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창업을 준비하며/중국무역·사업 경험기

[스크랩] Re:누가 중국을 아는가?(3,4)-글:남풍.

주님의 착한 종 2010. 9. 13. 15:19

누가 중국을 아는가?(3)

 

그럼 지금 나이가 45세 이신데. 할아버지가 되셨습니까 ?
뭐. 그게 다 그렇지요.
나도 속도 위반을 했었고… 우리 딸 년도 급했던 모양 이지요…
하 ~ 하하하…

얘기 중 처음으로 같이 한바탕 웃을 수 있었으며 침울했던 분위기가 금방
바뀌었다.

오 사장은 6년 전 처음 출장을 왔었다.
이미 기회의 시장 이라는 환상이 식상 되어 갈 때쯤 이였으며
초기 진출자중 사상자들은 물러나고 회생 가능한 일부는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있을 때에도 밀물처럼 대중국 투자는 계속 되고 있었다.

오랜 기간 거래해온 바이어 들이 있었고 아이템에 관한 전문성이
있어 주문을 받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인력 의존도가 높은 제품의
특성상 해가 지날수록 거래공장에 작업을 의뢰할 때마다 짜증스럽기 만 하며
어느 순간은 생산 원가가 시장가격을 따라가지 못하여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경우도 다반사 였다.

위기감을 느끼고 중국의 공급 선을 확보 하고자
몇 차례 출장을 와서 만나본 동북성 일대의 한국사람 이나 화교. 혹은 조선족
통역을 통한 한족들과의 상담 내용들은 아리송 하기만 하며 의문 투성이
인 것이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장사는 구매코자 하는 사람이 요구되는 제품의 질적인 수준과 가격 그리고
납기와 대금결제 조건이 기본적인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좀더 구체적으로 제품의 결여도 및 작업의 난이도를 고려한
서로간의 이해와 융통성이 바탕이 된 후 판매업자는 그것을 이행 할 수 있다면
그 장사는 성립이 되는 것이다.

판매를 하려고 들면은…물건부터 갖다 놓으라는… 물 건너 하는 장사의
통념상 이해 하기가 힘든 요구를 하며

구매를 하려고 하면은 생산공장으로 접근하기 까지 몇 군데서 따라 붙는다.
조선족 통역.진출구 직원. 외에도 명분 없이 자리를 같이 하는 몇몇 사람들...

그간 해온 장사의 여러 가지 형태 중 어느쪽으로 접목을 시도 해보고
다시 고려를 해 보아도 기본적인 감각으로 와 닿는 그들에 대한 불신감은
중국에 대한 환상에서 일단 한걸음 물러나게 하여서
일년 여 기간의 공백이 있다가 ...

중동지역 출장 중 같은 바이어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대만의 공급업체
"루"사장을 알게 되었다.

일부 동일한 제품을 같은 바이어 에게 판매를 하는데. 오파 가격이 우리 가격
보다 30% 나 낮은 게 아닌가.
한국에서 생산 하는 것보다 이들로부터 공급을 받아 제 3국으로 판매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빨간색 홍차를 나눠 마시며, 이 친구를 통하여 중국 문을 다시 두드려 보자는
생각을 할 때에"루"사장도 뭔가를 느낀 듯… 호기 있는 눈길을 보내온다.

그간 적절한 공급 처를 물색치 못하다가 만나게 된 “루”사장은
5년 전 부터 투자해 놓은 중국공장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의 부인인"마리"는
기존의 대만 공장을 관리하며 연간 4백만 불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으나,

마케팅에 의한 판매능력 보다는 공장 관리에 비중을 두고,
대만의 트레이딩 업체에 로칼 판매 의존도가 높은 공급업체 였으며
거래선 다변화를 위하여 실제 구매자를 모색 하려는 시도로 여러 번 출장을
다니기는 하였으나 까다로운 다큐먼트 하자와 크레임 에 적절히 대처하는 경험
이 부족하여 몇 차례 손실을 감수 하다 보니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 였다.

오 사장의 해외 무역에 대한 감각은 경우에 따라서 치고 빠지는
현지 상황 판단력이 능숙 하였기에 일단, 이해의 공통 분모는 마련된 것 이며
직접 거래를 해 보니 서로간에 제대로 만나기는 만난 것, 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초기 2년간은 이들의 물건을 받아서 한국산으로 포장을 바꾼 후 나가게 되는
물건의 짭짤한 마진에 재미를 붙이게 되다 보니…

한국의 기존 거래선 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으며 제품관리
및 개발을 위해서는 아예 이곳 에다가 사무실을 만드는 게 효율적 이라고
판단이 되어서 한국은 최소한의 업무기능을 위한 직원으로 규모와 인원을
축소해 놓은 상태로 아예 상주를 하게 된 것이다.

서울사무소의 업무기능 과 중국사무실의 현지 관리 및 안정된
대만 공급처 와의 거래형태는 그 동안 소규모 자영업에서 오는 불확실한 시장
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 해 나 갈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가끔씩 갖는 긴장감도 일의 활력이 될 만큼 오 사장의 시장접근에 대한
능력과"루"사장의 제품 생산에 대한 경험이 어울러져 장사는 순풍에 돛 단듯
하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더욱 쌓이게 되어 서로간에 적잖은 금액의 여신을
유동적으로 갖게 될 만큼 업무의 탄력을 붙여 나가게 되었다.

중국에 들어와 있는 자체가 선전 포고 된 전쟁 이기에 피아 간에 사상자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간의 일방적 패배에 비한 다면은 대만업체의 경험과 노력에
편승 된 행운을 갖게 된 경우 라는 것을 중국에 정착해 있으면서 알게 되었고

더불어 중국 본토일 지라도 아직 까지는 중국 사람들 과의 직거래 보다는
타이완 이나 홍콩업체 등… 화교 권을 우회한 상거래가 위험부담이 적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허 허 허~ 형 씨가 운이 좋다기보다는 그간 쌓아온 경험과 노력이 결과를
갖게 된 것 이겠지요.

운도 말이지요. 노력하고 준비된 사람이 아니고는 잡지를 못하오.

아니, 그것이 와도 알지를 못 할뿐 더러 더욱이 우리 같은 외국인 에게 까지
돌아올 운 이라는 것은…… 이땅 에는 없소이다.


 

누가 중국을 아는가?(4)

 

전재산 칠 천원을 주머니 깊숙한 곳에 간직한 채
옷가지가 담긴 가방을 끌고 찿아 간 곳은 시내 중심가 에서 버스로
사십 여분이 걸리는 외곽 지역의 허름한 아파트 6층 이였다.

방 하나와 작은 거실 그리고 부엌 안 화장실에 샤워기 하나가
달랑 달려 있는 월세 삼백원 짜리 집 이다.

밤이 되어도 불을 켜지 않은 채 갇혀진 야수처럼 어둠을 응시하며 긴긴밤을
지내왔다. 울분과 분노를 삭이면서…..

가까운 대학의 어학 당 에 2개월 짜리 초급반의 수강 신청을 한 것은.
겨울잠 자듯이 한달 을 지낸 3월 초순 이였다.

더욱 꺼칠해진 피부와 눈에 띄게 늘어난 흰머리의 사십이 넘은 학생을
호기심 으로 바라보는 자식 또래의 한국 학생들 그리고
일본 및 태국 이나 유럽으로부터 중국어를 공부 하러 온 학생들...

그들 틈에 끼어 아침 일찍 등교를 하는 생활은 20여년 전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장만 간신히 받은 그에게는 낯설고 어색 하기만 한 생활 이였다.

어릴 적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면서 중학교 졸업이후 영어 단어
하나 외어 본 기억이 없는 그는 공부에 대한 방법이나 요령도 없었기에 멍하니
칠판만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계속되다가 …

어느 날부터 쓰기를 시작 하였다.

공책 한 장에 한문 한글자를 다 채우고… 다시 넘기여 다른 글자 한자를
다 채우며 한장, 한장, 써 내려 갈 때 마다. 사별한 부인의 얼굴을 떠올렸고.
자식으로 효도 한번 못해보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
혼자 있는 딸 자식을 걱정 하였다.

뜻을 몰라도 좋았고 글씨가 거칠어도 상관없이 매일 매일 지칠 때 까지
한문 쓰기를 계속하며 지내던 어느날

댓 명의 한국 학생들이 집으로 찿아 왔다. 아저씨 ~
우리끼리 상의 한 것이 있는데요.
음… 지금 우리들 가장 큰 애로점이 식사거든요. 한국 식당을 가려면은 멀고…
또 비싸기도 하고…

학교 주변에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기숙사 에서 라면으로
해결하던 학생들이 돈을 모아 보겠으니 식당을 하면은 어떻겠냐고… 제의를 한다.

얼마씩 걷어준 돈을 들고 주방용품 과 냉장고 등을 샀으며…
재래 시장과 야채 시장을 다니면서 식 자재 비용을 알아 보았고…
스레트 지붕과 나무 판자로 대충 손님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진 식당은
일년후면 재 개발 공사가 시작될…

흙 먼지 날리는 공터 한구석의 간판도 없고 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공사장
함바 집 같은 수준 이였다.

몇 푼씩 각출해준 한국 학생들은 재미있어 하며 친구들과 같이 자기집
드나 들듯이 하였고...
한국사람이 식당을 한다는 호기심과 같은 학교 학생 이라는 친근감으로 오는
일본 학생들… 그리고 같이 와주는 교수와 학교 관계자들.

골프장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주말에는 주재원 들의 자가용 이 몇 대씩
와서는 비빔국수 한 그릇 이라도 맛있게 먹고 갔으며...
측은해 보여서인지 손수 시범을 보이며 가끔씩 요리지도를 해주는 한국 엄마들
덕분에 장사는 그럭저럭 벌이가 되어서 생활비나 학비 걱정은 한숨 돌리는
가운데 … 어느덧 일년이 지났다.

그간 김치 담그는 솜씨도 수준급이 되었으며 파전을 부치는 손길이 분주
할 때에도 삼겹살을 썰거나 북어 국의 간을 맞춰 가면서…
음식의 종류에 따라서 감자의 크기를 모양새 있게 썰어 되는…
그럴듯한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낮부터 간헐적으로 쏟아 붓던 소낙비 가 이제는 본격적인 장마비로 바뀌어
주룩 주룩 이대로 밤새도록 내릴 모양이다.

3 학기나 등록을 하며 다녔던 학교의 삼십대 중반 나이인 어학당의 교수는
그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며 ‘고맙다’ 고 하였다.

무엇이 고마울까 ……
자식 같은 학생들 하고 공부를 하면서도…
시험지를 백지로 내면서도 이름 석자 하나만은 꼬박 꼬박 적어내며…
강의가 끝나고 식당일 때문에 성급하게 뛰어가는 그의 뒷 모습을 보면서…
일년 육개월의 기간 중 거르지 않고 강의실의 자리를 지켜준 그가 고마웠으리라.

다시 시간이 되면은 중급 반으로 수강신청을 해달라고 하며
두 손을 꼬옥 잡는다. 
 

출처 : 칭다오 한국인 도우미 마을
글쓴이 : 스프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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