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마음을 열고

아내의 거울

주님의 착한 종 2008. 3. 28. 09:55


오늘도 일자리에 대한 기대를 안고 새벽부터 인력시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호가 경기 침체로 인해 공사장 일을 못한 지 벌써 넉달.
인력시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가랑비 속을 서성거리다
쓴 기침 같은 절망을 안고 뿔뿔이 흩어졌다.


정호의 아내는 지난달부터 시내에 있는 큰 음식점으로 일을 다니며
정호 대신 힘겹게 가계를 꾸려나갔다.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 초라한 밥상에서 정호는 죄스러운 한숨만 내뱉었고,
그런 자신이 싫어서 오늘도 거울을 보지 않았다.
아이들만 집에 남겨 두고 정호는 오후에 다시 집을 나섰다.

목이 긴 작업신발 속에 발을 밀어 넣으며 끝내 빠져 나올 수 없는 어둠을 생각했다.

혹시라도 주인집 여자를 만날까 봐 발소리조차 그의 것이 아니었다.
벌써 여러 달째 밀려있는 집세를 생각하면 그는 어느새 고개숙인 난쟁이가 되어 버렸다.


저녁 즈음에 오랜 친구를 만나 일자리를 부탁했다.
친구는 일자리 대신 삼겹살에 소주를 샀다. 술에 취해 고달픈 삶에 취해
산동네 언덕길을 오를 때 야윈 그의 얼굴 위로 떨어지던 무수한 별빛들.
집 앞 골목을 들어서니 귀여운 딸아이가 그에게로 달려와 안겼다.


"아빠, 엄마가 오늘 고기 사왔어.
아빠 오면 해먹는다고 그래서 아까부터 아빠 기다렸어."
일을 나갔던 아내는 늦은 시간 저녁 준비로 분주했다.

"사장님이 애들 갖다주라고 이렇게 고기를 싸주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영준이가 며칠 전부터 고기 반찬 해달라고 했는데 어찌나 고맙던지요."

"집세도 못 내면서 고기 냄새 풍기면 주인 볼 낯이 없잖아."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려서 지금에야 저녁 준비한 거예요.
열한 시 넘었으니까 다들 주무시겠죠. 뭐."


불고기 앞에서 아이들의 입은 꽃잎이 됐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아내는 행복해했다.

"천천히들 먹어. 잘 자리에 체할까 겁난다."
"엄마. 내일 또 불고기 해줘, 알았지?"
"내일은 안 되고 엄마가 다음에 또 해줄게. 우리 영준이 고기먹고 싶었구나?"
"응......."


아내는 어린 아들을 달래며 정호 쪽으로 고기 몇 점을 옮겨 놓았다.
"당신도 어서 드세요."
"나는 아까 친구 만나서 저녁 먹었어. 당신이 배고프겠다. 어서 먹어."

정호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고기 몇점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마당으로 나와 달빛이 내려앉은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가엾은 아내..... 아내가 가져온 고기는 음식점 주인이 준게 아니었다.
숫기 없는 아내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쟁반의 고기를
비닐 봉지에 서둘러 담았을 것이다.

아내가 구워준 고기 속에는 누군가 씹던 껌이 노란 종이에
싸인 채 섞여 있었다.
아내가 볼까 봐, 정호는 얼른 그것을 집어서 삼켜버렸다.

아픈 마음을 꼭꼭 감추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착한 아내의 마음이 찢어질까봐.....

정호는 늦은 밤. 아내의 구두를 닦는다.
별빛보다 총총히 아내의 낡은 구두를 닦으며
내일의 발걸음은 지금보다 가볍고 빛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 연탄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