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금융위기 특급 소방수… 총리 후보로 부상
권위적이지 않고 직설적, 美재무장관들도 실력 인정…
前부총리의 사위인 '태자당'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비롯한 중국 4세대 지도부가 물러나고,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을 핵심으로 하는 5세대 지도부가 등장하는 중국의 권력교체기가 내년으로 다가왔다. 중국 공산당은 내년 10월 18차 당 대회를 열어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구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새로 구성한다.
정치국 상무위는 중국 집단지도체제의 핵심 기구로 국가주석과 총리 등 각 부문의 최고 지도자 9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직책이 다르고 서열도 있지만 중요한 안건 표결에선 동등하게 1표를 행사하는 같은 반열이다.
차세대 최고지도부의 윤곽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시진핑 국가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외에 왕치산(王岐山·63) 부총리와 왕양(汪洋·56) 광둥(廣東)성 서기, 보시라이(薄熙來·62) 충칭(重慶)시 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61) 당 중앙조직부장, 후춘화(胡春華·48) 네이멍구(內蒙古) 당서기 등이 상무위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중국 내외의 연구소들이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하는 후보들이다. 시진핑 시대 중국 최고 지도자 후보 5명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열렬한 역사학자에 철학 토론을 즐기고 짓궂은 농담을 잘하는 인물이다. 미국을 이해하고 있으며, 미·중 두 나라가 경제적으로 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안다."(헨리 폴슨 전 미국 재무장관) "문제를 푸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확실히 대단한 해결사에 특급 소방수다."(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
미국의 전·현직 재무장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 인물은 바로 왕치산(王岐山·63) 중국 부총리이다. 지난 2009년 4월 왕 부총리가 차세대 최고지도자로 유력한 시진핑 국가 부주석과 함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을 때 그를 추천한 이도 폴슨 전 장관이었다.
◆신뢰 회복시켜 베이징 사스 해결
왕 부총리는 중국인들에게 '베이징시장'으로 더 익숙하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해 중국 수도 베이징이 대혼란에 빠진 지난 2003년, 중국 중앙정부는 사태를 수습할 '구원 투수'로 중국 남부 하이난(海南)성 서기로 내려간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왕 부총리를 불러올렸다. 왕 시장은 취임하자마자 각급 기관에 "보고를 할 때 1은 1이고 2는 2다. 전쟁터에서 농담은 없다"며 정확한 보고를 지시했다. 내외신 기자회견에서도 "시장이 시민들의 일을 잘 알고 있고, 진상을 공개하려고 한다는 점을 시민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 수습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국제보건기구(WHO)의 지원도 적극 수용했다. 정확한 보고와 정보 공개가 계속되자 시민들의 신뢰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사스도 진정됐다.
- ▲ 2009년 7월 28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미·중 전략경제 대화에 참석한 왕치산(王岐山) 중국 부총리(왼쪽)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서 선물로 받은 농구공으로 슛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화통신
그는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당시 '세계의 공장'으로 불린 중국 남부 광둥성이 대형 금융기관들의 연쇄 도산으로 최악의 금융위기를 겪자 중국 정부는 인민은행장을 맡고 있던 그를 광둥성 상무부성장으로 내려보내 수습을 맡겼다. 그는 서방 채권 은행들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며 금융위기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인민은행장 지낸 금융통
왕 부총리는 1948년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에서 평범한 엔지니어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베이징에서 학창 생활을 보냈다. 문화대혁명 와중에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서부의 산시(陝西)성 옌안(延安) 지역에 배치돼 2년간 농사를 지었다. 이때 현지에서 만난 부인 야오밍산(姚明珊)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야오밍산은 후에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야오이린(姚依林)의 딸이었다. 왕 부총리가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나 고위층 자제들의 모임)으로 분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지 시베이(西北)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에 배치됐던 왕 부총리는 1982년 장인의 도움으로 공산당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실로 들어가면서 경제학자로 변신했다. 1988년 중국농업신탁투자공사 사장으로 발탁되면서 금융계에 진출해 인민은행장 등을 역임했다.
왕 부총리는 태자당 출신이지만 권위적이지 않다. 원고 없이 연설하고 말을 짧게 직설적으로 하는 것도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중국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다.
◆정치색 약하고 일 잘한다는 평
그는 지난해부터 총리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다. 유력한 총리 후보인 리커창 부총리가 의료개혁 분야에서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일 잘하는 총리'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태자당 소속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색이 강하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반면 주석이 유력한 시진핑 부주석이 같은 태자당 계열이어서 주석과 총리를 모두 태자당이 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베이징대의 한 교수는 "왕 부총리는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이후 최고의 총리가 될 만한 인물"이라면서 "총리를 왕 부총리에게 맡기고 리커창 부총리가 전인대 상무위원장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 > 중국과 친해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둥서 공업용 원료 '파라핀' 당면 적발…불법식품 어디까지 (0) | 2011.04.25 |
---|---|
`G2 중국` 이끈 칭화방 파워…`특허 4만건` 이공계 저력 있었다 (0) | 2011.04.25 |
中, 3G 사용자 6천2백만명…3개월간 1천9백만명 급증 (0) | 2011.04.23 |
中 언론, "정우성, 서태지 때문에 '불륜남' 전락" 대서특필 (0) | 2011.04.23 |
광시성, '범죄와의 전쟁' 선포 3일만에 범법자 1천명 체포 (0) | 2011.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