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일인데 아마 2001년 정도의 일로 기억한다. 당시 서울의 한 중견기업에서 재직하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지방의 거래처인 작은 A기업을 찾은 적이 있다. 내가 속한 회사는 그 A 기업에 제품의 원재료가 되는 ‘쇳덩이’를 공급하고 있었는데 A기업의 자금 사정이 너무 안 좋아 대금지급이 제 때 이루어지지 않는 형편이었다. 더 이상 계속적인 거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 상사의 지시를 받아 회사 형편도 알아볼 겸 차를 몰고 A기업을 찾아 담당 구매부장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 회사 외에도 계속 되는 다른 거래처들의 대금독촉 탓인지 피곤하고 꽤 지쳐 보이는 표정의 중년의 담당 부장은 나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시황이 너무 안 좋네요. 은행에서 추가 융자도 안 해 주고…”라며 몇 가지 의례적인 사정을 하소연 하며 커피 잔을 만지작 거리더니 갑자기 혼잣말로 “에이, 사장님이 중국 보물에만 빠지지 않았더라도…”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헉, 보물! 나는 귀가 솔깃했다. 중국 보물이라니…중소기업 철강회사 사장과 중국 보물이 당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보물 발굴 사업이라도 했단 말인가. 호기심이 밀려왔다.
나는 돌아온 그 부장을 붙잡고 캐물었다.
“부장님. 아까 혼잣말로 보물 어쩌구 하셨는데 무슨 얘기에요?”
“제가 그랬나요?”
장개석의 숨겨둔 보물을 찾아서
그는 회의실 밖을 둘러보면서 헛기침을 하면서 “뭐..이런 얘기까지…험험. 이대리, 다른 데서는 발설하지 마슈” 라며 잠시 숨을 들이켜 담배 한 모금을 빨더니 생색 내듯 자초지종을 털어왔다. 중국 보물 얘기는 바로 그 회사 A기업 사장이 중국에서 겪은 장개석의 숨겨둔 보물에 관한 사연이었다.
A기업 박모 사장은 몇 년 전부터 자사의 제품을 중국 등지에 수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판매처를 더 늘리려 중국 시장도 알아보고 수요가도 방문할 겸 중국을 찾게 되었다. 그러니 90년대 후반쯤의 일일게다. 몇 군데 납품업체를 방문하고 시간적 여유도 있었던 터에 마침 현지에서 알게 된 교민에게 현지 사업가라는 몇몇 한국인들을 소개 받았다.
귀국을 앞두고 그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들이 꺼내놓은 얘기가 바로 장개석의 숨겨둔 보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과거 1949년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한 장개석과 국민당 군대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갈 때 워낙 황급히 철수하느라 그간 군자금조로 모아놨던 보물을 본토 곳곳에다가 숨겨놓았다는 것.
많은 보물을 아무도 모르는 험난한 깊은 산속 곳곳에 숨겨놓고 표시를 했는데 그 후
대륙에 남게 된 장개석의 부하들이 백발 노인이 다 되어도 그 보물을 지키고 관리하
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대륙으로 돌아올 권토중래 할 날까지 지키고 있다가,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흐르고 더는 기다릴 수 없어 그 보물이라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 현지 사업가들은 바로 그 국민당의 이 늙은 패잔군과 긴밀히 연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 숨겨둔 보물 중에는 금덩어리나 진귀한 골동품 같은 현물 말고 미국 달러도 있는데 그 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을 떠날 수도 없고 신변이 노출될 위험이 있으므로 중국 인민폐를 가져다 주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액면 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바꾸어주겠다는 얘기였다.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였다.
“그게 말이 됩니까?”라며 반신반의 하는 박사장의 말에 현지사업가라고 하는 이들은 못 믿겠으면 관두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관심은 있으나 가진 돈이 넉넉치 않아 그저 여유있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소개한 것 뿐 이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평소에 호기심이 많던 박사장은 머리가 일순 어지러워졌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 땅덩어리가 좀 넓은가. 인구도 많고 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미개한 곳도 많아 별의 별 일이 다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박사장은 그렇게 못 믿겠으면 함께 가보자는 그들의 제의에 귀국을 미루고 같이 출장 온 부하직원을 보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며칠 후 그 부하직원은 그들과 함께 거지꼴이 다 되어 나타났는데 품 속에서 흙 묻은 달러 뭉치를 꺼내놓았다. 놀라웠다. 박사장 일행이 은행에서 확인해 보니 진짜 달러였다.
박사장은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가뜩이나 회사 살림을 꾸리면서 자금이 늘 모자라 힘들었는데 이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항상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라고도 느껴졌다. 왜 나라고 이런 행운이 찾아오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게다가 다녀 온 부하직원도 모든 사실이 틀림없는 것 같다고 맞짱구를 쳤다. 국민당 노인들과의 접속장소는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좀 떨어진 곳에 기다렸지만 그 노인들은 보안을 이유로 아무도 직접 대면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럴 만도 했다. 이건 뭐 더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소개한 현지 사업가들을 통해 노인들은 비밀을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 하며 자신들이 보유한 달러는 무궁무진하니 한번에 많은 금액을 최대한 빨리 바꾸자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다른 거래 대상을 물색할 수밖에 없다는 뜻도 넌지시 비췄다.
박사장은 곧바로 부하직원과 함께 한달음에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 자금 및 사채까지 급히 끌어 십억원대의 자금을 급히 조성한 후 다시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역시 같은 과정으로 한번 거액의 달러를 바꿔서 의기양양하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환전 차액만 해도 대단했으니 기분은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노인들은 달러가 바닥날 때까지 계속 거래할 의향도 있다고 하니 이번에 돌아오면 아예 투자자를 모집해서 달러 뿐 아니라 다른 보물까지 모조리 챙겨 올 ‘원대한’ 꿈까지 꾸었다.
드러나는 진실, 가짜 보물 사건의 진상
그러나 환전하러 찾은 외환은행에서 갖고 온 달러가 전부 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위폐라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럴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다시 찾은 중국에는 현지 사업가라는 사람들 뿐 아니라 알고 지내던 교민까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노인들이 숨어 지낸다는 곳도 워낙 깊은 산속에 루트가 복잡해서 찾아낼 수 없었다. 며칠간 중국의 어느 도시에서 거지꼴로 돌아다니며 “잡으면 죽이겠다”는 술푸념만 하고 다니다가 귀국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회사 사정에 사채까지 끌어다 거액을 날린 박사장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부하직원도 역시 귀신에 홀린 것 같다고 했다. 분명히 그들과 함께 지도를 보고 인적조차 없는 깊은 산속을 며칠 째 헤매이며 흙 묻은 낡은 달러를 갖고 왔는데…. 돌이켜 보면 현지에서 알게 된 교민도 자신이 한국에서 온 기업가라고 하자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 같았다.
낙심한 박사장에게 주변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중국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사채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A 회사는 꼭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금난에 시달리다가 몇 년 후 추가적인 아이템의 실패로 결국 부도났으며 회사는 매각되었다. 박사장은 시골에서 어렵게 자란 참 성실한 기업인으로 당시 모범기업인으로 선정돼 국무총리 표창까지 받은 이였는데 이 글을 쓰면서도 대단히 안타깝다.
이것이 중국 사기의 고전으로 꽤 유명한 ‘장개석의 숨겨둔 보물’ 사건의 진상이다.
‘꽤 유명하다’는 표현을 쓴 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박 사장만이 겪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중국에는 참 황당한 사기 사건도 다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위로를 건네고 곧 잊어 버렸다.
그 후 몇 년 지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 왔고, 우연히 기자 출신의 한 저자가 쓴 중국 교민생활을 다룬 책을 읽다가 이 사건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발견했다. 아! 나는 장개석 보물을 테마로 한 사기 사건은 중국 전역에서 눈먼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베이징에 사는 고참 교민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뭐 다 아는 내용”이라고 콧방귀를 뀌며 “이 바닥에 어리숙한 한국인들 대상으로 하는 그런 류의 사기사건이 어디 한두 건이냐”라며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서 워낙 잘 알려진 사건이라서 "더는 피해자가 생기지 않겠구나"라고 안심했는데 몇 달전에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2009년 8월 한국의 언론 매체는 한국에서 터진 ‘장개석의 숨겨둔 보물’이라는 사기사건을 보도하였다.
"중국에서 위조 채권을 대량으로 들여온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들여온 위조 채권만 3,400조 원대에 달하는데, 중국에 숨겨진 보물이라며 피해자들을 현혹했습니다.
중국 국민당의 비밀조직 '매화당'이 숨겨놓았다던 보물이 배경음악과 함께 모습을 드러냅니다. 62살 김 모 여인 등 9명이 사람들에게 매화당이 관리하던 채권 처분 사업에 투자하라며 보여준 영상물입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물의 위치가 표시된 비밀 문건을 보여줬습니다.,,,,이들은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기업가 등 부유층에 접근해 49살 박 모 씨 등 3명에게 17억 원을 받아냈습니다. (중략)
이들에게 국가 간 채무 변제나 차관 도입 때 쓰인다며 보여준 채권만 무려 3,400조 원에 달했지만, 전부 위조된 겁니다. 우리 돈으로 이 채권 한 장이 500조 원에 달한다는 터무니 없는 사기였지만, 김 씨 등은 장개석의 숨겨진 보물이라며 피해자들을 현혹했습니다. 채권을 처분해 얻은 수익이라며 천억 원이 예금된 통장과 위조지폐 수천 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중략)
이들의 범행은 결국 투자 제의를 받았던 변호사의 제보로 막을 내렸고, 경찰은 국가정보원과 공조해 피해자가 더 있는지 수사를 확대할 방침입니다.(MBN 뉴스)"
보물? 아! 그런 거 없다… ㅜㅜ
‘장개석 보물’ 일당은 더 이상 한물간 사기수법으로 중국 한인사회에서는 먹히지 않자 급기야 한국으로 건너가 먹잇감을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 징글징글한 사기꾼들 때문에 참 죽은 장개석이 무덤에서 욕본다.
중국 내에서 일단 이런 류의 사기를 당하면 대개 주위에 말하기도 창피하고 쉬쉬하며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자포자기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 경찰의 수사력을 믿지 않을 뿐더러 잡아봐야 이미 빼돌려 피해액을 변제 받기도 힘들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한인사회에 사건이 소문나면 자신의 허황된 욕심만 드러나고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인사회 사기꾼들은 이런 틈을 타 중국 실정 모르고 암소 같은 눈망울을 가진 선량한 한국인들을 찾아 재탕, 삼탕해서 우려 먹는다.
나는 이 글이 널리 읽혀져 다시는 이와 같은 유사한 사기 사건에 선량한 피해자들이 양산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전 지식만 있어도 아니면 주변 사람들과 상의만 했어도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중국에 와서 보물이니 뭐니 하는 꼬임에 속아 넘어가 돈만 날리는 한국인들 참 많다. 나는 의외로 중국한인사회에 이런 류의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제발 잘 살아보겠다고 중국까지 와서 장개석의 보물이니 관동군의 숨겨둔 금괴니 북한산 유물이니 뭐 이런 일확천금을 노리는 전설 속에 헤매이지 말자. 그 시간에 차라리 길거리에서 좌판 깔고 양꼬치라도 팔며 땀흘려 일하자.
초짜 교민들이여! 혹시나 조바심에서 드리는 말씀이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인터넷도 발달하고 정보와 자료가 풍부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대박 꿈꾸며 무작정 보따리 싸들고 건너오는 것이 아니라 현지 실정을 면밀히 사전조사하고 판단한 후 중국에 진출하는 것으로 안다. 특히 오래된 현지인들 뺨치는, 정보와 지식, 자본까지 갖춘 ‘준비된’ 교민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혹시 중국에서의 삶이 지치고 우리를 속일지라도 소설 같은 허황된 욕심은 버리자. "보물?" 그런 거 없다.
P.S: 혹시 이 글 읽는 박사장님. 워낙 성실하신 분이라 어디선가 재기해 성공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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