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55) - 자살비상금 10만 원

주님의 착한 종 2007. 11. 28. 10:09

자살비상금 10만 원

 

성모꽃마을에 들어온 두 번째 환자가 있었습니다.

대장암 말기로 두 달을 살다 가신 분이었는데 이분이야말로 한국의

대표적인 호스피스 환자가 처한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분은 3남매의 맏이로 무당 노릇을 해온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는데

열 여덟 살 때 동네에서 머슴을 살던 남자와 눈이 맞아 살다가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들어갔으나 시어머니 되는 사람은

근본도 없는 년이 누구를 망치려고 들어왔느냐고 남편과 갈라놓기

위해 온갖 학대를 하며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보약이라고 지어온 약을 먹었는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받아먹은 것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한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한 비상약이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고의로 아이를 유산시킨 후 이 자매는 더 이상 이곳이

자신이 살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 이혼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다가 28살 때 둘째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유산의 부작용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자 딸을 입양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것도 잠시, 남편이 한 번 결혼했던 과거를 어떻게 알았는지

온갖 학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학대를 견디다 못해 다시 이혼을 하고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부산으로

내려가 죽어버리자고 결심을 하고는 밤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살을 많이 한다는 태종대를 서성이면서 어디서 어떻게

떨어져 죽을 건가를 찾으며 서성이는데 기구한 운명인지 거기서

지금의 세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도 첫 부인을 암으로 잃고 괴로운 마음에 역시 자살하려고

태종대로 왔다고 합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개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이상하게도

둘 다 자살하러 왔기 때문인지 끌리더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먼저 물었습니다.

“저......혹시 무슨 고민 있으신가 봐요? 여기는 처음 오신 것 같은데

혼자 오셨죠?

 

어차피 죽을 몸인데 대답 못 할 것도 없고 또 한마디로 더 이상

집적거리지 않게 해야겠다 싶어 그냥

  “죽으려고 왔어요.

하고 대답을 했답니다.

정신병자인 것처럼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 한마디가 인연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남자도 대뜸

 “나도 죽으려고 왔는데. 

그러더랍니다.

 

동병상련의 처지가 통했던지 그 길로 소주 한잔 걸치고 죽자는 제안에

부부의 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결혼조차도 순탄하지를 못했습니다.

비록 자살하려고 했던 기이한 인연으로 부부가 되긴 했지만 남편과는

학력차이가 너무나 많이 났고 이 사실은 시어머니에게 또 다시

시집살이를 하게 되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온갖 시집살이를 견뎌내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남편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엄마라고 유난히 잘

따랐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낙으로 시집살이를 이겨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5학년이 되던 해에, 남편의 사업실패로 부산에서

청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때부터 또 고생길이 시작됐습니다.

남편은 청주로 이사를 오면서 직장을 구하지 못 해 매일 집에서

놀기만 했습니다.

 

이상하게 자존심 때문인지 야간경비로라도 취직을 하면 될 텐데

며칠 다니면 그만두고 때려치웠습니다.

주위사람들이 생활보호대상자로 만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귀띔을 해주어도 자존심이 상한다고 그것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아내가 벌어다 주는 쥐꼬리만한 돈이 생활비의 전부였습니다. 

 

이 자매는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술병 뚜껑을 만드는 공장에서 하루

15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25만 원을 받고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6년 정도 일하니까 밤 근무까지 죽어라 일해서 70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10년 넘게 외식 한번 못 했고 뒤꿈치가 다 닳아서 떨어진 슬리퍼를

여름이고 겨울이고 신고 다녔습니다. 정말 몸서리 쳐지는 가난이

지긋지긋한 삶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의 상처와 고된 생활로 몸은 병들고 아프기

시작해 병원치료를 하기 시작했는데, 1999 6월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에 들어갔으나 배를 열어보니

이미 간까지 다 퍼진 상태였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모은 돈으로 1500만 원짜리 전세를 얻은 것이

전 재산이었는데, 병원에 있는 동안 수술비와 약값으로 퇴원할 때쯤엔

1600만 원이 나왔다고 합니다.

평생 아끼고 모은 돈은 병원비와 약값으로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에

빚만 짊어진 그 괴로움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수술할 당시 너무나 통증이 심하고 삶에 희망이 없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는 남이 다 잠든 틈을 타서 자살을 하려고 병원 9

건물의 창문을 다 열어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열리는 창문이 하나도 없고 창살로 다 막혀 있어서 자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을 쓸 게 없다면서 퇴원을 강요해 집으로

돌아왔으나 먹을 것도 변변히 없는 집에서 통증치료는 고사하고

생으로 그 통증을 죽기 살기로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능했던 남편은 간호조차 제대로 해주지를 않았습니다.

남편은 화가 날 때마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노래만 몇 십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 습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5시간 동안을 계속해서 들었다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저기압이라는 경고였다고 합니다.

 

이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엄청난 통증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밤새도록 겨울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증에 몸부림치며 밤을 지새고 나면 이불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배가 고파도 때가 되지 않으면 얻어먹을 수가 없었고 입맛이 없어서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아프면서 처먹고 싶은 것도 많다며 살이 쪄서

안 된다고 하면서 핀잔을 받았습니다.

하루에 두 끼는 국수를 주었는데 그나마 입맛이 없어서 못 먹으면

다음 끼니때까지 고스란히 굶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통증에 시달릴 때마다

 “내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온 것도 억울한데 그것도 모자라서

이런 병에까지 걸려 지독한 통증과 서러움에 시달려야 하다니

정말 신이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며 절규한 적이 수십, 수백 번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생각다 못 해 사람들이 조금씩 주고 가는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빨리 죽는 게 상책이다 싶어 자살용 비상금을 모았습니다.

 

방법은 밤중에 몰래 택시를 불러 잡아타고는 멀리 가서 자살하는 게

계획이었기 때문에 멀리 가려면 돈이 10만 원은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만 원을 모을 때쯤엔 혼자의 힘으로는 걸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옆으로 눕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자 이렇게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며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또 저주하였습니다.

 

그럴 때쯤에 주위 교우의 도움으로 꽃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게 된 분입니다. 꽃마을에 들어와서 두 달간을 지내셨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행복하게 지낸 적이 없다며

평생 지지리도 복이 없더니 이제 죽을 때가 다 되니까

복이 오나 보다고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50평생 얼굴에 화장 한 번 하지 못 하고 살았기에

하루는 봉사자가 누워 있는 얼굴에 예쁘게 화장을 해서

옷을 입혀놓고는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이 사진이 후에 영정사진이 되었지만......

 

임종 3일 전

간호사가 하루는 뛰어오더니 환자의 얼굴이 천사같이 예쁘게 변했다고

말합니다.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잠든 모습이 갑자기 너무너무

아름답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예쁜 모습으로 변하더니

15분간을 그 상태로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에게 알려야 하는데, 하면서도 그 모습에 도취가 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바뀐 후에 간호사가 사람이 죽기 전에 예쁘게 변할

때가 있는데 예수님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는 얘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어서, 혹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대답했습니다.

 

임종 이틀 전

새벽 2 10, 봉사자에게

  “자꾸 불러서 미안하다. 그 동안 고마웠다.

고 말하며 남편과 자식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녹음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남편을 미워했고 용서는 하고 가지만 마주 볼 자신이 없다며

녹음을 해서 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녹음 된 유언>

 

 남편에게

 여보! 당신에게는 정말 할 말이 많지만 한마디만 하고 싶어요.

그 성질 인제 좀 죽이고 그 자존심도 좀 버리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는 아빠, 난 그걸 원해요.

 

우리야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살았든 그래도 자식을 지켜주는 게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해요. 아이 앞에서 죽는 다는 소리 하지 말고,

저거 어떻게 죽이고 내가 죽나 하는 그런 마음 두 번 다시 갖지 말고,

내가 죽어서 먼 데서 보더라도 저런 좋은 아빠였구나 하는 것을

내가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길 바래요.

  

그래도 ㅇㅇ아빠 미우니 고우니 해도 내 마음 속은 항상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었는지 모르지?

당신은 나를 싫어했지만, 나는 끝없이 한없이 좋아했었다우.

당신 마음 어떻게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진실이라는 거

알아줘요.  먼저 가서 미안해요.

 

임종

새벽 2시경 맥박이 급격히 약해지고 호흡이 점점 얕아지며 숨이 빠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의 기도 속에 그간의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출타 중이라 연락이 안 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행복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투병생활 할 때 잘 지내다가도 남편만 왔다 가면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통증을 호소하고 불안해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방문도 오지

말 것을 당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괜히 편안하게 잘 가는 사람 놀래키는 것 같아 연락 안 되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마리아 씨 편안하게 잘 가세요. 그 동안 고생 많이 했어요.

이제부터는 천국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세요.

잠든 모습이 그제야 편해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연상의 여인을 즐겨 듣던 남편이 며칠 좀 다녀오겠다며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이 말만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보름 후 옆방 창고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습니다.

 

근처에서 자꾸 무슨 냄새가 난다는 주위사람의 신고로 찾게 되었는데

시신 옆에는 아들에게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쪽지가 써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먼저 간 아내가 못 견디게 그리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