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1) - 전과 20범 1회

주님의 착한 종 2007. 8. 29. 09:10

호스피스 일기 (1)

 

박창환 신부님의 <호스피스 일기> 전과 201

 

암환자가 매년 6만 명이 죽어가고 있으며 그 중에서 2%만이 호스피스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청주 꽃마을(말기 암환자들의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 봉사의 집)

의 박 창환(가밀로)원장 신부님의 호스피스 사목일기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제2기 고급과정의 호스피스 교육을 수료하였습니다.

 

이 글은 재미로 읽히는 것보다는 아픔에 같이 동참 한다는 기분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몸만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의식이 또렷한 가운데 마음까지도 아픈

상처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이 가슴속에 응어리 진 한을 풀고서 임종을 잘 준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전과 20 - 1

 

 어느 날 교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살다가 위암에 걸렸는데 가망이 없으니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도관들과 함께 찾아온 환자를 보니 인상이 무척이나 험악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머리에 뿔만 달아 놓으면 마귀 같다고나 할까,

풍기는 냄새가 좋지를 않습니다.

오죽하면 이 환자가 처음 왔을 때 봉사자들이나 다른 방의 환자들이

무섭다고 피해 다녔을 정도였으니까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사실 나도 접근하기가 께름칙할 정도였으니......

한마디로, 살아온 험난한 인생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습니다.

왜 그리 험한 얼굴이 되었는지 그 사연을 알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밖에 모르시던 아버지가 도박에 빠지면서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해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정에 대해서 무능하고 관심을 안 갖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커져갔고 그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늘어만 가는 가운데

학교는 고사하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산으로, 들로, 친구 집으로 놀러

다니다가 결국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어머니가 행상으로 마련한 조그만 식당에서 일을

거들어주게 되었는데 하루는 술에 취한 손님이 어머니에게 갖은 욕설과

행패를 부리는 것을 목격하고 손님과 싸움이 붙어 실컷 두들겨 팼는데

이 일로 경찰서와 교도소라는 곳을 드나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교도소에 가서 잘못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온갖 악을 배웠고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담력과 배짱만 늘었습니다.

 

 그 이후로 술만 마시면 아무하고나 싸우는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사회에 대한 분을 해결했습니다.

그러니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고 전과 20범이라는 딱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운동도 했는데 합기도와 유도를 배워 합이 6단이나 되었다고

하니 덩치는 크고, 운동도 했겠다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마음을 잡고 결혼도 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이 후로 6명의 여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살다가 헤어지는 반복을

거듭했습니다.

어떤 여자는 길어야 2, 짧게는 1달 만에 살다가 헤어지기도 했다는데,

한번은 같이 살던 여자 중에 하나가 서울로 가서 딴 남자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냥 살면 될 일을 이 남자에게 와서 이제부터 이 사람하고 살 거니까

그리 알라고 하는 바람에 격분한 나머지 싸움이 붙게 되었습니다.

본인 말로는 같이 온 남자를 한 대 때렸는데 그 자리에서 뻗더랍니다.

 

또 여자도 홧김에 배를 한 대 쳤는데 쓰러지더니 병원에 가는 도중에

죽어버렸다고 했습니다.

한꺼번에 둘을 죽이고 또 철창신세를 졌고, 한번은 동네 사람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또 살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인생 이력서에는 살인 3, 수 없는 싸움질과 폭력,

폭행 등 전과 20범에 무기징역이란 낙인이 찍혀 가족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채 교도소에서 썩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이 지은 죄의 업보였는지 위암에 걸렸고 교도소에서도

더 이상 감당을 할 수 없게 되자 형집행정지 명령을 내리고 교도소

밖으로 내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죄인은 나가봐도 더 이상 죄를 지을 처지도 못 되는 중증의

환자이기 때문에 나가도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수소문 끝에 성모 꽃마을로 오게 되었는데 

꽃마을에 와서도 참으로 많은 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평생 하던 짓이 깡패 짓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모든 자원봉사자들 알기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도대체가 고마워하거나 어려운 게 없었습니다.

자기 맘에 안 들면 성질을 버럭 내고 자기가 문을 열고 싶으면 열어야

하고 닫고 싶으면 닫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방에 있는 환자들하고도 싸움이 났습니다.

조상 중에 싸움을 못 해서 안달하다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이 환자하고

부딪치는 사람은 반드시 갈등이 생겼고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나한테 덤볐다가는 쫓겨날 테니까....

그야말로 사람 봐가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 사람을 하루 이틀 겪으면서 느낀 것은 그야말로 악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심지어 어머니 얘기가 나오면 불여우 같은 년이라고 욕을 했고

형제들 얘기가 나오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욕을

해댔습니다.

 

교도소에 드나드는 동안 가족들은 형에 대한 미움이 넘어서서 빨리

뒈졌으면 좋겠다. 차라리 교도소에서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고 이 환자는 만나기만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가족들에게

저주에 가까운 미움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형이란 자가 어려서부터 5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구실을 못 하고 개망나니 짓을 해왔으니

안 미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화번호가 바뀌어도 알려주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지경인지라 이 사람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 싶어

작전을 짜야 했습니다. 죽기 전에 최소한 가족들과는 화해하도록 해야

하겠고, 자기가 때려죽인 영혼들에 대해서도 최소한 미안한 마음이라도

갖고 죽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자한테 집 전화번호를 물으니까 가르쳐주는데 옛날 전화번호였습니다.

2년이 넘도록 가족들과 한 번도 전화통화를 한 적도 없었고,

집에서도 면회를 간 적도 없었고,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니 통화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전화국에 수소문을 한 끝에 집을 찾을 수가 있었는데

남동생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뭐 하는 곳인데 지금 당신 형이 말기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고 이제 길어야 두 세 달밖에 못 사니까 한번 와서 방문 좀 하고,

만나 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전후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대뜸 하는 얘기가

“뒈지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못 간다. 죽으면 연락해라. 우리 집에선

이미 포기한지 오래다.”하고 신경질적으로 얘기를 합니다.

형 얘기만 나오면 전후 사정 안 가리고 적개심부터 드는가 봅니다.

그래서 나도 “뒈질 날 얼마 안 남았으니까 오라는 것 아니냐.”하고

소리쳤습니다.

기선을 놓치면 그나마 전화통화도 못 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동생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 동생이 형을 굉장히 무서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이 덩치도 좋고 운동도 합이 6단에, 싸움도 잘 하지 사람도 몇 명 죽인

경력이 있지, 혹시라도 자기들한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상태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 죽일 형편도 안 되니까 빠른

시일 안에 찾아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설득을 했더니

이번 일요일 날 찾아오겠다.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계속 이어짐>

 

<청주교구에 계시는 박창환 신부님의 호스피스 일기를 

계속하여 올려드립니다.

연재를 해 주시는 분은 가톨릭 인터넷의 박영효 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