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가 남긴 6조 원의 유산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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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억만장자가 살인
교사 혐의로 전격적으로
사형집행을 당한 뒤
그가 남긴 6조 원의
유산이 전액 미망인에게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사안이
관심을 끈 것은 당사자인
베이징 젠하오 그룹의
위안바오징 회장(당시 40
세)이 지난해 3월 사형
집행을 당하면서 미처
유산 처리 문제에 관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아
유족끼리 분쟁이 일어났
기 때문이다.
위안 회장은 사형을 당하기 직전 형장을 찾아온 형과 누이 동생에게 ‘전 재산을
아내에게 맡길 테니 아내 처분대로 따르라’는 말을 남겼다.
유산문제가 외부에 알려진 것은 위안 회장의 전처 소생 아들(15세)이 유산 분할
유산문제가 외부에 알려진 것은 위안 회장의 전처 소생 아들(15세)이 유산 분할
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위안 회장은 전처와 헤어진 뒤 1999년 티베트족 무용가인 줘마(42) 중앙민족
대학 교수와 재혼했다. 전처 소생의 아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새엄마’가 자신이 그동안 살고 있던 베이징 도심의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하고
있다며 유산을 나눠달라고 소장을 냈다.
베이징 제2중급 인민법원은 심리 끝에 “유언장이 없어도 유언이 있으면
유언에 따라야 한다”며 미망인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 측 변호사는 “위안 회장이 제대로 된 유언장도 남기지 않은 데다,
이해 관계자인 형과 누이동생 증언만으로는 유언이 사실이었는지도 불확실
하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안 회장은 중국의 명문 정법대를 졸업한 은행원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위안 회장은 중국의 명문 정법대를 졸업한 은행원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1992년 주식 투자로 종잣돈을 마련한 뒤 2년 만에 계열사 60여
개를 거느리는 수완을 과시했다. 1996년에는 재산을 30억 위안으로 불렸다.
나중에는 인도네시아 석유회사 지분 40%를 인수하면서 전 재산이 500억
왕싱을 청부 살해한 혐의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왕싱에게 1996년 사업 파트너 살해를 부탁했다가 실패한
뒤 도리어 협박을 받게 되자 친동생과 사촌동생을 시켜 죽였다는 것이다.
그는 2005년 1월 랴오닝성 선양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2005년 1월 랴오닝성 선양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 재판이 연기되면서 고비를 넘겼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열린 2심 재판에서 선양 중급법원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
하면서 즉시 사형집행을 하도록 명했다.
2심이 열릴 때만 해도 사형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위안 회장은 유언장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독극물 주사로 세상을 떠났다.
연상의 아내였던 줘마 교수는 남편이 재판에 회부되자 목숨만 살려주면 전
연상의 아내였던 줘마 교수는 남편이 재판에 회부되자 목숨만 살려주면 전
재산을 헌납하겠다는 제안을 하는 등 구명을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사형 집행 당시 억만장자가 한때의 잘못으로 목숨까지 잃는 것에 대해
재판부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와 함께 속전속결식의 사형 집행이
능사냐는 의견이 엇갈렸다.
연간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형 집행으로 세계적인 ‘사형대국’으로 꼽히는
연간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형 집행으로 세계적인 ‘사형대국’으로 꼽히는
중국은 요즘은 2심에서 사형 판결이 나도 실제 집행할 때는 반드시 최고인민
법원(대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해 위안 회장처럼 유언장도 쓰지 못한 채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일은 이제 없다.
출처 : 중국무역카페 창업메니저
출처 : 중국무역카페 창업메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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