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을 이해하는 열가지 核心 |
중국인은 한마디로 대륙적이다.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우리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다. 여유만만하고 스케일이 큰 특징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을 의심하고 여간해서는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또 의외로 축소지향적인 측면도 엿보인다, 과연 중국인은 누구인가 ? 그들의 참모습을 속속들이 파헤쳐본다.
1. 만만디(慢慢的)
중국사람을 두고 흔히들 「만만디(慢慢的)」라고 부른다. 「느릿느릿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사람」하면 먼저 「느리다」는 느낌부터 드는게 사실이다.
약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모 일간지의 기자가 쓴 기행문을 읽었는데 중국사람들은 워낙 느려서 소나기를 만나도 뛰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후에 알고 보니 중국사람들이 느리기는 해도 그 정도로 느리지는 않았다. 그들도 비가 오자 뛰었다. 아마도 재미있게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국인들이 느린 것은 사실이다. 물론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여유를 시간과 공간 두 분야로 나눈다면 만만디는 시간적인 여유를 뜻한다.
중국은 넓다. 남북한을 합한 한반도의 약 44배나 되는 땅이다. 넓은 땅에 살다 보니 자연히 국민성도 영향을 받게 되어 서두르지 않는다. 또 서둘러서 될 일도 없다.
옛날에는 인간관계도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동네안에서 모든 생활이 이루어졌으며 기껏해야 이웃 동네 밖을 넘지 않았던 것이 그들의 행동반경이었다. 그들에게 백리 길을 간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인공위성을 타고 달라나를 다녀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쓰촨(四川)성에 사는 사람은 평생을 걸어도 바다를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교들은 모두가 바다를 끼고 있는 지방 출신들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만주벌판이라고 알려져 있는 동북(東北)평원에 사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산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하기 십상이다.
중국에서도 쓰촨의 나뭇꾼은 여유만만하기로 유명하다. 나무를 해서 살아가는데 우리처럼 시장에 지고 가서 파는게 아니라 아예 땟목으로 만들어서 양쯔(揚子<양자>)강을 타고 상하이(上海<상해>)까지 내려가면서 판다. 무려 5천KM의 대장정에 나서는 것이다. 한 반년쯤 나무를 해서 땟목을 만들며 아예 땟목위에다 집을 짓고 채소까지 심는다. 그뿐인가 ? 닭과 오리도 몇마리 실으면 병아리를 까고, 병아리가 다시 병아리를 깐다. 이 때가 되면 땟목도 얼마 남지 않고, 닭만 잔뜩 불어나 있다. 상하이에 도착하면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한번의 장정에 족히 3년은 걸린다. 쓰촨의 나뭇꾼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
그래서 「천천히」라는 말은 거의 일상용어가 되어 있다. 여간해서 서두른다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가 「만쪼우」(慢走<만주>: 천천히 가세요)이며, 식당에서 요리를 내오면서 하는 말이 「만만츠」(慢慢吃<만만흘>: 천천히 드세요)다. 어쩌다 부탁받은 일을 약속날짜까지 못했으면 상대방은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이 꽌시! 만만라이」(沒關係 慢慢來<몰관계, 만만래>: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물론 그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서두르기도 한다. 그때 쓰는 말이 「마샹」(馬上<마상>: 측시)이다. 우리말로 「즉시」이기는 하지만 그 어원을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옛날에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 말(馬<마>)이었다. 「마샹」은 지금 출발하기 위해 말 안장 위에 앉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제 더날지도 모르고 또 얼마나 빨리 달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샹」도 우리가 보기에는「한참 뒤」쯤이 된다.
2. 차 뿌 뚜어 (差不多<차부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말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나라 사람들의 국민성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그 대표적인 말이 바로 「차뿌뚜어」(差不多<차부다>)다. 아마 그들의 일상용어에서 이 말만큼 자주 사용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말 뜻은 글자 그대로 「차이가 많지 않다」, 「별 차이 없다」다. 좀더 쉽게 표현한다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두리뭉실한 면을 말하는데 바로 중국사람들의 애매모호한 국민성을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사실 중국사람들의 특징이 행동에서 「만만디」라도 한다면 思考(사고)에서는 「차뿌뚜어」다. 무엇을 평가하거나 어떤 상태, 또는 기분을 나타낼 때 그들은 구체적이고 간단명료하기보다는 함축적이고 포괄적이다. 이것을 모를 때 당황하는 수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미술작품을 두고 어떠냐고 물었을 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을 때 그들은 「차뿌뚜어」라고 말한다. 지금 배가 고프냐고 물었을 때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면 그것은 고프기도 하고 안고프기도 하다는 뜻이다. 사업하는 사람보고 『요즘 재미가 어때요』라고 물었을 때 거의가 「차뿌뚜어」라고 대답한다. 심지어 그들은 한국사람과 중국사람도「차뿌뚜어」라고 말한다.
필자가 국립대만사범대학 석사반을 다닐 때 中國詩學(중국시학)이라는 강좌가 있었다. 할아버지 교수가 강의를 맡고 계셨는데 메주 七言律詩(칠언율시) 한 수를 지어오는 것이 과제 였다. 강의 시작 전에 평가를 받는데, 한참 훑어보시더니 하신다는 말씀이 「차뿌뚜어」였다. 「보통」이라는 뜻이다. 이러다보니「차뿌뚜어」는 듣는 사람에게는 보통 고역이 아니다. 특히 분명한 대답을 원하는 서양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들의 국민성을 알고 나면 그것처럼 편리한 단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의 경우에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고 싶지 않다거나 아니면 판단이 잘 서지 않았을 때 가장 무난하고 훌륭한 대답은 「차뿌뚜어」이기 때문이다.
『오늘 식사 어땠습니까』
『요즘 어떠세요』
『지금 가면 안 늦을까요』
『비싸지 않던가요』
『힘들었지요』
『일주일이면 되겠습니까』
『조금만 더 해 주세요』
중국사람들이 「차뿌뚜어」를 워낙 즐겨 사용하다 보니 유명한 후스(胡適<호적>)가 이를 비판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差不多先生<차불다선생>」은 따지기를 싫어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는 늘 말한다.
『세상만사란 차뿌두어면 돼, 뭘 그리 따지고 산단 말인가』
그래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별 차이가 없었다. 「十<십>」자와 「天<천>」자는 한 획 차이뿐이므로 마구 섞어서 썼으며, 흰 설탕과 누런 설탕은 다같은 설탕이므로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한번은 上海히(상해)에 가기 위해 기차역에 갔다. 기차는 8시 30분에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분이 늦었기 때문에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는 단2분을 기다려주지 않고 정시에 출발한 기관사를 이해할수 없었다.
『젠장, 30분이나 32분이나 차뿌뚜어인데, 내일 가지 뭐. 오늘 가나 내일 가나 차뿌뚜어 아닌가』
그가 급한 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하인이 불러온 의사는 불행하게도 의사가 아니라 수의사였다. 그래도 그에게는 다 같은 의사였으므로 별 차이가 없었다. 결국 그는 죽게 되었다, 가뿐숨을 몰아쉬면서 말한다.
『하기야 죽는 것과 사는 것도 차뿌뚜어 아닌가』
중국 사름들의 「차뿌뚜어」정신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원만한 성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유부단하다는 좋지 못한 평가도 있을 수 있다.
3. 메이 파쯔(沒法子<몰법자>)
살다 보면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는 수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중국사람들은 「메이 파쯔」(沒法子<몰법자>)라고 한다.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일종의 「체념」이다. 체념 뒤의 심리상태는 대가를 보상받지 못한데 대한 불만이나 원망,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데 대한 한탄과 후회등이 있을 수 있다. 그 다음은 어떤가. 좌절 또는 자포자기가 아니다.
중국 사람들은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대항하는 사람은 드물다. 해봐야 도리가 없으니 상황을 인정하고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참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참는다(忍<인>)는 말을 자주한다. 무조건 참는 것이 미덕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내는 신용과 함께 그들이 장사를 하는데 있어 가장 중시했던 덕목 중의 하나였다.
그들의 인내력은 유구한 역사와 배경을 자랑한다. 황허(黃河<황하>)는 중국민족의 발원지이자 문명의 산실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황허문명을 꽃피웠다. 따라서 중국사람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고향은 황허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숭상하는 색깔도 황색이다.
그러나 황허는 묘하게도 그들에게 문명과 재앙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문명이라는 화려한 선물을 준 대신 홍수라는 가혹한 대가도 요구했다. 역사상 황허는 수많은 홍수를 인간에게 안겨주었다. 엄청난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메이 파쯔다.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몰론 「참는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재앙을 안겨준 것으로 홍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만든 이른바 人災(인재)도 있었다. 전쟁이 그것이다. 梁啓超(양계초)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평균 2년반에 1년은 전쟁기간이었다. 인생의 3분의 1이상은 전쟁의 와중에서 살아야 했음을 의미한다. 전쟁 한번 겪지 않고 죽으면 복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역사를 「도륙의 역사」리고 했으며 중국사람을 戮民(륙민)이라고 했다. 「도륙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메이 파쯔일 수밖에.
천재와 인재에 시달릴대로 시달리며 살아온 중국사람들과 교제를 하다 보면 「메이 피쯔」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상대방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특히 우리같은 한국 사람들로서는 억장이 무너진다. 그러나 역시 「메이 파쯔」일 수밖에 없다. 그 말 속에는 「방법이 없으니 참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는 데는 이골이 나 있다. 臥薪嘗膽(와신상담)의 고사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바다. 보다 큰 목적이 있으므로 참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도 웬만한 불편이나 고통쯤은 참는 것으로 해결한다. 좀처럼 그것을 개선한다거나 불평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간해서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다. 철저한 포커 페이스인 셈이다.
외교나 상담을 할 때 중국사람을 만나면 상대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좀처럼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에게 감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감정이 일단 폭발할 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쉽게 흥분하고 가라 앉히는 우리와는 좀 다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나라 代宗(대종)때 차오 은(朝恩<조은>)이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세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무백관을 우습게 알았다. 한번은 천자를 모시고 강연을 벌였는데, 강연의 내용을 빗대어 평소 미워하던 대신 세 사람을 공격했다. 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왕진(王晉<왕진>)이라는 신하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위엔 짜이(元載<원재>)라는 대신은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차오 은이 중얼 거렸다.
『왜 욕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을까? 아무래도 위엔 짜이란 녀석이 마음에 걸리는데...?』
물론 후에 그는 위엔 짜이에게 죽임을 당했다.
4. 의심과 不信<불신>
흔히들 중국사람하면 신용의 대명사쯤으로 알고 있다. 사실이다. 그들은 신용을 중시한다. 그러나 한번쯤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과연 가들은 누구나 신용을 잘 지키는 것일까. 그리고 신용을 중시하지 않는 민족도 있단 말인가.
중국은 오래 전부터 신용을 중시해왔다. 孔子(공자)도 신용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심지어 그는 정치를 하는데 있어 위정자는 먹을 것을 충분히 준비하고, 군대를 가져야 하며, 신의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라고 했다. 먹는 것을 「하늘」처럼 여겼던 중국 사람들이었지만 신의를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의는 孝悌忠禮義廉恥 (효제충예의염치)와 함께 인간이 지녀야할 8가지 덕목중의 하나였으며 이중 하나라도 어기는 것을 군자의 커다란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추측할 수 있다. 즉 孔子(공자)가 신의를 강조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가 그만큼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신의의 반대는 불신이며 그것은 곧 의심을 낳는다. 그래서 신용을 중시했던 만큼 의심도 그만큼 심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옛날 춘추시대 鄭(정)나라의 武公(무공)은 호시탐탐 옆에 있는 胡(호)나라를 노렸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딸을 호왕에게 시집보냈다. 호왕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과연 호왕은 정나라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공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번은 무공이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어느 나라를 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꽌치쓰(關基思<관기사>)라는 충신이 호나라를 지목했다. 무왕은 사돈 나라를 어떻게 칠 수 있느나며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호왕은 더욱 정나라를 믿고 안심했다. 결국 무왕은 호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역시 춘추시대 宋(송)나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비가 와서 어느 부자의 담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들은 빨리 담을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똑같은 말을 옆집의 영감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밤 정말로 도둑이 들었다. 그러자 그 부자는 자기의 아들은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찬한 반면, 옆집 영감은 도둑으로 잔뜩 의심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은 어떤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 놓으면 천재지변이 일어 쓸어가 버린다. 다행히 이를 면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면 이번에는 가혹한 관리의 수탈이 기다리고 있다. 믿을 것은 하늘도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최초로 중국의 통일한 천자는 泰始皇(태시황)이었다. 이제 중국은 그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위업은 거저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피를 흘린 대가가 아니었던가. 어렵게 쥔 천하를 누군들 쉽게 내놓고 싶겠는가. 천년 만년 지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자니 믿을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자식도 못 믿을 판이니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천자치고 높은 베개 베고 편안하게 잘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신하는 어떤가. 천자의 총애를 다투다 보니 자연히 아첨과 시기가 뒤따랐다. 몰론 현명한 천자라면 시비곡직을 가릴 줄 알아야겠으나 역사상 그런 천자는 놀아나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신하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천자가 더 많았으며, 심하면 일부러 농간을 부추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하게도 했다. 그러니 신하들도 잔뜩 의심할 수 밖에.
통치자 계층에서 있었던 의심의 상징이 인질이다. 서로의 약속을 믿지 못해 사람까지 담보물로 삼았지만 그렇다고 신의를 꼭 지킨 것을 결코 아니었다. 정권을 위해서는 자신의 혈육도 희생물로 삼았던 경우가 많았다.
의심 또는 불신의 극치는 뭐니뭐니 해도 宦宮(환궁)이 아닌가 싶다. 궁중에는 많은 궁녀들이 있다. 그러나 남자도 있어야 했으므로 자연히 「일(?)」이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여인들이 아름답고 보니 그런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니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건의 재방을 根絶(근절)시켜야 했는데 방법은 글자 그대로 「뿌리채 뽑아 버리는」수밖에 없었다.
앞에 든 사례들은 대부분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있다. 도장이 그것이다. 옛날 공문서를 보낼 때 문서수발병이 행여나 내용을 뜯어볼까 「의심」스러워 사용했던 것이 도장인데 요즘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같은 관습은 우리에게도 전해져, 서양사람들이 간편하게 사인을 하는 반면 우리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믿는다. 그것도 부족하여 인감도장이 나왔다. 모두 불신의 상징인 것이다.
비행기 기내에서 만난 한 중국인 사업가의 말이 생각난다.
『같은 중국사람이지만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대만 사람은 그래도 좀 단순한 반면 대륙 사람은 음흉하고, 홍콩에 있는 중국 사람들은 사기꾼이에요. 싱가포르 사람들은 훈련은 잘 되어 있지만 예리하지요』
5. 현실(실속)과 미엔쯔(面子<면자>)
중국사람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실을 중시하는 민족이다. 중국인들은 콩쯔(孔子<공자>)라면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 지성으로 추앙하는데 이들의 현실중시 경향은 그의 영향을 받았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들 콩쯔는 케케묵은 문자나 즐겨 사용하며 예의니 효도니 따위의 말만 하는 「고리타분한」존재쯤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귀신이니 도깨비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일체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하늘」이니 「죽음」까지도 논하려 들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것은 곧 「비현실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강조한 모든 것들은 현실과 밀착된 것들, 예들 들어 교욱, 부모 섬기기, 수양하기, 음악듣기, 교제하기 등등이었다.
사실이지 고리타분한 존재는 콩쯔나 멍쯔(孟子<맹자>)가 아니라 라오쯔(老子<노자>)나 쫭쯔(莊子<장자>)인 셈이다. 그들의 글을 보면 얼마나 황당무계한지 쉽게 드러난다.
『道(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이름이 아니다』
『북쪽 바다에 곤(鯤<곤>)이라는 물고기가 이쓴ㄴ데 그 크기는 수천리가 넘는다』
라오쯔와 쫭쯔의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이 얼마나 뜬 구름잡는 소리인가?
중국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신화의 재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신화가 거의 발달하지 못했으며, 또 신화를 바탕으로 발달하는 소설도 덩달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신화나 소설은 모두가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콩쯔가 배척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을 중시하는 중국사람들에게는 먹는 것이야말로 「하늘」과 같은 존재였으며 모든 것은 먹는 문제로 귀착되었다. 훌륭한 통지자란 민주정치를 실시했던 천자가 아니라 먹게 해줄 수 있는 천자를 말했다. 중국사람들이 역시 「하늘」처럼 떠받드는 堯(요)임금과 舜(순)임금도 민주정치를 해서가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보다 堯舜(요순)임금을 훨씬 더 존경한다. 우리가 단군할아버지를 숭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중국에서 먹는 것을 완전하게 해결한 것은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의 일이므로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동안 「조용」했던 것은 이념의 문제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현실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했던 마오 쩌 뚱(毛澤東<모택둥>)의 통치력이 뒷받침된 것이다.
중국사람들의 현실중시경향은 쉽게 드러난다. 복잡한 형식이나 겉치레를 싫어하며 내용을 중시한다. 그들이 지내는 제사를 보면 절차가 우리보다 훨씬 단순하다.「겉보다는 실속」인 것이다. 마오 쩌 뚱이나 쪼우은라이(周恩來<주은래>), 떵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양복입은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麻雀雖小(마작소소), 五臟俱全(오장구전)』(참새가 작아도 오장은 있다)
그들에게는 있고 없음이 중요하지 어떤 것이 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요즘 불고 있는 이른바 「실용주의」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결코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과거 몇십년 동안 현실보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웠던 데 대한 일종의 반대용어일 뿐이다. 등소평의 실용주의노선은 드래서 보다 더 중국적인지도 모른다.
중국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한다. 그래서 『중국의 성격』이라는 책을 쓴 바 있는 영국의 전도사 아담 스미스는 중국사람을 이해하는 관건으로 체면을 들었으며, 린위탕(林語堂<임어당>)같은 이는 『내 나라네 국민』(吾國與吾民<오국여오민>)에서 중국을 지배하는 세 여신으로 체면, 운명, 은전(恩典<은전>)의 여신을 들었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체면의 여신이라고 했다.
중국의 문화를 주도해온 사상은 콩쯔로 대표되는 유가였다. 그런데 유가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실을 중시한다. 그래서 내세가 없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인데, 불교처럼 내세를 앞세우면 인심을 모을 수도 있으련만 유가에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바로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게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면 육신은 죽되 정신을 죽지 않는다고 보았다.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의 이름은 물론 조상의 이름까지 드날리는 것(立身揚名<입신양명>)이야말로 효의 극치라고 했다. 명분이니 명예라는 말은 그레서 나왔다.
그런데 名(명)은 다분히 정신적인 이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신을 나타내는 이름은 무엇일까 ? 그것은 바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다. 곧 얼굴은 육신의 실질적인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얼굴도 명예와 함께 중시했다.
「경을 친다」는 말이 있다. 경(경<경>)이란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로 참형 다음 가는 중형이다. 평생 얼굴을 들 수 없게 하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또 厚顔無恥(후안무치)라는 말도 있다. 얼굴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체면을 닦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서, 실제로 중국에서는 그런 사람에게 얼굴가죽을 벗기는 형벌을 가했다. 너무 두꺼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얼굴은 육신의 상징으로 중시되었다. 우리나 중국이나 지금도 경찰에 체포된 범인이 얼굴부터 가리는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한 것이다.
체면을 중국어로 미엔쯔(面子<면자>)라고 한다. 곧 얼굴이라는 뜻이다. 워낙 미엔쯔를 중시했던 민족이었던 만큼 체면 때문에 죽음을 자청했던 경우도 많다. 周(주)나라가 서자 불사이군을 외치면서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기를 자청했던 뽀이(伯夷<백이>)와 수치(叔齊<숙제>)도 사실은 체면 때문이었으며, 료 우빵<劉邦<유방>)에게 패주를 거듭하던 샹위(項羽<항우>)도 도망치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가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烏江(오강)을 건너기를 거부하고 자결을 선택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건넌단 말인가』.
總理衙門(총리아문)이라면 청나라때 외교를 담당했던 기관으로 지금의 외무부에 해당된다. 당시는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마음껏 유린하던 때였다. 서영사름들은 걸핏하면 총리아문을 안방 드나들 듯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했다. 서양사름들이 이 곳을 출입할 때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지곤 했다.
즉 잔뜩 거드름을 피우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간다. 정문은 곧 체면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사람들의 기세를 꺾어 놓는다. 그러나 나중에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고 나갈 때는 슬그머니 옆문을 이용했다. 구겨진 중국사람들의 체면을 다시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체면중시 풍조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 체면과 관계되는 말은 무척 많다. 우선 체면 차리는 것을 쭈오 미엔쯔(做面子<주면자>), 남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을 께이 미엔쯔(給面子<급면자>), 제 삼자의 체면을 봐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마이 미엔쯔(賣面子<매면자>)라고 한다. 「체면을 팔았다」는 뜻이다.
그뿐인가, 체면이 선 상태를 요구 미엔쯔(有面子<유면자>), 깍인 상태를 메이 미엔쯔(沒面子<몰면자>),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쯩 미엔쯔(爭面子<쟁면자>), 이상의 것들은 집대성한 것을 미엔쯔 꽁푸(面子工夫<면자공부>)라고 한다. 일종을 「체면학」인 셈이다. 중국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미엔쯔 꽁푸」에 밝아야 한다.
그러면 중국사람들은 「체면」과 「현실」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가. 이 두가지는 보완적이기보다는 상충되는 경우가 더 많다. 너무 체면만 차리다가는 현실의 이익을 놓치기 쉽다. 중국사람들은 양자가 상충될 때 「현실」쪽을 택한다. 즉 양자를 면밀히 검토하여 유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체면도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래서 상대가 아무리 의연하게 대처해도 전후좌우를 따져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얼마든지 숙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지난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사건이 발생했다. 수명의 납치범에 의해 중국의 민항기가 우리의 춘천 비행장에 불시착한 것이었다. 유사 이래 처음 경험하는 우리로서는 이 엄청난 사건에 전국이 놀랐지만 사실 우리보다 더 놀랐던 것은 중국이었다. 그들은 다급했던 나머지 민항국장 沈圖(심도) 일행의 방한을 요청해왔다. 이때 중국외교부는 사상 최초로 우리나라를 대한만국(Repubulic of Korea)이라고 정식으로 호칭했다. 목전의 이익을 앞두고 체면을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도하 각 매스컴들은 흥분한 나머지 금방 한.중간에 무슨 변화라도 있을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양국이 국교정상화를 이룬 것은 그로부터 만 9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6. 꽌시(關係)와 메이 꽌시(沒關係)
중국어로 관계를 「관시」關係(관계)라고 하는데, 우리의 「빽」(background)과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다. 중국사람들의 관계중시는 가히 알아줄 만하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관계라고 본다. 그래서 관계를 가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것을 까오 꽌시(고關係<고관계>)또는 라 꽌시(拉關係<납관계>)라고 하는데, 「관계를 얽는다」고 보면 무방하다.
이렇게 하여 관계가 얽혀진 상황이 꽌시왕(關係網<관계망>)인데, 마치 거미줄처럼 망을 형성해 두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유사시 꽌시 왕을 동원하는 것을 카오 꽌시(고關係<고관계>), 또는 판 꽌시(攀關係<반관계>)라고 한다. 이는 「관계를 타다」, 또는 「빽을 동원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관계를 중시하다 보니 사람을 평가할 때 상대방의 능력보다는 꽌시가 우선하는 경우가 있다. 즉 그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사람인가가 더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럴 때 그들은 「중보다 부처를 보아서」라고 표현한다. 그 사람의 빽을 더 중시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공부했던 대만의 경우, 입학원서에는 반드시 추천서가 필요한데 그 위력이 대단하다. 즉 든든한 인사의 추천서라면 입학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이 점은 중국 대륙도 마찬가지다. 평소 잘 아는 인사 한분이 사업차 중국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세관에서 검사가 워낙 까다로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높은 고관을 알고부터는 무사 통과였다는 것이다.
꽌시를 맺어 놓은 상대를 꽌시 후(關係戶<관계호>)라고 한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꽌시 후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다음의 기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공장을 하나 새우려면 수많은 기관과 관계를 맺어 놓아야 한다. 심지어는 주위의 生産隊(생산대)까지도 그렇다. 만약 그들이 열번 요구했을 때 한번이라도 거절했다가는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변전소에서 어떤 요구가 들오왔다고 하자. 만약 당신이 그 요구를 거절한다면 당신은 정전을 당하고 말 것이다』(1980년 11워 15일자「人民日報(인민일보)」)
꽌시 왕 치고 좀 특수한 꽌시가 있다. 중국사람들은 인위적인 혈연관계 즉, 수양관계를 매우 좋아한다. 여기에는 수직관계와 수평관계가 있다.
수직관계에는 깐(乾<건>)이라는 말이 덧붙여지는데 그것은 「건조하다」는 뜻이다. 흔히 우리가 술좌석에서 자주 사용하는 「건배」(乾杯<건배>: 깐 빠이)라는 말은 바로 「술잔을 말린다」는 뜻으로 「잔을 비운다」는 의미다.
수직관계에서 「깐」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수양 아버지면 깐빠(乾파<건파>), 어머니면 깐마(乾마<건마>), 아들을 깐 얼쯔(乾兒子<건아자>), 딸이면 깐 뉘얼(乾女兒<건여아>)이라고 한다. 현재 중국의 총리인 李鵬(이붕)이 主恩來(주은래)의 깐얼쯔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수평관계는 바로 의형제를 맺는 것이다.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桃園結義(도원결의)를 기억할 것이다.
일단 關係網(관계망)에 든 사람은 「내 사람」이 된다. 그래서 모든 친절을 다 베푼다. 그러나 「내 사람」이 아니면 「남」이 된다. 그들은 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이처럼 중국사람들에게는 내 사람과 남의 구별이 강하다.
중국어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메이 꽌시(沒關係<몰관계>)가 그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괜찮다」가 된다. 그런데 이 말의 글자를 풀어 보면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나하고는 관계가 없으므로 괜찮은 것이다.
또 남의 일에 참견을 할라 치면 샤오 꽌시엔스(少關閑事<소관한사>)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괜히 쓸데 없는 일에 관계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인데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뜻이다.
7. 중용과 조화
중국사람들은 중용을 통한 조화를 중시한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흔히들 우리는 가운데를 취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중용에는 보다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숫자 10을 놓고 보자. 단순히 가운데를 취한다면 5가 바로 중용의 숫자가 된다. 그러나 중용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중국사람들이 배격하는 숫자가 될 수도 있다.
보다 중용에 가까운 숫자는 1과 10 두 개일 수도 있고 4,5,6이 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1에서 10까지 모두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중용이란 수학적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 화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굳이 우리말로 쉽게 표현한다면 「모자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 즉 過猶不及(과유부급)의 상태가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러면 조화는 또 무엇인가. 두 개의 극단을 동시에 취함으로써 중용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중국사람들은 극단적인 것을 싫어한다. 일도양단이라는 말은 마치 칼로 두부 모를 자르듯이 단칼에 결판내는 것을 말하는데 그들은 이런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극단을 배격하며, 굳이 취하라면 차라리 양단을 동시에 추구한다. 그것이 곧 조화다. 중국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음양사상은 조화의 좋은 예이며 그들의 옛 건축믈을 보면 거의가 좌우대칭형이다. 어느 한 곳만을 치중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단체에 참석해보면 중국인 특유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의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보다는 그것을 타인과 조화시키기에 더 노력한다. 그들이 흔히 하는 속담에 「사람 보면 사람 말을, 귀신 보면 귀신 말을 한다」(見人說人語<견인설인어>, 見鬼說鬼語<견귀설귀어>)라는 말이 있다. 적응과 조화를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주장에 모순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을 口是心非(구시심비)라고 한다. 「입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하면 음흉한 셈인데 그들은 음흉해서 오는 폐단보다는 남과 조화하지 않은 데는 오는 불화를 더 경계한다. 중국사람들에게 있어 조화의 대상은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은 의술과 약학, 음식까지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보다 재미있는 것은 자연과의 조화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은 늘 경외스러운 존재였다. 따라서 자연은 숭배와 함께 조화의 대상일 뿐이지 서양사람들처험 연구한다거나 나아가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에베레스트를 자국 경내에 두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것을 최초로 정복한 사람은 중국사람이 아니라 영국사람이었다. 1986년에 와서야 비로소 에베레스트에 중국인이 올랐다.
그러다 보니 인간과 자연간에는 엄격한 주종관계가 성립한다. 물론 主9주)는 자연이고 인간은 그 부속물에 불과하다. 이 점은 동양화를 보면 쉽게 드러난다. 산천등 자연은 크게 처리하고 있는 반면 인간은 늘 조그마한 한 점, 도는 한 획으로 처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늘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것이 바로 天人合一說(천인합일설)이며 그 중의 하나가 풍수지리설이다.
8. 商人(상인) 기질
흔히들 중국사람들은 장사에 뛰어나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화교들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이지 그들의 장사기질은 경재대국을 이룩한 일본인들도 인정하는 바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배경이 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을 商人(상인)이라고 하는데 원래 뜻은 「商(상)나라 사람」이다. 商(상)나라는 우리에게 殷(은)나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후에 周(주)나라에 의해 망한다. 앞서 말한 伯夷(백이) 叔薺(숙제)는 바로 상나라 말기 때의 사람이다.
武王(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새운 것은 기원전 1,111년이었다. 나라가 망하고 전답을 몰수당한 은나라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무런 생산기반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장사로 연명해야 했다. 商人(상인)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상인의 등장은 지금부터 3천년이 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중국 사람들은 3천년 전부터 상업에 종사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라면 극도의 혼란기이다. 중원은 온통 제후들의 땅 빼앗기 싸움으로 전쟁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지만 묘하게도 사상과 상업만큼은 크게 성행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諸子百家(제자백가)와 재별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정경유착은 지금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 점은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재벌이 출현하였으며 콩쯔같은 성인도 돈많았던 제자 쯔꽁(子貢<자공>)이 있었기에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자연히 황금만능주의가 풍미했다. 당시 정치재벌의 대표는 단연 뤼 뿌 웨이(呂不韋<여불위>)를 들 수 있는데 요즘의 재벌은 땅투기를 즐겨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사람, 즉 천자의 자리를 투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예리한 투자안목으로 쯔추(子楚<자초>)라고 하는 진나라의 왕자에게 자신의 애첩을 바쳤다. 그녀는 이미 임신중이었다. 얼마안 있어 아들을 낳으니 이가 훗날의 진시황이다. 그러니까 진시황은 뤼 뿌 웨이의 아들인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은 진시황이지만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상인, 즉 재별의 힘이 아니었을까.
중국은 땅이 넓다. 그러다 보니 장단점이 동시에 있다. 半寒帶<반한대>부터 열대까지 있어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없는 것은 좋은데 워낙 넓다 보니 이것을 각지로 실어 나르는 일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예로부터 없는 것(無有<무유>)이 두려운게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不均<불균>)이 두렵다고 했다. 고르게 하는 것, 그것은 요즘말로 유통이며 그것을 담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상인이었다.
이밖에도 중국에서 상업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사람들은 일찍부터 장사에 눈을 뜰 수 있었으며 그들의 재능은 현재 세계 각지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현재 중국대륙의 상업은 우리에게 뒤져 있지만 그것은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중국인들은 곰에다 비유할 수 있다. 곰은 미련한 동물같지만 물고기를 잡는 데는 수달 못지 않은 민접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곰은 훈련만 시키면 재주까지 부릴 줄아는 영특한 동물이기도 하다. 즉 곰에게는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현재의 중국인은 이제 각 동면에서 깨어난, 훈련을 거치지 않은 곰이다. 현재의 중국인은 이제 갓 동면에서 깨어난, 훈련을 거치지 않은 곰이다. 따뜻한 봄이 되고 정신 훈련과정을 거칠 때 그 곰은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같은 중국사람인 홍콩과 싱가포르, 대만 등에서 익히 알 수 있다.
9. 금전관과 계산감각
중국사람들의 상업기질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 그들 특유의 금전관과 계산감각이다. 하기야 상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 민족은 없다. 그러나 돈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애착은 그 정도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예를 들어보자. 화교들은 장사에 뛰어나 돈을 많이 버는데 일단 돈이 수중에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른다고 한다. 돈이 늘어나면 이제는 의심이 많아 방바닥을 파낸 다음 묻어둔다는 것이다. 물론 과정이 섞인 이야기겠지만 그들이 돈을 중시하는 일면을 말할 것이라 하겠다.
중국사람들이 돈을 중시하는 풍조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등교하기 전에 가게에 나가 일을 거든다. 물론 책가방은 한쪽 구석에 놓아둔 채 일을 한다. 부모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돈을 버는 것」을 중국어로 「쫜치엔」(잠錢<잠전>)이라고 하는데 대화중에 쉽게 들을 수 있다. 심지어는 강의중인 교수도 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낸다. 돈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점잖은 신분에 가급적이면 입에 올리지 않으려는 우리와는 다르다.
중국에서 구정만큼 큰 명절은 없다. 왁자지껄하고 요란하다. 설날에 우리들이 즐겨 하는 덕담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중국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꽁시 파 차이」(恭禧發財<공희발재>): 돈 많이 버십시오)다.
중국사람들은 수많은 신을 섬긴다. 아마도 그들만큼 다양한 신이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에 신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상신은 물론 땅의 신, 집의 신, 화장실 신, 대문 신, 심지어는 부뚜막의 신도 있다. 이런 형편인데 돈의 신이(錢神<전신>)이 있으며 그보다 한 수 높은 재신(財神<재신>)도 있다. 각종 재산을 담당하는 신인 셈이다.
중국인들이 돈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사실 그들만큼 전쟁과 재앙을 많이 겪은 민족도 드물 것이다. 오죽했으면 량 치 차오(梁啓超<양계초>)가 戮民(육민)이라고 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국이 불안하면 금값이 폭등한다. 전쟁이든 재앙이든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금(돈)밖에 없다. 외양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돈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정확한 계산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놀랍게도 중국인들은 계산관념에 있어서도 가히 세계 제일이다. 무려 2천6백년전부터, 그러니까 공자시대 이전부터 수학은 군자가 익혀야 할 기본과목으로 되어 있었으며, 원주율 3.14를 계산해낸 것은 무려 1천 8백여년전의 일이다.
계산을 중국어로 「쏸」(算<산>)이라고 한다. 꿍꿍이 속을 신쏸(心算<심산>)이라고 하며, 쏸러(算了<산요>) 하면 「계산이 완료된 것」으로서 관계가 끝난 상태를 말한다. 심지어 그들은 점을 보는 것도 계산하는 것으로 여겨 쏸밍(算命<산명>)이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운명을 계산한다」는 뜻이 된다. 그들에게는 운명조차도 「계산」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계산하는데 필요한 주산을 쏸판(算盤<산반>)이라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 이전부터 사용했다고 하니까 7백년은 족히 된셈이다. 계산기가 발달한 지금도 주산은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어린아이의 돌잔치다. 상을 푸짐하게 차리는 것은 우리와 같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돈과 연필, 그리고 실을 잔치상에 올리는 데에 비해 그들은 붓과 함께 주산을 올려 놓는다.
10. 거대한 스케일과 축소지향
白髮三千才(백발삼천재)」리 타이 빠이(李太白<이태백>)가 우연히 거울 앞에 섰다가 호호백발이 다 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놀라 한 말이다.
옛날 楚(초)나라에는 이상한 나무가 많았다. 그중 冥靈(명영)이라고 하는 나무는 5백년을 봄, 5백년을 가을로 삼는다. 또한 大椿(대춘)이라고 하는 나무는 무려 8천년을 봄으로 삼는다. 『莊子(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에서 천지를 개벽한 사람은 판꾸(盤古<반고>)다. 그는 두 팔로 하늘을 떠받치고 서있었는데 키가 하루에 한 길씩 자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1만 8천년이 지나자 그의 키도 그만큼 커졌고 덩달아 하늘도 아득히 놓아지게 되었다.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말이다.
이래저래 우리에게 중국사람들은 「거대한」사람들, 「스케일이 큰」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들의 커다란 스케일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경우는 많다. 만리장성은 동쪽 발해만의 山海關(산해관)에서 출발하여 서쪽 감숙성의 嘉욕關(가욕관)까지 장장 6천km나 뻗어 있다. 그러므로 사실은 만오천리 장성인 셈이다. 달에서 보이는 인류의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표현이 실감난다.
북경 천안문 광장의 뒤에 위치해 있는 것이 紫禁城(자금성)이다. 明(명),淸(청) 양대 天子(천자)가 살던 살림집인 셈인데 무려 17년에 걸쳐 지었다. 둘레가 6km에 무려 9천門(문)이 넘는 방으로 되어 있다.
그들의 스케일은 토목과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永樂大典(영락대전)』이라면 명나라 成祖(성조)때 편찬된 일종의 백과사전인데 학자 2천명을 동원하여 6년동안 썼다. 총 2만2천8백77권에 3억7천만자가 수록되어 있다. 청나라 전성기 때의 천자였던 高宗<고종>(연호는 乾隆<건륭>)은 한 수 더 떠서 『四庫全書(사고전서)』를 편찬했는데 17년동안 4천2백명을 동원하여 총 17만2천6백26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했던지 도합 7질이나 만들었다. 『永樂大典(영락대전)』의 자수는 그래도 셀 수가 있었다. 그러나 『四庫全書(사고전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확한 자수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세계 최대의 서적인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넓은 땅, 오랜 역사, 그리고 다영한 자연환경, 거기에다 많은 사람, 이런 것들이 중국을 특징지을 수 있는 말들이다. 인간의 성품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연환경이다. 끝없는 평원, 바다같은 호수를 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성은 자연히 광대무변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산의 정상에 섰을 때 가슴이 확 트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사람들의 흉금은 대체로 확대지향적이다.
그렇다고 중국 사람들이 거대한 스케일만 즐겼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그들이 국민성 중에는 축소지향의 일면도 있다. 「大中有小(대중유소), 小中有大(소중유대)」라는 말이 있다. 「큰 가운데 작은 것이 있고 작은 가운데 큰 것이 있다」해석하면 되겠다. 莊子(장자)의 구름잡는 이야기 같지만 이를 인정한다면 큰 것이 작은 것이고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라는 뜻도 된다.
다시 말해 큰 것과 작은 것에는 대소의 구별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얼마든지 작아도 그들은 크게 여길 수가 있는 것이다. 옛날 한나라 때의 費長房(비장방)과 같은 도사는 호로병 속에서 새로운 천지를 맛보았으며 四川(사천) 지방의 成都(성도)에서 나는 이상한 귤속에는 두 도사가 태연하게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야기속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실제로 작은 것은 없는가. 많다. 대만의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유물중의 하나로 橄欖劾舟(감람핵주)라는 것이다 있다. 청나라의 조각가가 올리브 열매에다 蘇東坡(소동파)가 쓴 「적벽가」를 조각한 것인데 길이 3.4cm, 높이 1.6cm 의 배모양을 하고 있다. 그 속에 여덟 사람이 앉아 있고 양쪽에 모두 8개의 문이 달려 있는데 지금도 자유롭게 열리도 닫힌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배 밑바닥에다 「적벽가」전문 3백 57자를 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또한 多層球(다층구)라는 것도 있는데 상아를 깎아 큰 공을 만든 것으로 그 공속에 도합 16개의 공이 층층이 있어 각기 따로 움직인다.
현실생활에도 작은 것은 많다. 그들의 찻잔을 보면 배갈잔만 하다. 우리의 녹차잔보다도 훨씬 더 작다. 흔히들 일본인이 「축소자향적」이라고 하지만 중국사람도 못지 않다.
일본사람들의 좁은 공간의 영향을 받았다면 중국사람들은 도리어 넓은 공간의 영향을 받았으며, 또 일본사람들이 축소를 통한 「적응」을 추구했다면 중국사람들은 축소를 통한 「여유」를 추가했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작은 것에서도 큰 세계를 느낄 줄 알았기 때문이다.
1993년 신동아 별책부록에서 발췌
鄭錫元(정석원)
漢陽大人文大副敎授.中國學術思想(한양대인문대부교수 중국학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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