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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꾸라지와 꼴뚜기 그리고 망둥이

주님의 착한 종 2007. 4. 13. 10:04

미꾸라지와 꼴뚜기 그리고 망둥이

 

옛날 조선시대 동대문 밖(지금의 신설동, 안암동, 제기동, 용두동, 청량리 일대)은 크고 작은 냇물이 흐르는 평야지대와 습지로서 비옥한 논과 미나리깡 사이로 드문드문 인가가 있는 평화로운 농촌이었습니다.

도성(都城)과 가까운 곳에 논밭이 많으니 태조 임금님 때부터 동대문 밖   제기동(지금의 종암 초등학교 앞)에 풍년 들기를 기원하던 선농단(先農壇)을 만들고 경칩 뒤의 첫 번째 해일(亥日)에 제사를 지낸 뒤 왕이 친히 논 밭을     가는 ’모범’을 백성들에게 보였습니다.

 

 선농단에서 제사가 끝나면 소를 잡아 큰 가마솥에 넣어 국을 끓이고,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어 농부들과 구경 나온 노인들에게 대접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맛있게 먹는 설렁탕이라는 이름은 선농단에서 끓인 국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 되었고 다시 설롱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후 1896년 11월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장례를 치른 고종황제께서       청량리에 있는 황후의 능 홍릉(洪陵)으로 자주 행차하니, 그 행차 때마다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을 거느림으로써 그 경비가 만만치 않자 미국인 콜부란 등의 건의를 받아 들여 전차 선로를 부설하고 전차를 운행하게 되었습니다.    전차의 운행으로 임금님의 행차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이용하게 되니        그 인기와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동대문 밖 신설동 일대에 경마장이 생겨 전차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자, 그때까지는 삼삼오오(三三五五) 친한 사람들

끼리 시냇물과 논두렁에서 천렵삼아 미꾸라지를 잡아 미꾸라지 국(추탕  鰍湯)을 끓여 먹으며 즐겼었는데, 자연발생적으로 추탕을 끓여 손님들에게 파는 집이 생겼으니 그 이름도 정겨운 신설동 경마장 옆의 형제추탕과 용두동의 곰보추탕의 유래입니다.

 

 1930년대 초에 생겨 대를 이어 성업 중인 두 추탕집 가운데 곰보추탕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고 형제추탕은 미아삼거리로 옮겨 다시 이름을 얻고 있습니다. 두 추탕집이 동대문 밖 미꾸라지 산지에서 영업을 시작했는가 하면 같은 시기에 용금옥은 성문(城門)안 번화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통째로 넣는 것이 특색인 서울식 추탕은 그래서 추어탕이라 하지 않고 추탕이라고만 합니다. 서울식 추탕은 얼큰하고 구수하며 비린내가 없는 담백한 맛입니다. 이 맛에 길들은 사람들은 미꾸라지를 갈아 넣고 끓여 내는 추어탕의 맛은 맛으로도 치지 않습니다. 1970년대 초 남북적십자회담 때 북측 대표로 참석했던 남한 출신의 박성철 부주석은 "용금옥의 추탕맛이 아직도 예전 같습니까?"하고 우리측 대표에게 물었다고 하는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이렇듯 영양 많고 구수한 추탕의 원재료인 미꾸라지는 한자로는 추어(鰍漁) 또는 이추(泥鰍)라 하며 몸길이 약 20Cm의 잉어과의 민물고기입니다. 주로 진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사는데 모기의 유충인 장구벌레를 특히 좋아합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미꾸라지 한 마리가 하루에 1,000마리의 장구벌레를 먹어 치우는 살아있는 살충제(殺蟲劑) 라고 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시냇물을 흐린다."라는 좋지 않은 뜻의 속담이 있지만 미꾸라지가 먹이를 구하려고 시냇물 바닥을 꿈틀거리며 파고 들어 물을 흐리게 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흐려졌던 시냇물은 얼마 후면 다시 맑아질 것이고, 영양이 풍부한 개천 바닥을 휘저어 놓아 다른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