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33) – 정을 떼려고 2.

주님의 착한 종 2007. 10. 4. 10:33

 

정을 떼려고...2

 

그때부터 공사판 막일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이것저것 돈 되는 거라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동안 속이 많이 상할 때마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 4개월 전부터 남편이 속이 안 좋다고 하면서 혼자 병원에 가끔씩

다녀오곤 했습니다. 병원에 갔다 와서도 그냥 위장병이라고 하면서

약만 먹으면 된다고 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남편은 자신이 간암 말기라는 것을 판정을 받은

뒤였어요. 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서 충격을 받을까 봐 말을 안 했던

것이죠. 그런데 피를 토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얼굴이 노래지면서

낌새가 이상해서 추궁을 하니까 그제서야 말을 하더라고요.

 

사실 병원에선 간암이라고 하는데 걱정하지 마.

난 살 수 있어. 당신하고 어린 새끼들 두고 나 혼자 갈 것 같아?

걱정 하지 마.

그때는 정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로 들렸습니다.

뒤늦게 항암 치료다 뭐다 해보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다만 죽기 전에 통증이라도 없게 해주려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다른 사람 소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 남편 아프지나 않고 있다가 가게 해주세요......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남편과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부싸움 한번 안 할 정도로

저에게 잘해주었지요.

 

남들 얘기로는 아내에게 끔찍할 정도로 잘해주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매일 우는 저를 오히려 위로해주었고,

내가 없어도 이렇게 살면 돼, 저것은 이렇게 하고 이것은 또 어떻게

하고, 하면서 그렇게 자상하게 자신이 죽은 다음 살아가야 할 방법까지

다 가르쳐줄 정도로 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꽃마을 오기 며칠 전부터 그렇게 구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도 못 자게 하고, 쉬지도 못 하게 하고,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괴롭혔어요.

왜 그렇게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다음날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내를 많이 사랑하시죠?

 

“예”

 

“그런데 여기 오시기 전부터 많이 구박을 하셨다면서요?

지금까지 잘해주시다가 갑자기 왜 그렇게 구박을 하셨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하긴 오해할 만도 할 거예요.

사실 정을 뗄라고 그랬습니다.

아내가 마음이 너무 착하고 여리기 때문에 나 죽고 나서 많이 울지 말고

독하게 살라고 일부러 그랬습니다.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는데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남은 시간이라도 마음 아프지 않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시고

일부러 정을 떼지 않아도 잘 살 거니까 잘해주세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시겠죠?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아내가 저한테 속상한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자기 시누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가 살아 있을 때

언니에게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다면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여동생 얘기로는, 오빠가 성모꽃마을에 오기로 하고 서류를

준비하는 동안에 자기(여동생)를 부르더니 현금 100만원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돈이냐고 하니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이 돈을 꼭 써다오.

 내가 투병생활을 하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까 좋은 일을 한

기억이라고는 없는 것 같구나.

오로지 앞만 보고 돈을 벌기 위해 뛰기만 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 앞에 가서 설 것을 생각하니 내세울게 없단다.

 

100만원은 집사람이나 자식들에게 꼭 필요한 돈이지만 내가 죽거든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쓰도록 하고 집사람에게는 비밀로 해라,

고 해서 이 돈을 맡아놨는데

나중에 알면 언니가 속상해 할까봐 미리 얘기를 한다고 하더랍니다.

 

아내는 순간 그 얘기를 들으며 묘한 심정에 사로잡혔다고 했습니다.

나를 못 믿어서 그런 건가? 나를 주면 다 써버릴 것 같아서 그랬나?

별 생각이 다 들면서 속상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겨 말씀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자매님! 남편이 부인을 못 믿어서 100만원을 동생에게 맡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편도 집 사정을 뻔히 알 겁니다.

없는 살림에 먹고 살아야지, 자식들 둘을 학교에 보내야지, 병원비

내야지, 비싼 진통제 들어가지, 빚도 갚아야지, 아마도 그 돈을 부인에게

줬더라면 그 돈 100만원 게눈 감추듯이 없어졌을 겁니다.

 

단 돈 1000원이 아쉬운 판에 현금 100만원이면 꽤 큰돈인데 그 돈을

동생에게 맡겨둬야 나보다도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남편의 그 좋은 뜻이 희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겁니다.

 

 결코 남편이 아내를 못 믿어서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남편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두 자녀의 아빠로서

평생을 두고 해야 할 몫을 단 한 번에 다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치를 둬야 할 것은 돈을

벌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도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고

도와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요즘처럼 억, 억 하는 시대에 돈 100만원 우습게 알 수 있겠지만

이 집에서 현금 100만 원이면 전 재산과 같은 큰돈인데 그 돈을 불쌍한

사람을 위해 쓴 것은 아이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일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0만원보다 훨씬 더 큰 교육을 자식들에게 몸으로 보여줬습니다.

남편의 이 훌륭한 행동을 자식들이 잊지 않도록 오래오래 두고두고

얘기를 해주셔야 돼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남편의 행동을 보고 남편이 세상을 살면서

자식들에게 해줄 몫의 10배를 자식들에게 은총으로 갚아줄 겁니다.

 

자매님의 아이들 잘 살 겁니다.

남편이야말로 마지막 죽음을 멋있게 장식하는 겁니다.

 

“신부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정말 그러네요. 남편이 마지막까지 감동시키고

가네요.

 

모처럼 아내의 입에 웃음이 묻어났습니다.

                                                   

<청주교구에 계시는 박창환 신부님의 호스피스 일기를 

 계속하여 올려드립니다.

 연재를 해 주시는 분은 가톨릭 인터넷의 박영효 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