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의 희망 메세지 중에서]
거창하게 무슨 로마인 이야기를?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시대상황에 따른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사람 사는 근본 이치는 같은 듯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늘어난 인구를 자국 안에서 부양할 수 없을 때 통상 인구 유출이란 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은 먹고 살 수 없을 때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땅으로 이동하는 법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변치 않는 현상이다.
자국 안에서 먹고 살 수 없는 경우 외에 권력 투쟁에 실패했거나 경쟁 대열에서 이탈한 자들도
종종 이 대열에 합류한다.
정치적 격동기에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러한 사람들이 대폭 늘어난다.
해당 민족이나 국민이 진취적 기질을 띄고 있다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고대에는 본국을 떠난 사람들이 대체로 선주(先住)민족이 없거나,
있어도 정치체제가 허약한 지역을 선택했다.
기원전 500년 경 서구에서 가장 먼저 문명의 꽃을 피웠던 그리스인들도 경작지가 빈약한 자국을 떠나
지중해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다.
식민도시라고는 하나 용어가 그럴 뿐 근대 제국주의와는 달리 본국으로부터 받는 정치적 영향은 없었다. 이탈리아 중남부를 비롯해 동으로는 소아시아 지역, 서쪽으로는 지금의 스페인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그리스 식민도시에 기원을 둔 나폴리도 그 명칭이 ‘네오 폴리스(Neo Polis)’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의 ‘신(新) 폴리스‘. ’신 도시‘라는 뜻이다.
마치 미국을 건설한 이들이 신대륙 곳곳마다 ‘뉴 New ○○’라는 이름의 영국 도시 이름을 딴 신도시를
세운 것과도 같다.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살았던 극동지역 동양의 고대인들도 다르지 않다.
동북지역에서 발흥한 이 지역 최초의 고대국가 부여국 역시 부여국에서 일탈한 고구려,
고구려에서 일탈한 온조와 비류, 소서노 등 그 정치적 정통성을 잇고자 하는 정치세력들로 인해
깃발이 전수되며 부침을 거듭하다가 지금은 충청남도 ‘부여군’의 명칭으로 존재감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백제 멸망 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일본으로 갔던 일단의 정치세력들은 일본 열도 도처에 ‘백제’라는
명칭을 남겼다.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 현지인 및 현지문화와의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고,
접촉은 정보라는 형태에 의한 자극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더해지면서 이윽고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명이 주변부에서 탄생한다.
물론 탄생 시점에서는 주변부지만 그것은 주변부의 소문명으로 끝날 수도 있고,
차츰 확대된 끝에 마침내 새로운 중심부가 되기도 한다.
구 소련의 해체와 몰락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도 불과 몇 백년 전 건국 초기에는
유럽의 주변부에 불과했다.
농 삼아 하는 말로 “발 달린 짐승이 어딘들 못 가랴?”가 있다.
유사 이래 수많은 세력과 군상들의 이합집산이 사람 살 수 있는 곳
어디에선들 상시적으로 이루어져 온 가운데 그 세력들이 더러는 융성의 물살을, 또 그보다
훨씬 많은 세력들은 자취도 없이 스러져갔다.
융성과 쇠락,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이동해 온 세력들이 새 삶의 터전을 일군 곳에서 어떤 자세로 자연스레 역사적 흐름을
타고 갔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서구문명의 기원은 그리스에 두어야 할 것이로대 그 기틀을 확립한 것은 당연히 ‘로마’이다.
서양인이 아니면서도 <로마인 이야기>란 대작을 집필한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는
30여 년간 이탈리아에 거주하며 로마문명의 융성과 쇠락의 단초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리스와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지중해 세계에서 그야말로 아주 보잘 것 없었던 후진 신흥 도시국가
‘로마’가 어떻게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는지…….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라틴어로는 갈리아인, 대체로 지금의 프랑스
지역 거주)이나 게르만인(대체로 지금의 독일 지역 거주)보다,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당시 이탈리아 북부 지역 거주)보다,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지금의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 지역 거주)보다 뒤떨어진다고
스스로 인정했던 로마인이 왜 그토록 그들만이 번영할 수 있었는지,
또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는 단언하진 않지만,
‘수용성과 개방성,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국가 운영 체제’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리스 등 당시 주변 선진국들이 ‘제로 섬’ 게임을 하며 내부적으로 정치적 대립을 거듭하는 동안
그들은 왕정, 공화정, 제정을 가리지 않고 오늘날 ‘윈 윈’에 해당하는 정치제도를 구사해
반대파도 끌어안으며 내부 단결을 도모했다는 것이 그 첫째이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절충을 통해 더디지만 국론 분열을 피하며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의 개방성과 수용성은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로마가 도시국가를 탈피하고 장화처럼 생긴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후 처음으로 맞은
해외 전쟁은 ‘제 1차 포에니 전쟁(페니키아인들과의 전쟁이라는 뜻,
카르타고와 지중해의 패권을 다툰 전쟁)‘이었다.
그 전쟁을 치른 후 지금의 시칠리아 섬은 로마의 영토가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그곳은 ’시라쿠사‘ 등
그리스계 식민도시 위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전쟁 이후 로마에 ’그리스 열풍‘이 불었다.
원로원은 솔선하여 피정복민을 가정교사로 초빙하거나 비서로 고용하고,
자제들을 피정복지로 유학보냈다.
물론 당시에는 그리스어가 라틴어보다 언어로서의 완성도가 높고 그리스 문화 자체가 뛰어났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의 지도층이 앞장 서서 자제를 조선에 보내 조선어와 조선문화를 배우게
했다고 보면 이해되기 쉽다.
우리의 경우는 슬프게도 그와는 반대로 조선어 말살을 넘어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해야 했다.
로마인이 남달랐던 것은 자기들이 뭐든지 다 하려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그리스계 식민도시가 많았던 시칠리아 섬을 장악한 후에는
예술도 철학도 수학도 모두 그리스인에게 맡긴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방성을 보였다.
훗날 ‘그리스 신화’ 따로 ‘로마 신화’ 따로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로 전해질 정도에 이르렀다.
물론 그 때문에 2,300년도 더 지난 지금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서구의 신(神)들 이름을
‘아프로디테’와 ‘비너스’, ‘제우스’와 ‘쥬피터’ 하며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두 개씩 외워야 하는 문제를
발생시켰지만…….
그들은 정복지마다 피정복지의 지도층 자제 수 백 명을 인질로 데려갔지만,
그건 표면적일 뿐 로마 상류층 집안에 맡겨 충분한 교육과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들이 훗날 장성해서 고국에 돌아간 다음 친로마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혹 미국의 ‘풀브라이트’ 장학생 제도도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아닐까?
사실 우리 나라 정치계와 학계를 비롯한 사회지도층은 통계자료를 보기 민망할 정도로
온통 미국 유학파 일색이다.
하긴 G2 국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역시 최근 이와 유사한 제도를 출범시키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 이야기를 해 보자.
UN 통계 기준으로 보면 본국을 떠나 타국에 상주하는 국민의 본국 거주 인구 대비로 한국은 비율로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세계 2위,
절대인구수로는 중국의 화교 다음으로 세계 2위이다.
나라 없이 2,000년을 떠돌던 유태인이나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인구대국 중국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사실상 비율로나 인구수로나 세계 1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어딜 가든 한국사람 없는 곳은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물론 UN에서는 1년 이상이면 이민으로 간주하고 있고, 또 중국에서는 타국 국적 취득을 기준으로
‘화인(華人)’과 ‘화교(華僑)’를 구분하고 있지만 대체로 의미는 비슷하게 새길 수 있다.
이처럼 무지 많은 한국인들이 본국을 떠나 해외를 떠도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자국 내부의 경제력이 이들을 다 부양하지 못해서?
근대 이래 4대 강국 사이에 낀 반도라는 지정학적 문제로 인해 어느 나라보다 정치적 격변을 많이 겪어서? 타고난 기질 자체가 진취적이라서?
아니면 지금 거론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 모두 다?
이러한 문제들을 원천적으로 분석하기에는 내 능력이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그건 훌륭한 인문학자들의 몫이 되겠다.
다만 여기서 짚어 보고자 하는 것은 해외 상주 한국인들이 비록 2,00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있다
할지라도 당시 로마인들이 취했던 자세만큼은 분명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거라는 점이다.
매우 상대적인 이야기지만,
‘100명이 모이면 100가지의 의견과 주장이 있다’던 그리스인들은 문명만큼은 찬란하게 꽃피웠을지언정
그것을 전파하는 데는 로마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불가능했던 반면
애시당초 가진 것 없었던 로마는 개방과 수용을 무기로 상대방을 존중해 가며 무한 확장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정치체제로서의 로마는 마감된 지 오래지만, 영어는 물론 오늘날 대부분 서구 언어의 뿌리가 라틴어라는
점이 말해 주듯 로마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다시피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중국과의 수교 이래 해가 거듭될수록 중국에 장기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수효도 꾸준히 늘고 있고,
조기 진출했던 상주 한국인들의 체류 햇수 또한 차츰 길어지고 있다.
대체로 장기 거주 10년을 기점으로 이들을 지칭하는 ‘신 조선족’이란 용어가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더러 이를 줄인 ‘신선족’이란 용어도 쓰이고 있다.
(소리글자인 한글에서는 ‘신선(神仙)’이란 뉘앙스가 느껴지지만,
뜻글자인 중국어에서는 구어체 낮춤말인 ‘선족’이 있으니 굳이 쓰려면 아무래도
‘신 조선족’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용어야 어떻든 이처럼 일정한 사업적 성과와 함께 긴 체류기간을 가진 계층이 발생할 정도로
폭과 뿌리가 넓고 깊어진 중국 내 한인사회가 형성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훗날 어느 시점에서는 미주지역이나 일본지역을 능가할 정도의 규모와
심도를 가진 사회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럴 가능성은 다분하고 또 이미 그 조짐도 여러 면에서 감지된다.
주변부 문명 형성이라는 거창한 문제는 일단 먼 훗날의 이야기로 치부하자.
그러나 이 시점 중국 한인사회에서 더 이상 도외시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부분은
무엇보다 내, 외부적인 문제를 통털어 ‘개방적 수용’의 자세와 함께
여기에 바탕한 시스템의 안정적 운용이 아닌가 한다.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카르타고’도 제한적이고 폐쇄적이었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때마침 그리스의 국가 채무불능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굳이 재중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는 틀림없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당장 이 시점에서는 표면화된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머지 않은
장래 우리의 자녀대에만 하더라도 그건 ‘시너지’가 되었건 ‘부메랑’이 되었건 어떠한 형태로든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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