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의 한인촌 왕징의 변두리 아파트에 거주하는 조근형(38세)씨의
하루 일과는 주로 세수도 하지 않은 채 하는 컴퓨터 게임으로 시작된다.
하루 종일 게임에 몰두하고 피곤하면 그 자리에 눕는다.
조씨는 혼자 살면서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식사도 주로 집에서 간단히 해 먹는다.
생활비는 서울에서 가족들이 송금해 주는 돈으로 충당하며 근근이 버틴다.
이 생활을 벌써 여러 달째 하고 있다.
"왜 취직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 곳 실정을 몰라서 묻냐? 이 나이에 마땅히 취직할 데도 없고
급여를 만족할 만하게 주는 데도 없다”라는 그의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온다.
하루 종일 게임을 하는 이유는 단지 "당장 할 일이 없어서"라고 한다.
조씨도 한 때는 “차이나 드림”이 있었다.
중국 진출 붐이 한창 거세던 2000년도 초 베이징으로 건너와
부푼 꿈을 안고 어학연수를 끝냈다.
저축한 돈, 이리 저러 빌린 돈을 밑천 삼아 이런 저런 사업을 시작해
몇 번의 실패를 겪고 사기까지 당하는 바람에
지금은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에 이르렀다.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자본도 없고 의욕도 없다.
그러나 결코 취직은 하지 않는다.
중국 수준의 급여를 받고 여기서 일하려면 뭐 하러 중국까지 왔냐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도 없다.
조씨는 요즘 스스로를 “막장”이라고 칭한다.
인근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한호경씨(39세)도 마찬가지다.
90년대 후반 중국으로 건너와 유학원, 식자재 유통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으나 모두 실패해 살고 있는 집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생계를 위해 주위에 조금씩 빌린 돈은 점점 눈덩이처럼 늘어만 갔다.
그러나 한씨의 경우는 조씨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한국에 처자식이 있는지라 그대로 주저 앉을 수 만은 없었다.
닥치는 대로 아는 사업주들의 소일거리라도 거들며
푼돈이나마 버는 대로 한국으로 꼬박꼬박 송금을 한다.
여권 불법 매매의 유혹을 극복한 한씨는 최근 비교적 대우 좋은
중국 기업체에 취직이 돼 어둠 같은 “막장”을 벗어나 재기를 꿈꾸고 있다.
조씨와 한씨의 경우는 중국 베이징의 한인사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실업자 30대들의 전형적인 생활상이다.
한때 차이나 드림을 꿈꾸고 중국으로 건너왔지만
결국 빈곤층으로 전락한 30대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 발효된 신 노동법과 세제 개편 등으로 중국의 사업 환경이 악화되면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하고 제조업이 밀집된 칭다오 등지에는
야반도주하는 한국 기업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 등지에도 사업에 실패한 이들로 인해
한인사회가 점점 슬럼화 되어 가며 젊은 실업자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막장” 수준을 간신히 벗어난 베이징의 30대들도 스스로를
“장돌뱅이”라고 지칭한다.
중국 기업체에는 저임금과 중국어 실력 때문에 취직할 엄두를 못 내고
주로 좁은 한인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직종인 유학원, 식당, 여행사,
잡지사, 유치원, 미장원 등을 전전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식당 지배인으로 일하던 이가
오늘은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는 식이다.
그나마 해당 사업주들도 늘 경영난에 시달리다 보니
언제 문닫을지 모르기 때문에 처지는 늘 위태롭기만 하다.
과거 중국인 빈민층이나 한국인 40~50 대 이상 사업에 실패해 몰락한
이들이 차지하던 베이징 왕징 등지의 APT 지하방도
슬슬 이들 30대들이 문들 두드리고 있다.
왕징 주변의 웬만한 아파트 시세가 지난 3~4년간 2배 가까이 올라
임대료 내기가 벅차졌기 때문이다.
중국과 베이징을 오가며 사업을 하고 있는 박정훈(34)씨는
“한국의 언론들은 중국에 진출한 제조업의 몰락에 대해서만 조명하지만
사실 중국 대도시에서 몰락한 한국 젊은이들도 큰 사회적 문제다”라고 말한다.
“일부 주재원을 제외하고 보통 이 곳의 30대 젊은이들 3명 중 1명은
‘막장’이라고 봐도 좋다.
특히 유학생들이나 어학연수생들, 혹은 한국에서 무작정 건너온
젊은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 소자본으로 사업에 실패하다가
한번 망하면 곧바로 하층민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곳은 인건비가 낮기 때문에 재기조차도 힘들다”고 한숨을 쉰다.
실제 베이징 한인촌의 당구장이나 만화가게 등지에는
대낮에도 할 일없이 시간을 때우는 허름한 차림의 30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결코 극한 상황이 오기까지 일자리를 찾지 않는다.
중국까지 와서 3D 직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 이라는 체면도
있고 급여 또한 대부분 현지물가 수준으로 지급되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회사가 아니고서는 한화 100만원 이상을 급여로 주는 곳은
흔치 않다.
많은 현지의 교민들은 “젊은이들의 중국 진출은 신중해야 한다.
웬만한 소자본으로는 마땅히 시작할 사업도 없거니와
충분히 시장조사를 하고 와야 한다.
‘땅이 넓고 13억 인구가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하는 중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강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