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남자...2회
남편은 아내가 다시 올 거라는 말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고 전화조차 받지 않는 아내에게
배신감을 느꼈는지 나만 보면 쫓아가서 죽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미움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숨을 몰아 쉬기까지 했습니다.
미움, 분노, 자책감, 허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하루는
저를 붙잡고 울부짖었습니다.
“신부님! 왜 내가 아내와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어야 합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이 뭐였습니까?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내가 남편이고 아빤데......
앞으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죽는다
생각하니 눈을 못 감을 것 같아요.”
“그래요 내가 그 입장이라도 미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그 비참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지금 상황에서 아내나 자식들 보고 오라고 한들 안 올 것은 뻔하고,
그렇다고 이 상태로 죽는다면 끝까지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죽은
비참한 인간으로 남을 테니 차라리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하는데요?”
“먼저 아내와 자식에게 글을 쓰세요.
욕을 퍼붓든 원망을 하든 응어리진 마음이 풀릴 때까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쓰도록 하시고,
또 한 가지는 내가 가족들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적고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 안 하면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꼭 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ㅇㅇ씨는 누구보다도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데,
맞지요?”
“예. 맞습니다. 난 누구보다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요. 미움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애정이 크다는 말입니다.
다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렀던 것이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상처받은 자존심을 감추기 위해
또 화를 내고,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데 누굴 탓하겠어요.”
“맞아요. 가족들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물론 겉으로 달라질 건 없어요.
그렇지만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 자를 남긴다고 했는데
이런 상태로 죽는다면 사람들은 ㅇㅇ씨를
아내와 자식에게 버림받고 죽은 못난 놈,
가정 하나 지키지 못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외면당한
쓸모 없는 놈으로 알 겁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남들이 모르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아빠가 얼마나 노력하고 고생했는지를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에게 버림은 받았지만
아빠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가족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가족은 나를 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가족을 용서하고 화해를 청하면서 간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훗날 이 일에 내가 증인이 되어줄게요.
아빠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못난 아빠로서가 아니라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모습을 알게 하면
아내나 자식의 생각이 바뀔 겁니다.
그래도 내 아빠가 자식들을 사랑했었구나,
아내를 사랑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기억 속에 매일 술만 먹고 노름하고
가정을 내팽개친 아빠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이었지만
좋은 아빠의 면도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거에요.
그러면 아내나 자식들이 받았던 상처들도 치유하게 될 겁니다.”
“정말 그렇게라도 된다면야......
그런데 저는 지금 연필 잡을 힘도 없어요.”
그러면서 오후 내내 5시간을 앉아서 A3용지로 13장을 써내려 갔습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어떻게 그것을 다 썼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지막지하리만큼 가족들에 대한 원망과 미운 마음을
털어놓았지만 끝내는 아내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소중하고 고마웠었음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제대로 해주지는 못 하고 요구만 했던 자신을
탓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응어리가 많이 풀렸는지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마음이 편안하면 통증도 줄어드는 법......
환자의 관심은 이제 먹는 것에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병이 들어도 오욕칠정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욕구가 있게
마련인데 이 환자는 식욕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환자였습니다.
위암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오기 전부터 먹고 싶은 것은 가리지
않고 먹어댔습니다. 밀가루 음식, 사탕, 아이스크림, 고기 등 등......
꽃마을에 와서도 매 끼니마다 음식 주문이 달랐습니다.
아침에는 무슨 죽, 점심에는 카레, 저녁에는 불고기 등
음식 주문이 그렇게 다양하고 화려할 수가 없었는데
바닷가에 무슨 생선만 빼고는 다 해준 것 같습니다.
덕분에 음식담당 봉사자가 애를 먹었지만......
음식 못 먹다 죽은 귀신이 붙은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음식이든 먹고 나면 30분 안에 다 토한다는
것입니다. 먹을 때는 정말 맛있게 먹지만 30분이 지나면 그대로
다 토해내니 먹기는 잘 먹는데 몸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병이 들기 전에는 몸무게가 80kg이었는데
지금은 40kg이 될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점심까지 잘 드시고 나더니 오후 3시부터 임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임종하고 계시니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죽으면 연락하세요!”
“부인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도 그렇고!”
“애들도 안 간대요.” (딸각!)
죽어가면서도 용서받지 못 하고 간 때문일까?
눈꺼풀이 닫히지를 않았습니다. 워낙 마른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본인은 모두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으로 가셨기에
잠든 모습은 편안해 보였습니다.
† 주님.
이 세상에서 불러 가신 불쌍한 형제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모든 허물을 씻어주시고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Ave Maria - Nina Past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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