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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6월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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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두루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어느 누구는 특별히 사랑하고
어느 누구는 특별히 덜 사랑하는
그런 분은 아니실 텐데요.
제데베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을 할 때에도
주님께 꾸중만 들었음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 요한 21,20-25를 보면
요한 사도를 지칭하는 독특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입니다.
열두 제자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신 제자가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요한은 주님께서
더욱 사랑하셨던 제자로 등장합니다.
아마도 요한 복음의 작가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위에서 잠깐 말씀 드렸듯이
제데베오의 아들인 요한은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갈릴래아의 호반 도시 벳사이다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을 아시지요?
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도 부르셨습니다.
네 사람은 동향 출신으로 예수님께서
처음 선택하신 제자들이었지요.
이후 이들은 기적의 장소에
언제나 스승님과 함께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제자들이었기에 그리 했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이나, 마르코 복음,
루카 복음 등 이른바 공관 복음에는
이들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똑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지극히 단순한 결정입니다.
그렇군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단순해야 한다는 것을..
그분께서 부르시면 어떠한 경우에도
“예!” 하고 곧바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사도는
훌륭한 모범을 남겨 주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오래 살았습니다.
사도 가운데 그만이 순교하지 않고
수를 다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첫째는 예수님의 부탁대로 성모님을 모셔야 했기에
순교의 길을 갈 수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요한은 제자들과 함께
스승님의 가르침을 정리한 복음서를
집필해야만 했습니다.
요한은 초대 교회를 지켜야 했고,
박해로 고통 받던 교우들을 위해
‘묵시록’을 남겨야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순교는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요한의 발자취는 어느 제자보다
크기만 합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네 사람은
유달리 사랑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왜일까요?
많은 분들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정도로
그들의 삶이 단순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분의 부르심을 느끼면
즉시 응해야 한다고...
그러면 주님의 사랑이 늘 함께한다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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