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이듬해 남자 쌍둥이를 낳고
그 뒤로 딸 넷을 더 낳았다.
똥장군 지고 떼 밭을 일구며 악착같이 살았지만 해가 갈수록
딸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
“애기들이 학교에 들어간께 증말로 힘들었어라.
이 집 저 집 돌아댕김서 한 푼 두 푼 꿔가며 학교에 보냈는디,
전에 꿔간 돈이나 얼른 갚으라고 문전박대 할 때는 그 집 대문에
쭈그려 앉아 눈물 한 바가지는 쏟았지라.
울 아들놈들 학교는 보내야 쓰겄는디…. 참말로 많이도 울었소.”
첫째와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 들어간 뒤엔 양말장사, 생선장사, 김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장사가 잘 된 날이면 명태라도 사오고, 안 된 날이면 콩나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다짐했지라.
우리 자식 같은 애기들이 어딘가에도 분명히 있을 것인디,
내가 꼭 돈 모아서 그 애기들 눈에 닭똥 같은 눈물 흘리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는 22년 전부터 한 푼씩 돈을
모았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생기면 모았다.
가을에 벼 수매를 하면 조금 더 모았다.
“먹을 것도 안 먹고 허고 싶은 것도 못험서
손에 다만 몇 천 원이라도 모아지면 갖다
그냥 (통장에)넣어버리고 넣어버리고….”
1987년 우체국 자유적금에 가입,
할아버지한테도 알리지 않고 한 푼 두 푼 모은 게
얼마 전 1천만 원이 만들어진 것.
함평군청을 찾아가 인재육성장학금으로 써달라며 1천만 원을 주고 온
그날 저녁.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22년 만에 고백을 했다.
“우리 자식들 옛날 생각해 내가 얼마 모아서 어디다 갔다 줬어라”
했더란다.
그 말 들은 할아버지,
“당신이 한 푼 두 푼 모았당께, 당신 알아서 쓰소”
하더란다.
그 액수가 얼마인지, 어디다 줬는지 묻지도 않았다. …
그리고 단 둘이 있는 방에서 업어줬단다.
집에 불이 나고 연탄가스에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새 집을 지었을 때
업어주고, 이번에 두 번째 업어주었다는 게 할머니의 귀뜸이다.
이돈삼 | 월간 <전라도닷컴> 2007년 3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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