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헌 님의 실패담 04 – 재창업, 희망, 절망, 폐업
이 글은 정대헌 회원이 중소기업청과 한국경제신문이 주최한
제2회 창업성공 및 실패수기 공모전에서 실패부문 노력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건넜더라면…’
-이렇게 창업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여보,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고 동고동락했던 직원들이 모두 떠나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아내가 제일 가슴 아파했다.
지치고 꺾인 내 어깨를 쓸어 내리면서 아내는 조심스럽게 ‘이제 그만
두자’고 설득해본다. ‘프로그래머도 나가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떠나야 사장님이 그만 둘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전하는
것이었다.
1년 넘게 날아보려고 발버둥치며 노력했지만 나는 날아보지도 못하고
고작 제자리에 추락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내가 부족한 탓이며
준비 없이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원인이라고 가슴을 쳤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건물 지하에는 사우나가 있었다.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곳에 가서 물 속에다 많은 고민을
함께 풀어놓는다. 그러면 복잡한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지곤 했다.
모두 떠나고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았을 때, 다른 회사의 개발자로 있던
친구가 밤마다 찾아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 분야에서는 처음부터
고민을 나누던 유일한 친구였다.
이제 남은 방법은 여기서 사업을 정리하든가, 아니면 새로 사람을 뽑아
처음부터 다시 개발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친구는 내 자금여력과 향후 자금확보 방안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있는 그대로 현재 남아있는 자금은 없으며 앞으로 융통 가능한
자금의 액수와 조만간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5천만 원의 대출을
받기 위해 보증신청을 해둔 상태라고 말했다.
다시 친구는 “꼭 해야 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어떻게 준비한 사업인데…”라고 답하였다.
공교롭게도 그때 사무실로 특허출원서가 도착했다.
(게시판의 맞춤페이지 구성을 이용한 실시간 광고방법 및 시스템,
출원번호 2002-67252)
우리는 두 번째 방법으로 새로운 사람을 뽑아 다시 개발을 시작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힘들겠지만 시행착오를 밑천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면 2개월 후에는 사이트 오픈이 가능할 것 보았다.
기운 없이 며칠을 보내던 내가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임신 5개월이던 아내는 그렇게 만류하던 태도를 바꿔 어디에서 구해
왔는지 내 손에 500만 원을 꼭 쥐어 주었다.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개 짓 하다
나는 곧바로 구인구직 사이트에 채용공고를 냈고 많은 지원자 중에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최적의 인원을 선발했다.
웹 기획자 1인과 웹 프로그래머 1인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웹 디자이너는 임시직으로 고용했다.
한번 부러진 날개로 이제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각오를
하며 다시 비상을 향한 날개 짓을 시작한 것이다.
새 직원들이 출근하면서 다시 열정을 쏟기 시작했고, 서로 머리를 맞대
최상의 기획안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하루에도
몇 번씩 회의하고 자료 찾고 개발하고 또 회의하는 과정이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중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기술신용
보증기금에서 보증심사를 나온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비전을 보여주었지만,
심사팀은 갑작스런 핵심기술 인력의 교체는 ‘회사가 불안정한 상태’
라며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그 당시 유일한 자금확보 방안이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이제 나는
진짜 빚 내서 개발을 진행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한없이 막막했다.
돈줄이 꽉 막혀 낙심하고 있는 나에게 새로 들어온 직원들은 ‘월급
안 줘도 일 할 테니 용기를 내라’며 오히려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해준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옴부즈닷컴, 드디어 세상에 문을 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밤낮 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했다. 그렇게 하기를 두달 여,
약간 늦었지만 2002년 1월말에 시범 서비스를 오픈할 수 있었다.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없던 사이트에 하나씩 컨텐츠가 채워지고 그것들은 각각의
생명력을 가지며 필요한 정보수요자에게 제공되기 시작했다.
아직 어설프고 완벽하지 않았지만, 오류를 잡고 보완하면서 점점 여론
컨텐츠가 모이는 사이트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랜드 오픈을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눈에 보였다.
순위사이트에서 5-10위권으로 수직 상승하다
우리는 유저 인터페이스를 전면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추가
개발을 하기로 했다. 다시 채용공고를 내고 웹 디자이너 1인과
인터넷신문 편집기자 1인을 더 채용했다.
이번에는 일간지에서 보도하는 여론조사 기사를 체계적으로 DB화하고,
동일한 리서치보고서에 대한 매체 별 보도방식을 비교 분석하는
자체기사를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준비하며 4월말에 2차 개발을 완료했고,
그때부터 홍보 마케팅도 확대해 나갔다.
아내는 그 시기에 딸을 출산하였는데 생명의 탄생은 좋은 소식을 함께
가지고 왔다.
방문자와 가입회원이 늘기 시작했고, 컨텐츠가 쌓이면서 고정 방문자
수도 늘어났다.
여론에 민감한 주요타깃 관계자들이 속속 우리 사이트에 들어와
정보를 검색하고 있었다.
웹사이트 순위평가 사이트인 100HOT과 랭키닷컴에서 ‘옴부즈닷컴’은
수직상승하며 인터넷신문 분야 5-10위권에 진입하고 있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지만 모든 것에서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가능성’일 뿐, 결정적으로 가시적인 수익모델이
나오지 못했다. 수익이 나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했다.
유망한 인터넷 기업들도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줄줄이 문 닫고
떠나가는 이 전쟁터 한복판을 건너 오면서도 나는 왜 수익모델 만드는
데에 실패하고 만 것일까?
어디 ‘돈’ 좀 없어요?
아, 너무 목이 말랐다.
1년 반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건만, 이제 겨우 해볼만한 상황인데
나에게는 돈이 너무 없었다. 기존의 대출들도 단기 연체가 시작되었고
더 이상 빌릴 곳도 없었다.
수익도 없이 빚에 쪼들리는 회사에 누구도 정책자금 보증서를 발급해
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당장 긴급한 수혈이 필요하였기에 나는 알고 있는 모든 투자자들을
만나러 다녔고, 무턱대고 선배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결국 아무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누구도 인터넷 기업에 투자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다시 월급날은 돌아왔고, 나는 명동 사채시장에 가서 법인카드로
고리의 이자를 떼고 돈을 만들어왔다. 이제 터지는 것은 시간 문제,
한 두 달이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준비를 해야 했다. 옴부즈닷컴을 살리고
이 직원들이 계속 근무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찾아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절박해져 갔다.
어느 일요일, 사회에서 인연을 맺어 친하게 지내던 형님의 가족과 함께
성산동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드리던 날, 성체를 모시면서 얼마나 펑펑
눈물을 쏟아놓았는지, 너무도 간절히 기도했다. ‘
주님, 제발 옴부즈닷컴을 문 닫지 않게 도와 주세요…’
막다른 길에 서서, 회사를 정리하다
7월이 되면서 금융기관의 독촉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직원들에게는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나는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돈 한 푼 없이 여기까지 끌고 온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에게 6개월만 더 시간이 허락한다면, 누구라도 옴부즈닷컴을 인수해서
계속 사이트를 운영할 수만 있게 된다면…
그러나,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도 끝나고 말았다.
딸의 100일 잔칫날, 지방에서 부모님이 올라 오시고 친지들이 모여
축하하고 기뻐하는 자리였지만, 내 어깨는 한없이 버겁기만 했다.
젖내 나는 딸을 부둥켜 안으면서 ‘이제 서서히 정리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데 딸이 대신 울어준다.
아내는 말없이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말하고 침통한 분위기에서
향후 옴부즈닷컴의 진로에 대한 대책 없는 회의를 하였다.
이제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동안 옴부즈닷컴(주)에서 근무한 모든 직원들에게 부족한
사업가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가슴에 안고, 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떠나야 했다.
아내와 100일된 딸을 남겨두고 고향으로 혼자 내려오던 밤,
난데 없는 생이별 앞에서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침착할 수가 없었다.
어둠이 내린 단칸방에는 몇 시간째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영문도
모르는 우리 딸아이도 덩달아 함께 울었다.
나는 그날 밤의 아픔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그 후 2년 동안 ‘사랑하며 살아가기’
혼자 남아있던 아내는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1달 후에 이사 짐
트럭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이 지역에서만
벌써 세 번째 집이다.
사업을 정리한 다음 나는 지방에서 조경사업을 하시는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현장 일을 3년째 하고 있다. 차라리 몸이 으스러지도록 노동을
하는 게 훨씬 편했다.
따지고 보니까 실제 사업을 했던 2년의 세월 동안 모두 1억5천만 원
정도의 돈이 투자되었다. 그 중 1억 원 정도는 고스란히 아내와
내 빚으로 남았는데, 우리는 다행히 사채는 이용하지 않고 은행권과
여신금융권에서만 자금을 조달했으므로 열심히 일하면서 하나씩
갚아나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은 정부에서 개인신용 정책을 새롭게 적용하던 때라
금융기관들은 강도 높게 연체관리를 했으며 신용카드사들은 일시에
한도를 축소했다. 나는 부채상환 계획을 세울 겨를도 없이 여기 막고
저기 막고 또 터지는 것을 막아나갔지만 신용불량자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내는 딸을 놀이방에 맡기면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나도 제한된 수입으로는 버틸 수 없었기에 낮에는 몸으로 일하고
밤에는 부업으로 대리운전 기사를 하며 치열하게 살아갔다.
단돈 5만원이 없어 딸아이 분유 값, 기저귀 값에 발을 동동 구르던
때에도, 조경일 끝내고 곧바로 대리운전 일하러 가서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돌아와서도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때에도,
하루 수십여 통의 카드사 빚 독촉에 시달리던 때에도,
나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힘을 얻곤 했다.
“아무도 우리 신랑 뭐라고 하지 마세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제대로
다리 뻗고 잠 한숨 못 자며 피 울음 흘린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2년 가까이 몸부림치며 살아온 끝에 신용회복위원회로부터
개인워크아웃 승인을 받아 급한 불이 꺼지고 서서히 생활에 안정이
찾아오고 있다.
결혼 후 신혼단맛도 모른 채 여기까지 뒷바라지 해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은, 내 인생의 ‘귀인’이기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에필로그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말처럼 ‘값진 고생’을
사서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종착역 없는 열차’를 마음대로 운전하다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차에서 내렸다. 처음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훨씬 험난했다. 나처럼 쓸쓸히 돌아오던 사람들 중에는 영영
제자리로 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가혹한 세월을 보내면서 내가 발등 찍으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던 것은,
‘창업’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부딪쳐야 했던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의사
결정권자인 내가 내렸던, 최선이 아닌 때로는 ‘차차선의 선택’들이
쌓이면서 스스로 함정을 파고 빙둘러 가야 했기에, 내가 내렸던
‘잘못된 결정’들을 일일이 후회하고 있었다.
한번 단추를 잘못 채웠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제대로 채우려 해도
이미 내 손에 있는 것은 ‘최선의 단추’가 아니었다.
그럴 때는 잘못된 지점을 찾아 새로 채워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데,
창업자는 ‘그 때’를 놓치면 안 된다.
그 때를 지나 너무 멀리 가 버리면 ‘풀고 새로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게 되며, 거기서 더 진행해 버리면 ‘단추 채우는 일’ 마저
멈춰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는 모든 미련 버리고 털어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나는 2년 동안 내 마음대로 사업을 하였고, 다시 2년 동안 내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며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지금 내가 깨우치고 있는 교훈들은 2년 전 사업을 접을 시점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창업 실패 후 나는 깊은 통찰과 인내의 시간을 가지며 비로소
인생의 소중한 자산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창업하기 전에 이 교훈을 나누어 성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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