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창업을 준비하며/중국무역·사업 경험기

[스크랩] 누가 중국을 아는가?(1,2)-글:남풍.

주님의 착한 종 2010. 9. 13. 15:18

어제 광저우에서 사업하고 계시는 참 반가운 벗의 안부 전화를 받았습니다.잊고 지내던 옛 동지의 소식은 이 여름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와 같습니다.여기 예전에 남풍님이 중국통에 쓴 글을 찾아 올립니다.(우리카페 닉네임은 느타리 혹은 ivan으로 씁니다.).한 사람의 삶의 정신이 그리 아름답게 느꼈기에 여기 그대로 올립니다. 개인적 인생사라 마음에 감동이 옵니다.  

 


 

 

누가 중국을 아는가?(1)

 

그를 만난 것은 재작년 7월말 이였다.
남방의 갑작스런 소나기와 함께 후덥한 바람이 지나갈 때 까지 작은
가게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찿아 간 곳의 골목길 허름한 건물 일층에서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예~ 아까 전화하신 분 이시지요. 올라 가시지요.
2층의 자기 방으로 안내하는 그의 뒷모습은 여유도 없고 조바심도 없는….
그저 그전부터 알았던 거래처를 만나는 사람처럼… 덤덤한 분위기이다.
조잡한 가죽제품의 샘플들이 먼지에 쌓여서 벽에 걸려있다.


저는… 오 진수 라고 합니다만…… 그래요, 뭘 도와 드리까요 ?
아는 후배가 얘기 하기를…
아, 글쎄 그 얘기는 아까 전화로 말씀 하셨고… 본론을 말씀 하세요.
예. 친척의 부탁이 있어서 조카 애 학교를 좀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학교등록 이야 돈만 내면 되는 것이고 기숙사 비용과 식대는 월 USD500
정도로 계산 하시면 되지요. 우리집 에서 하숙을 하려면 USD600 입니다.
독방에 방마다 에어컨이 있고 세끼를 한식으로 드리지요. 근데 지금은 방이
없네요.

괜찮습니다. 아직 이곳의 학교로 확실히 결정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하기에 … 와 봤습니다. 근데 뭐 하시오.
예 ? 이곳에서 무슨 일 하시냐구요?

순간 전화가 왔다. 서투른 중국말 이기는 하나 거침이 없다.

가만히 그를 들여다 보았다. 강력한 눈매와 자신감 있는 표정. 아무렇게나
걸친 옷가지도 자신감의 표출 이리라.
벽에 걸려 있는 제품을 봐서는 장사가 될듯한 내용들은 아니다.

싼 인건비를 이용 한다고 하기는 하나 고급 소재에 고단가 제품으로 가야
유통 마진 이라도 챙길 수 있던지,
아니면 Invoice 단가를 적절히 책정하여 관세를 피해 갈수 있는 여유라도
있을 터인데.
이런 물건들이 한국으로 가봐야 시중 노점상 들 이나 팔 수 있는 수준인데.
꼭 필요한 생필품이 아닌 다음에야 과연 한국 사람들이 싸다고 아무거나 들고
다니는 사람들인가.

3-4 군데의 유통 과정을 거치면은 돌아올 것은 4-5%도 챙기기 어려운 제품들
이며 또 이런 제품의 유통 과정에서는 깨끗한 상 도의를 기대 하기가 쉽지않은
사람들이 적잖이 있는 곳이기에 장사 시기가 안 좋을 경우 누구 하나가 보따리
싼다면 그 손실을 그대로 감수해야 하는…

뭔가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아이템 이다.

20년 가까이 단일품목의 무역업에 종사해온 오 사장으로서는 그간 갖가지
장르의 장사에 종사 하는 사람들을 접해 왔음으로 비록 자기 아이템이 아닐지
라도 짧은 시간 내에 상대방의 장사 상황이 파악 된다.

우선 외모나 말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일반적인 장사경험을 쌓아온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우연히 만나왔던…..
장사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온 체계도 없이 장사를 하고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도 뭔가가 다르다.

잠시 기억이 스쳐간다.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태권도 사범의
직분을 이용하여 자리 잡은 후 잡화 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유학을 왔다가 취직시기를 놓치다 보니 현지에 그대로 눌러앉아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도 꽤 많이 있었고…

계급 대립을 타파 하려던 프로레타리아 시절에 허무하게 무너진 3공화국을
애처로이 바라보다가 혁명적 역사성의 인식과 함께 이제 한국에서 내가 할 일은
없노라고…
"가노라 삼각산아”를 외치며 남미의 한 국가에 자리잡아 새로운 장사의 투쟁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중 다른 한명은 선명하게 생각이 난다.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시절까지 자기가 자란 도시에서 더 이상 싸울 상대를 찿지
못하여 지방원정 까지 다녔던 그가 갑자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친구들이 교회 앞에서 기다리며 “ 네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놓고 너 혼자
천당 가려 하느냐 ” 라고 하며 두둘겨 맞을 때는 울었다고 한다.
하느님.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선교사 수업을 마친 후 아프리카 변방 국으로 간 그는 지역공예품을 유럽으로
팔고있다. 선교 활동을 위하여 지역 주민들과의 친밀감을 유지 하기 위해서 이다.

한 지역의 교민들이 3-400명 정도에서 수년이 지나도록 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한국식당 아주머니, 그런 국가에 비하면은 중국의 교민은 몇 명인가 ?
인천시 "위해 구”로 얘기하며 전라도 “청도 시"라고 할 만큼 집성화 된
산동성 과 대도시와 연안을 따라서 정착된 한국교민이 20만 명이 넘는다.

게다가 매일 매일 비행기를 채우는 출장자 들과 관련된 갖가지 업종의
종사자들…

이 사람은 그 중 어떤 부류일까. 다소 궁금해 진다.

 


 

누가 중국을 아는가?(2)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히 하시오 ?
아… 예~
근데 노형께서 는 이런 가죽잡화 공장을 하십니까.
이거 지금 정리 중이지요. 다른 일 하다가 한 일년 손대 봤는데.
그간 알토란 처럼 벌은 돈 20만원 만 날렸수다.
주문이 적어도 걱정이고, 많다고 이윤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돈만 자꾸 잠기고…
그저 하던 일 이나 계속 하는 건데.

그가 이곳에 도착 한 것은 1997년 2월 이였다.
사근 사근 스며드는 남방의 추위는 낯설은 이방인을 감싸줄 온기를
기대 할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주머니에 있는 전재산을 다시 확인한다
미화 육백불 과 한국 돈 팔만원… 동전 몇 잎 까지 만지작거려 본다.

IMF 한파에 신발만 간신히 챙겨 신고 나온 잔인한 그 해 겨울의 기억은
부인의 자살로 마무리 되었다.

지방의 유복한 교육자 집안의 돌연변이로 얼룩진 어린시절은 김 두한 의
후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무리들 속에서 가출로 일관된 생활 이였고….
뒷골목에서 만나게 된 부인과는 고등학교를 졸업 하기도 전에 갖게 된 지금의
딸 자식이 이미 상고를 졸업 하여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이가 41세 였다.

결혼 후 집안 어른의 도움으로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십여 년간 하다가
부동산 업으로 시작한 사업이 큰돈을 모으게 되었으나 건축업 까지 손대게 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원.부 자재 수입의 대금 결재 일자가 마침 환율이 천정부지로 올라가 있을 때인
12월 초순에 몰려 들은 것이다.

지방에 노른자 임야를 갖고 있던 게 다소 있었으나
당장 현찰을 마련 할길 이 막연한 상황에서 어음과 가계수표 까지 돌아오다
보니 가차없이 차압이 들어 오게 되었다.

더 이상 털어 낼 것도 없다, 라는 것을 감지한 거래 은행에서도 그 정도 선에서
내부 결재를 끝낸 것 까지는 좋았으나 …
선천성 질환과 유방암까지 겹쳐서 수년간 투병 생활을 하던 부인이
자살을 한 것이다.

딸 자식과 같이 납골당을 걸어 나오면서 …
앞으로는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 동안 영위해온 여유 있던 생활의 잔상들을
두 번 다시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상대적 박탈감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고 그래서 선택 한곳이 중국 남방의 한구석 이였다.

네가 결혼 할 때쯤 에는 돌아오겠다고…
공항에 마중 나온 딸자식과 약속하며 돌아서는 날
금방 눈 이라도 내릴 것 같은 시커먼 하늘에 막 이륙하는 비행기 굉음 소리가
앞날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었다.

허 허 허 … 난 이래서 여기에 있게 되었소만…
형 씨는 무슨 일을 하쇼.

한 여름이기는 하나 시간 지나는 줄 모르고 있다가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소주 한잔 하시겠소.
이거 초면 이기는 하나 형 씨 인상이 참 좋소.

술이 한 두잔 건네지면서… 그 뒤의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중국에 온지 4개월쯤 지나 초여름의 태풍을 동반한 폭우가 며칠이 계속
될 때쯤에 한국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법원에 출두 하라는 명령서가 왔다는 것이다.

기억해 보니 죽마고우 이며 같이 건축업을 하던 친구의 빛 보증을 서준 것이
있었다.적은 금액이 아니 였는데......
자금난에 압박을 받던 친구는 남아 있던 것을 챙기어 외국으로 야반도주를 한
모양이다.

본인 또한 중국으로 와있으니 은행에서 는 같이 공모 한 것이 아니라면은
들어 와서 해명을 하라는 것 이였다.
주머니를 털어봐야 먼지밖에 없는 상황에서 잘못 되면은 친구의 죄까지 뒤집어
쓸 상황이 되었고...
안 들어가도 마찬가지 결과 이기는 하나 그로서는 당장 밥 한끼 먹기도 힘든
상황 이였으며 달리 대책도 없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

그저 돈 있고 힘있는 놈들이니까. 지들 편한 대로 해 놓았겠지. 기소중지로…
딸년 결혼식에도 못 가봤는데…
두달 전 사위와 같이 이곳을 다녀 갔단다.
서랍을 뒤적이며 손자의 백일사진을 찿아 보여주는 그의 눈가에 물기가 서린다.


주섬주섬 안주거리와 술 한병 을 더 챙겨 들고 왔다.
형씨 얘기도 좀 해 보시 구랴.

출처 : 칭다오 한국인 도우미 마을
글쓴이 : 스프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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