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까번쩍한 날씨입니다^^
벗들과 함께하면 좋은 일에는 술이 잘 넘어가지 않는데
희안하게 괴롭거나 나쁜 일에는 술술 잘 넘어가요.
다음 주일 교회에 가면 또 속죄할 일이 생겼습니다.
신은 죽을때까지 속죄하며 살아라 합니다.
정 없으면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죄 사함을 받으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인간, 스스로 신이 다 된 줄 알고 더 이상 찾지 않거든요.
마, 매일 속죄해도 좋으니 한 잔 술로 세상을 원망하며 허공에다 주먹밤을 먹이는 것도,
함께 한 친구에겐 조금의 위로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라도 정신건강을 찾아 놓아야 또 한 고비 넘길 수 있는 것을...
나약한 인간이 할 것 이라곤 그것 밖에 없더이다.
시절이 시절이니 만큼 여기 가도 저기 가도 온통 힘들다는 말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하기사, 돈 나무 밑에 앉아 절로 떨어지는 돈 쓸어 담는 곳이 있다면 또 모를까
경제활동을 하는 한 어느 해 어느 시절 힘 안들고 편안했던 날이 있었습니까?
천석꾼은 천석의 고민을 만석꾼은 만석의 어려움을 이고 사는 것이
세상에 태어나 경제활동을 하는 우리들의 업보 아니겠습니까.
고국에 새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 경기가 조금씩 살아나는가 봅니다.
하지만 바닥 서민 경기는 아직 요지부동입니다.
좀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원컨데 제발 새정부 초기, 반짝 기대경기는 아니길....
칭다오에서 경제활동하는 사람을 크게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본국에서 주재원으로 파견 나온 사람이나 탄탄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한 축에 있다면
또 다른 축은 의지할 곳 없이 자갈밭을 일구듯 까맣게 타 버린 심장으로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전전긍긍하며 사업하는 사람이 그에 해당됩니다.
후자는 주로 중소기업.무역.서비스.요식업.판매업 등을 영위하는 부류인데,
불행하게도 그 비율이 앞이 3 이라면 뒤는 7에 해당됩니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 대다수에 맞춰져 있는 느낌입니다.
예전에는 한국기업 경영자나 한국직원들의 눈은
중국사람들과는 다른 총기(聰氣)란게 있었습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지요.
그런데 큰 시장에도 불구하고 현지 중국인들이 어리숙하게 보이는지라
수년만 고생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해보니 엇뜨거라 고작 몇 년도 못가고 벌써 지쳐버립니다.
힘이 쭉 빠진 어깨가 다 드러나 보입니다.
좋은 뜻으로는 이제사 겸손하고 두렵고 신중해졌다고 흔들리는 눈빛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 지식도 기술도 없이 몇 푼의 자금만 달랑 준비해 건너온 외국 친구들이
2,3년 내에 번듯한 기업을 일군다면
현지 중국인은 청도 해변가로 바로 달려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사업은 그렇게 어렵습니다.
남의 호주머니에서 인민폐 한 장 빼 내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해외라면 더더욱..
저기 팔대관 해변가에 있는 화석루(花石樓:일명 장개석 별장)는 제게 특별한 곳입니다. 90년대 중후반, 한번 쫄딱 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어요. 도망가려고 해도 딸린 식구가 똘망똘망한 자식 포함 셋이라 쉽게 그러지도 못합니다. 무엇보다 중국 올 때까지 거 잘났다고 천방지축 교만했던 터라 쪽팔리고 부끄러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려 일년 반 넘게 매일 아침 출근을 저기 장개석 별장 뒤 해변가로 했습니다. 그곳에는 옛날 전쟁시 만들어진 벙커가 하나 남아 있는데, 밀물때는 그곳까지 바닷물이 들어 옵니다. 오전 내내 그 벙커 위에 쪼그리고 앉아 흐리멍텅한 눈으로 세상 끝같은 수평선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배가 고플 때 쯤인 점심 자락에 회사로 출근을 했습니다. 권토중래 시를 읊다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다가 지겨우면 가부좌 틀고 반야심경도 외웠지요. 그 시간동안 마음을 달리 잡았는지 공장에 들어서는 순간 어제와는 판이하게 물불 안가리는 삵괭이로 돌변했습니다. 지독했지요.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고 난 어느날, 거울을 보니 눈빛이 서서히 새로 돌아 온 듯 해 보였습니다. 물론 예전의 그 아름답고 선한 눈빛은 아니지만서도,,, 한 동안은 밤에 왼쪽 가슴이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앓는 소리가 들킬까 잠을 못 이루기도 했습니다. 원형탈모가 여기저기 생기고 머리칼이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 입니다.
그때 공인 월급이 300원 정도 하였는데, 한달 벌어 인건비.자재비.공장 운영 고정비.제세공과 등을 제하고 남은 것은 몽땅 조금씩이나마 빚(밀린 외상매입금) 갚는데 쓰다보니 집에다가는 500원 정도 갔다 주었습니다. 무려 일년 넘게 말입니다. 외국인으로서의 네식구 생활비로는 턱 없이 모자랐겠지만 맨날 폼은 씩씩하게 출근했다 상쾌하게 퇴근하는 것을 보니 그냥 요즈음 공장이 좀 힘드는구나 차차 나아지겠지라고 철석같이 믿은 집사람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지요. 한인상공회 회원사중에 제가 나이로 제일 어렸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인생 선배들이 다 그럽디다. 당시 모든 기업들이 어려운 시기였는데 볼때마다 지 잘난 멋으로 개발세발 떠들고 다니니 자네만 잘 해 나가고 있는 줄 알았다고...
힘들 때, 남으로 부터 위로는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업을 하는 사람에 있어서 위로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일 될 수도 있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또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권하는 그 술 한 잔의 위로를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 술이 깨면 오히려 불편함과 거리감만 생기게 됩니다. 저 역시 다 지난 지금에사 이렇게 털어놓지만 당시에는 입도 벙긋 안 했습니다. 덕 되는 것 없어요. 스스로 초라해지고 주위에 인식만 나빠지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솔직히 사회는 그렇게 냉정합니다. 저는 오래 전 어릴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배워 온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건강이 열배 백배 중요하다는 것을...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있는 집 며느리가 시장에 가서 좀 깎아달라고 말하면.. "에고~있는 집인데도 저렇게 알뜰하다니..페이푸 페이푸(佩服!佩服!)"
반면에.. 없는 집 며느리가 시장에 가서 좀 깎아달라고 말하면.. "에고~얼마나 지지리궁상이면 이것도 깎으려고.. 커리엔 커리엔(可怜!可怜!)"
得醉中趣,勿谓醒者传 (취중에 정취를 얻었으면 그로 만족하고, 취하지 않아 깨어있는 자에게 전하지는 말라)
굳이 위로를 받으실 요량이라면.. 그당시 죽을만큼 힘들었던 저도 20년이 더 흐른 지금.. 같은 자리에 이렇게 팔팔하게 살아 있음에...
당당하게 어깨 쫙 펴고 사십시다. 어차피 천년 만년 살 것도 아닌데...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아까운 밥. 한 톨도 남기지 마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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