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량을 떼와 팔던 ‘생계형’은 옛말, 온라인 쇼핑몰 열어 클릭 따라 세계로
시에나 밀러가 들고 있는 저 가방이랑 선글라스 어디 거예요? 가방은 클로에 뉴 버전 F/W이고요, 선글라스는 AM eyewear cobsey예요.
패션 정보를 공유하는 다음카페 ‘베스트 드레서’에서 두 시간 만에 이루어진 문답이다. 상품명을 알았으니 그들의 마우스는 카페를 나와 (수입품을 취급하는) 인터넷 쇼핑몰을 두드린다.
최종 구매 결정은 각자의 취향과 주머니 사정에 달렸겠지만, 이름만 알면 전세계 패션 상품은 바로 우리 코앞에 대령된다. 패션 ‘보따리장수’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덕이다.
‘동동구리무’는 패션계의 얼리어댑터
이들은 패션계의 얼리어댑터(early adapter)다. 국내에서 찾을 수 없는 패션 상품을 바다 건너에서 떼온다.
그들의 선조들의 ‘초기 히트작’은 북을 동동 두드리며 ‘구리무’(크림의 일본식 발음)를 판다는 데서 유래한 ‘동동구리무’다. 호시절도 잠시, 보따리장수는 1961년 특정 외래 제품 판매 금지법에 발이 묶인다.
하지만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면서 자유롭게 움직이게 됐다.
여행 중 해외에서 사온 몇몇 물건들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좋자, 본격적으로 보따리장사에 뛰어든 사람들도 생겼다.
물 만난 보따리장수는 낯선 물건들을 부지런히 떼와 남대문과 동대문에 풀었다. 1990년대 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소비자의 시야가 확대됐다.
올슨 자매, 커스틴 던스트, 케이트 모스 등 해외 배우들이 패션 아이콘으로 속속 등장했다. 보따리장수들도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인터넷을 이용한 구매대행 방식으로 변화를 꾀했다. 과거 소비자들은 해외에 친인척이 없는 한 국내에서 외국 상품을 사기 어려웠다.
언어 장벽, 자국 카드만 사용이 가능한 결제 시스템, 배송 문제 때문이다. 2000년 SK글로벌의 신규사업 WIZ ADDRESS는 이런 ‘구매대행’이 기업화된 첫 사례이다.
보따리장수들의 출신성분도 점점 다양해졌다. 여행객들뿐 아니라 어학연수생이나 유학생 등도 가세했다.
해외에 거주하며 현지 물품을 쉽게 접할수 있는 ‘콘텐츠’에 매장 없이 인터넷을 통해 장사할 수 있다는 ‘인프라’까지 더해져, ‘업계’의 진입장벽이 확 낮아진 덕이다.
현재 네이버에 등록된 3천 개의 인터넷 쇼핑몰 중 수입 제품을 다루는 곳은 1천여 개. 그중 물건을 떼와서 파는 직수입 쇼핑몰이 700여 개,
유통창구 구실인 구매대행 사이트가 300여 개로 나뉜다.
경쟁사가 많으니 제품의 가격이 투명해졌다.
쇼핑몰을 운영하는 보따리장수들은 가격 이외의 것으로 고객에게 다가가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구매대행 쇼핑몰 ‘런던 메카’의 김선영(가명)씨는 ‘감성형’ 마케팅으로 경쟁력을 확보했다. 김씨는 유학생에서 사업가로 전향한 사례다.
늦깎이 대학생으로 패션 매니지먼트를 공부하던 중 지인들이 구매대행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을 보았다. 느낌이 왔다.
영국의 패션 브랜드만 취급해도 시장성이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기존의 획일적인 사이트와 어떻게 차별화하느냐는 것.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영국에 대한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국인 피팅 모델을 기용했다.
단순한 외국인 모델이 아닌 영국스러운 모델을 찾아나섰다.
결국 키 170cm, 백인, 벽안, 금발, 55사이즈인, 영국의 고집스럽고 귀족적인 이미지가 풍기는 ‘엠마’를 찾을 수 있었다.
같은 물건이라도 더 ‘영국스럽게’ 소비자에게 다가간다는 전략이다. ‘감성’보다는 ‘실속’을 더 챙기는 손님이 많은 게 현실이다.
직수입과 구매대행 모두 취급하는 Fromellen의 주인장 서현정(24)씨는 이런 요구를 읽은 ‘실속형’ 운영자.
직업상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잦았던 서씨는 상품의 실제 가격에 빠삭했다. 해외 수입품에 ‘거품’이 심하다는 걸 알았다.
내친김에 평소 애용하던 구매대행을 직접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Fromellen은 설립부터 ‘실속’을 챙겼다. 인터넷 쇼핑몰을 만드는 데
보통 1천여만원이 들지만 서씨의 투자금은 400만원.
디자인을 전공한 이력을 살려 홈페이지 제작 비용을 줄였고, 본인이 직접 모델로 나섰다.
발품이 많이 드는 현지 구매를 프랑스에 사는 동생이 맡아준 덕도 컸다.
서씨가 취급하는 주요 품목은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중저가 브랜드.
국내에 입점돼 있는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나 ‘모스키노’도 취급한다.
이들은 백화점에서 사려면 실제보다 20만원가량 비싸고, 매장도 많지 않아 선택의 폭이 좁다.
서씨는 제품을 살 경우 해당 브랜드의 열쇠고리를 함께 주는 이벤트를 기획했는데, 사소한 것 같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아토피 고객에겐 비싼 안감 ‘거침없이’
고객의 감성이나 실속보다 ‘자신답게’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다. 직수입 쇼핑몰 말배추(horsecabbage)의 조형권(26), 이상민(26)씨는 ‘마이웨이’형이다.
죽마고우인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나중에 우리 둘이 패션사업을 같이 하자”는 다짐을 해왔고, 이를 실현했다.
학창 시절부터 패션에 대해 연구하던 이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사업자금이었다.
조씨는 사업자금을 마련하려고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지원하기도 했다. 4년 전, 말배추는 그렇게 시작됐다.
초기에는 전통적 보따리장사의 방식이었다. 일본과 홍콩을 수시로 드나들며 물건을 떼왔다.
선택 기준은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상품, 한마디로 ‘말배추’에 어울리는 상품이다. 이들의 안목이 소비자의 구미에 맞아떨어지자 사업은 확장됐고, 마니아도 생겼다.
말배추는 내처 유통자가 아닌 생산자로 변화를 시도했다. 지난해부터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내놓고 오프라인 매장도 열었다.
입는 사람을 기준으로 옷을 만드는 게 원칙이다. 아토피를 가진 사람을 위한 옷에는 피부에 좋은 비싼 안감을 ‘거침없이’ 쓴다.
“시작은 쉽지만 운영은 어렵다”
잘나가는 업체들은 연 수십억원의 매출을 자랑하지만, 인터넷 쇼핑몰의 매출은 천차만별이다.
현대판 보따리장수들은 “시작은 쉽지만 운영은 어렵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물건 고르기, 구매, 촬영, 업데이트, 상담, 포장, 배송 등을 처리하려면 24시간도 부족하다.
수입품이라면 해외 매장에도 들러야 하니 발품이 더 든다. 감각도 필수 요건이다. 한 쇼핑몰 운영자는 “내 눈에 좋은 것과 남의 눈에 좋은 것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며 “외국 제품이라 그런지 내 눈에 이상한 제품이 잘 팔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소비자는 물건을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코디 방식을 끊임없이 묻는다.
“잡지를 읽고, 쇼핑을 다니고, 다른 사이트도 참조하는 감각 훈련에 소홀하면 도태되기 십상”이라고 실속파 서현정씨는 지적했다.
런던 메카의 김선영씨는 “남이 하니깐 한번 따라해본다는 주먹구구식 사업 발상은 정말 위험하다”고 말했다.
소량을 해외에서 떼와 팔던 생계형 보따리장수들이 온라인에서 수입 패션상품 중계자로, 나아가 생산자로 ‘진화’했다.
클릭 한 번이면 세상이 시장이고 매일이 장날이다. 그 물건이 어디에 있든 우리의 보따리장수들이 구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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