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앉아서만 지내야 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른쪽 유방암이 폐에까지 전이가 되어 자리에 누우면 암
덩어리가 압박을 가해 통증이 생겼고 또 숨이 가빠져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 팔은 암으로 인해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늘 저리고
아팠고 더구나 부종이 심해 손등에서는 물이 배어 나왔습니다.
근 한 달을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깜빡 잠이 들어도 앉은
상태에서 머리를 배꼽까지 숙인 상태에서 자야 했습니다.
그 불편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본인에겐 제일
편한 자세라고 했습니다.
꽃마을에 들어온 첫 날 다행히 통증이 잡혀 잠이 들었는데 무려 5시간을
앉은 상태에서 꼼짝 않고 내리 자기만 했습니다. 자식 말로는 지금까지
이렇게 곤하게 주무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분의 삶은 정말 기구하다 못 해 가슴이 아팠습니다.
경남에서 5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이 자매는 어머니의 성품을 이어 받아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성격으로 남과 다투거나 해를 끼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조금 손해 보는 것이 마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할 정도로
착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계모 슬하에서 자란 남편을 만나면서부터
이 자매의 불행이 시작되었는데....
결혼생활 동안 따뜻한 말 한 마디 다정한 표현 한번 받아보지 못했고
외출할 때 입을 만한 변변한 옷조차 한번 얻어 입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너무나 어려워 부업이다 공장 일이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나갔는데 그래도 그 고생을 견디고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와 희망을 온통 두 아들에게 걸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 역시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들만 하고 다녔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자가용 사달라, 사업을 해야 하니 돈을 얻어 달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속에서 빚더미만 자꾸 늘어났습니다.
가뜩이나 남에게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늘어만 가는 빚더미는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고 길을 가다가도 눈물을 흘리는 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몸에 이상을 느끼면서 혹시 암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설마 설마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암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암 보험을 타서 자식이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제발 암이길 바라면서 암을 키워 나갔습니다.
물론 가족에게는 비밀로 하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던 날
의사로부터 유방암 4기말이라는 진단과 함께 너무 늦어 수술을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암 보험을 타서 자식이 진 빚을 갚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 빚을 갚은 셈입니다.
처음 이상을 느꼈을 때 초기에 치료만 했어도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자식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
놓기로 하고 암 덩어리를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자식이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만 한다면......하는 마음으로,
임종이 가까워올 무렵에 이 자매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이 많이 밉지요?” 하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미움이 큰 것은 그만큼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게 때문
이라는 것을 압니다.
미운 만큼 자식들이 잘 되도록 기도 많이 하실 거죠? 자식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은 엄마의 마음을 하느님이 보셨으니까 이 제 그 마음을
마지막으로 자식과 남편을 위해 내어놓고 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과 자식들이 복을 받을 수가 있어요. 암을 키워가면서까지
보여주었던 그 헌신적인 사랑의 대가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 용서하고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매님의 그 괴로운 마음은 천국에
가시면 하느님께서 다 보상해 주실 거예요.”
자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면서 퉁퉁 부은 손을 간신히 들어
십자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임종이 가까이 올
무렵 혼수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똑바로 누울 수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통증이 없었기에.
자식을 위해 암을 키웠던 한 엄마의 애절한 사랑은 이렇게 해서 59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무지막지한 암 통증, 기대에 어긋났던 자식들에 대한
미움과 남편에 대한 원망을 모두 가슴으로 끌어안고 가셨습니다.
사랑했고 또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모정을 남겨둔 채......
<청주교구에 계시는 박창환 신부님의 호스피스 일기를
계속하여 올려드립니다.
연재를 해 주시는 분은 가톨릭 인터넷의 박영효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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