영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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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영효 님

딸을 시집 보낸 날, 아빠는 텅 빈, 딸의 방에 들어가서 운다고 하지요,

골목대장도 딸 밖에 없으니, 모두 떠나버리면 허전해서 어찌 살까..

아마, 박 영효 님처럼, 엉켜진 지난 추억의 실타래를 하나 하나

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Forever - Giovanni Marra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