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마술사였어요.
열이 난 머리에 엄마 손이 놓여지면 시원해지고, 아픈 배도 스르르 나았죠.
그 손으로 조몰락거리면 온갖 음식들이 척척 만들어지고
엄마 손이 가는 구석구석마다 윤이 났어요.
참 신기해요. 세탁기도, 전기밥솥도, 학교급식도 없던 시절.
그 많은 아이들 밥 먹이고, 빳빳하게 풀 먹인 교복 입히고, 도시락을 몇 개씩
싸서 키우면서도 누룽지도 튀겨 놓으시고,
헌 털실 풀어 스웨터도 짜주셨잖아요.
그러다가 결국은 비단실 자아낸 번데기처럼 자신의 모든 걸 쏟아내고 가셨지만….
그런데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사셨어요?
왜 맨날 “난 괜찮다”란 말만 하셨어요?
왜 항상 맛있는 것, 좋은 것은 자식들에게만 내놓으셨어요?
왜 바람 피운 아버지를 그렇게 맥없이 용서해주셨어요?
치매에 걸려 당신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시면서도
“엄마, 어때?”라고 물으면 무조건 “난 괜찮다”라고
자동응답기처럼 답하던 엄마.
먹을 것을 드리면 먼저 우리 입으로 넣어주던 엄마….
자식들에게 힘들다고, 속상하다고 좀 화도 내시고 푸념도 하시지 그러셨어요.
친구들이랑 고스톱도 치고, 훌쩍 여행도 다니시고, 예쁜 옷도 사 입으시지
왜 그렇게 스스로를 모범수로 만들어 사셨어요?
물론 엄마가 종신 범으로 혀 깨물고 참으신 덕분에
자식들 무사히 잘 자라 좋은 학교도 나오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지만
그건 엄마의 인생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똑똑한 자식들, 성공해 바빠서 엄마 볼 시간도 없었잖아요.
다가오는 어버이날.
그래도 살아계실 땐 그날만이라도 카네이션 달아드리며 회개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이젠 어떡하죠?
하지만 엄마가 안 계셔서 제일 속상한 건
좋은 일이 생길 때 자랑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엄마는 자식들의 성취를 온몸과 마음으로 축하해주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셨잖아요.
엄마의 그 기쁜 표정을 보고 싶어서라도 열심히 살려 했는데….
아무리 늙고 병들고 주책스럽다 해도 엄마,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 품 안에 안겨서 온갖 고자질 다하고 펑펑 울고 싶어요.
생전에 섭섭하게 해드린 것, 멍청하게 군 것, 다 용서해주세요.
그래도 엄마 아시죠?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가 제 엄마여서 너무 고마웠고, 너무 행복했어요.
엄마, 사랑해요.
작가 최 인호님의 ‘엄마는 죽지 않는다.’ 라는 소설의 한 대목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회한의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밤 새워 ‘엄마를 부탁해’를 다시 읽었지요.
한 쪽에는 기도서를 놓아두고..
어제는 잠을 못 이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불을 환하게 켜놓은 채 어느 새
잠이 든 내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같으면 결코 잠이 드시지 않았을 텐데..
김 응천 마리아. 제 어머니입니다.
오늘 아침 한국 시간으로 9시,
병실로 찾아오신 신부님께 병자성사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성사를 보신 다음 잠이 드셨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었습니다.
정말 박복한 세상을 살아오신 어머니..
어머니는 경기도 이천의 평범한 농부의 첫딸로 때어나셨다 했습니다.
세 살 터울 남동생이 있었고,
그 남매가 어릴 때 부모닝을 여의고 작은 아버지 댁에 살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알려고도 않았겠지만
그래서 좋은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19살 풋풋하고 아름답던 처녀시절,
전근 오신 아버지를 만났고,
아버지는 한 눈에 어머니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근엄한 뼈대 있는 양반집, 만석꾼 둘째 아들이 부모도 없는 처녀와 결혼한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을 일이었겠지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돈을 훔쳐 어머니를 데리고 만주로 도망을 갔다 했습니다.
옛날에도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었던지,
훔쳐온 돈이 다 떨어져 굶고 있는 아들을 데리러 사람을 보냈더랍니다.
결혼식 날, 어머니는 찢어진 고무신을 신고 식을 올리셨다고 했습니다.
친정 동네 사람들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고 시샘을 했다지요.
어머니는 그래서 아버지께 감사했고, 시집 안간 손위 올케와 총각 시아주버님,
그리고 도련님을 끔찍이 모셨는데,
그래서 시아버님과 도련님을 빼놓고는 모두 하녀 취급을 했어도 좋았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머니의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돈 많은 부잣집 한량, 게다가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아버지는
어머니 한 분에게만 정을 주기에는 정이 너무 많아 넘쳐 흘렀나 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수를 무척 따르던 삼촌이 전사하시고..
분가를 한 아버지는 마냥 밖으로만 겉돌고..
게다가 딴 살림은 얼마나 많이 차렸던지..
그 많던 유산은 어느새 다 날라가고,
어머니는 어느 날 느닷없이 집에서도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소식도 없는데, 새 집주인이 나타난 것이라 했습니다.
누이 둘과 저를 안고, 어머니는 추운 겨울 골목 입구에서 나타나지 않을 아버지를
몇 날 몇 일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제가 철이 들고도, 여느 아이들보다 더 빨리 철이 들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정은 마르지를 않아, 새 살림을 몇 번이나 차렸고
그 때마다 우리 가족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교직에 계셨던 지라, 소문이 나면 안 되었겠지요.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소문이 났던지..
결국 사표를 내고는 단칸 방 집에 돌아와 몇 년 두문불출 한 채
방을 지켰습니다.
젊으신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한 시간이었습니다.
누나들은 신문을 돌렸고, 어머니는 양색시들 빨래를 해주며 살았습니다.
학교에서 주던 옥수수 죽이 아니었으면 점심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 때, 제 동생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아이를 묻기 전날, 어머니는 머리를 잘라 판 돈으로
아이의 수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가슴에 묻고 잊은 척 하셨지요.
정 많은 아버지는 굶겨 죽였다고 자학을 하시고..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가 복직을 하셨습니다.
이제 고생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우리들의 고생은 끝이 났지요.
적어도 배는 고프지 않았고, 학비 걱정도 안 해도 되었고,
공부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끊임없이 솟구치는 정은 분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은 계속 타 들어 갔습니다.
아버지의 방랑은 환갑이 넘으셔서 끝이 났고,
뒤늦게 철이 드셔서는 자식들 굶기며 키운 죄가 크다.. 한탄을 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결사반대를 하셨습니다만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이유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영세를 받은 후 어머니도 영세를 받으셨습니다.
그 후, 성당은 어머니의 쉼터였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예수님과 성모님에게 맡기고 사신다고 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며..
뒤늦게 어머니의 가슴을 열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죽은 동생이 아직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일곱 여덟 살의 나도 성장하지 않은 채 살아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어머니에게 어린 아들이 되어 손녀들과 함께 어리광도 부리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휴가철이면, 주일학교 아이들 캠프에 휴가를 다 쓰고도
부모님과 우리, 그리고 아이들 삼대가 꼭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바닷가로, 그 다음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계곡으로..
큰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3대의 여행은 계속되었지요.
여름에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휴양지 일대를..
겨울에는 온천 지대나 남해안으로…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 지금까지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며느리에게도 참 고마워 하셨습니다.
큰아들 내외, 손녀들..
제가 보기에도 제 동생들 식구들과는 다르게 우리 집에 오시고 싶어하셨고
손녀들과 놀고 싶어하셨고 며느리가 차려주는 맛깔스러운 음식을 드시고
싶어하셨습니다.
며느리 손녀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러 가셔서는 큰 아들이 건네 드리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기뻐하셨고 제대 봉사를 하는 아들이 대견하셨습니다.
비록 사제는 아니었을 지라도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준 성당에서의
큰 아들 모습이 어머니에게는 큰 행복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몸이 불편하고, 쉴 곳이 마땅치 않은 장모님을 저희 집으로 모시라고 권하신
어머니는 막상 장모님이 오시고부터는 자주 오시지를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과거 20년…
어머니의 80여 생애에서 행복하신 시간이라 하셨습니다.
물론 동생들 가정사로 속상해 하셨던 일이 많았지만..
이제 큰 아들이 중국 청도 땅에 와있습니다.
이제 자리를 잡으면 부모님께 구경도 시켜드리리라.. 생각했었는데
작년에 갑상선 암이 생겼습니다.
8개월에 걸친 항암치료 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는데,
그래서 이번 가을에는 꼭 모셔와 구경을 시켜드리려 했는데..
불과 3개월 만에 재발되어 간과 비장까지 전이가 되었답니다.
노령이라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르겠답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아내가 말합니다.
어머니는 지금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에 계십니다.
어제도 전화를 드렸는데, 잘 듣지도 못하시면서도
제 위궤양이 재발했다는 걱정의 말씀만 하십니다.
실비아에게 큰 아들이 보고 싶다고 하신다면서
엄마는 괜찮다… 네 일이나 잘해라..
그 말씀만 하십니다.
저…
큰 욕심 없습니다.
어머니 연세도 있으시니 오래 사시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그저 조금만 더 건강하셔서, 청도 구경도 하시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큰 손녀 시집가서 아이 낳거든 한 번 안아보시고..
그것도 안 된다면 다만 두 세 해라도..
그것도 욕심이라면 내년 어버이날, 가슴에 꽃을 달아드릴 수만이라도..
제가 아는 모든 분들께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여러분의 종교가 가톨릭이건, 개신교건 불교건.. 아니면 무교이건
여러분의 신께 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조금만 더 사시기를..
그래서 제 마음에 어머니를 담아, 마치 어머니 가슴에 제가 어린 모습으로
살아 있듯이, 제 가슴에도 죽지 않은 어머니를 심을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제발 빌어 주세요.
제 어머니는 김 응천 마리아입니다.
** 저는 이번 주일 아침에 서울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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