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8월11일 성녀 수산나 동정 순교자

주님의 착한 종 2016. 8. 11. 08:03



축일: 8월11일 
성녀 수산나 동정 순교자 
Santa Susanna di Roma Martire
Susanna = giglio, la donna pura, dall'ebraico (in aramaico Shoshana)

(Lily, the pure woman, from the Hebrew)
AD 295년 

 


수산나는 '백합'이란 뜻이다. 
가비니우스라는 어느 사제의 딸인 성녀 수산나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로 교황 성 카이우스(Cajus)의 조카였다.


그녀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기 조카인 막시미아누스와 결혼하라는 요구를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결혼을 종용하도록 파견했던 궁중 관리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와

막시무스(Maximus)까지 개종시켰다.


분을 참지 못하던 황제는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아내 프레페디냐(Praepedigna)는 물론
그들의 두 아들과 막시무스를 쿠메에서 죽이고, 수산나와 그의 아버지는 참수시켰다.
(가톨릭홈에서)






성 다미아노 성당 내부 모습과 성 다미아노 성당의 옛 가대

 

가난한 자매들의 초기 공동체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정한 성격을 드러내 준다.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은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자극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작은 형제들과 아주 가까워서“작은 자매들”이라고도 알려졌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봉쇄생활이었으나,그전의 수도승적 수도원의 생활양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성 다미아노에서의 봉쇄구역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더 영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가난한 자매들은 시가지 가까운 곳에서 살았는데,

이것은 자신들과 관상적 삶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던

작은 형제들의 사도적 활동에 가까이서 협력하려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가난한 자매들의 삶은 그들의 아무런 소유도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여성들의 수도생활 운동들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가난의 특전은 클라라와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 지녔던 특징적인 점으로 여겨진다.

 

클라라는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그녀의 카리스마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해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두 명의 교황은 그녀의 가난의 특전을 인가해 주었다:1216(인노첸시오 4세); 1228년(그레고리오 9세).

그러나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자신이 보호자 추기경이었을 때인 1218년에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준 회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에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다른 회칙을 만들어 주었다.

이 두 개의 회칙은 모두가 베네딕도회의 이상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성 다미아노 공동체에 안정된 생활양식을 보증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클라라는 교회가 인정해 주는 그녀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갖고자 결심하였다.

그녀가 실행해 간 계획은 그녀의 용기와 결심을 잘 보여준다.

제 4차 라떼란 공의회(1215년)는 수도회들이 새로운 회칙을 가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클라라는 1212년에 프란치스코가 자신에 생활양식을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짧은 기록은 생활양식과 함께 클라라가 자신의 회칙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실제로, 죽음에 이르러서 더 이상 클라라를

개인적으로 방문할 수 없었던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유언이다.

이 유언에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모델 삼은 복음적 가난의 이상에 대해 강조하고 있고,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에게 그 이상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클라라는 그녀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즉 교황에 의해 자신의 회칙을 인준되는 것을 보는 그 순간까지

이 말들을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간직하였다.

 

이 생활양식은 1223년 11월 29일 교회에 의해 정식으로 인준된 작은 형제들의 회칙을 모델 삼아 만들어진

그녀의 회칙에 근본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의 회칙은 새로운 회칙이 아닐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이것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지키기로 약속한 복음적 이상을

여성적으로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1253년 8월 9일 자신의 생활양식에 대한 인준을 받아 내었다.

클라라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여성 수도회를 위한 회칙을 쓴 첫 번째 여자이다.

 

클라라는 자신의 회칙 6장을 프란치스코가 그녀와 그녀의 가난한 자매들에게 준

두 개의 중요한 글들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쓰고 있다.

이 두 개의 글은 성녀 클라라의 회칙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들 중 첫 번째 것은 1212년에,

즉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이 산 다미아노에 정착하자마자,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 써 준 것이다.

 

자신의 회칙 6장에서 클라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복되신 사부님은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더 없는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다음과 같이 우리를 위해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

이 생활양식은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이 했던 복음적 삶에 대한 약속에 있어 기초를 형성한 것이고,

그래서 이 생활양식이 클라라 회칙의 근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생활양식은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 그리고 하느님과의 삼위일체적 관계성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보증해 주는 것인데,

이것이 형제들에게로 이어져 형제들의 의무로까지 확대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죽음이 가까워 올 무렵에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클라라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는데,

클라라는 그때 교황께 자신의 회칙을 인준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이 회칙을 1253년 8월 9일에 이 회칙을 인준해 주었다.

이틀 후인 8월 11일 클라라는 성 다미아노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시성 절차에 있어서 세 번째 증인이었던 필립파 자매에 의해 기록되었다:

 

“여러분은 훌륭한 호위를 받을 것이기에 평화 안에서 고요히 가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듯이 여러분을 지켜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저를 창조해 주셨으니 찬미 받으소서” (시성조사서 III, 20).






1260년 가난한 자매들은 전에 San Giorgio 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아시시의  새로운 수도원으로 이사하였다.

그들은 이사하면서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와 클라라의 유뮬들을 함께 가지고 갔다.

그녀가 죽은 후,자매들의 수도회는 성녀 클라라의 수도회(OSC)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성녀 클라라의 무덤은 1850년 8월 30일에 발견되었고, 9월 23일에 그녀의 유물들이 공개되었다.

1872년에 순례자들이 경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유물들은 대성당의 안치소에 있는 유골단지에 보관되었다.

성녀 클라라의 회칙 원본은 이 회칙을 인준해 준 칙서인 “Solet annuere"와 함께 1893년에 발견되었다.

 

-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