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님을 처음 만난 것은 샘터에서였다. 어느 날 신입사원 으로 그가 원고를
가지러 강 건너 다래헌에 왔었다.
그 시절에는 편집기자가 직접 원고를 받으러 왔었다. 그 무렵 다래헌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나는 지난 겨울 우이동에 있는 그의 집 거실 사진틀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두 사람이 다 펄펄하던 시절 이었다.
불일암에서 지낼 때, 내 '산방한담' 칼럼에 오자가 무려 대여섯 군데에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실린 글에 오자가 나오면 몹시 불쾌하다.
독자에 대한 결례일 뿐 아니라 편집자의 성실성에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랫절에 내려가 전화로 원고를 더 보내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편집 책임자인 그가 예고도 없이 불일암에 왔었다.
내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밤차를 타고 사과하러 내려온 것이다.
훈육주임 앞에 선 학생처럼 풀이 죽어 있는 그이 모습을 대하자 내 마음도 이내
누구러졌다. 함께 부엌에 들어가 아침을 지어 먹었다.
어느 해 이른 봄, 그는 소포와 함께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내왔었다.
'스님, 생신을 축하 올립니다.
오늘이 있어 저의 생도 의미를 지닐 수 있었기에 참으로 저에게도 뜻있는 날입니다.
저를 길러주신 할머니께서는 늘 절 구경을 다니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몰래 한 푼 두 푼 모으신 돈이 여비가 될 만한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제가
털어가곤 하였습니다. 그때의 제 속임수란 "할머니, 제가 이 다음에 돈 벌어 절에
모시고 갈게요" 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제 손으로 월급을 받아오기 훨씬 전에
저쪽 별로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제가 첫 월급을 타던 날 누군가 곁에서, 어머님 내복을 사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내의를 사드릴 어머님도, 할머님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울음으로도
풀 수 없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스님의 생신에(제가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살까 생각하다가 내의를
사게 된 것은 언젠가 그 울음으로도 풀 수 없는 외로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을
짚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스님께서는 제 혼의 양식을 대주신 분이기도 하니까요.
다시 한번 축하 올립니다. 스님! ㅡ정채봉 올림'
봄볕이 들어온 앞마루에 앉아 이 사연을 두 번 읽었다. 함께 부쳐온 봄 내의를 매만지면서 대숲머리로
울긋불긋 넘어다 보이는 앞산의 진달래에 묵묵히 눈길을 보냈다.
입산 출가 이래 나는 한 번도 내 생일을 기억한 적도, 생일 축하를 받아본 적도 없다.
그것은 출가 수행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주민등록증에 기재된 생년월일은 실재
출생일과 같지 않다
'기억에 없는 어머니와의 첫 만남이 유골로 이루어지게 되어 눈물을 좀 흘렸습니다. 저의 나이든 모습이
스무 살의 어머니로서 가슴 아파하실까 봐 머리에 검정물을 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이 사연을 읽고 내 눈시울에도 물기가 배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묻힌 고향 땅 양지바른 그곳에 지금
그도 누워 있다.
그가 홀로 되어 몹시 외롭고 안쓰럽게 여거지던 시절, 책을 읽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어 함께 음미하고 싶어
써 보낸 글이 있다.
'혼자서 자란 아이들은 혼자 살 수밖에 없도록 길들여져 있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이 좋았고 그렇게 훈련되어 왔다. 혼자서 자란
아이들은 결국 누구나 혼자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래서 혼자가
되는 이런 순간에 맞닥뜨릴 것에 대비하여 미리 연습하면서 살아간다 · · · . '
한평생 외롭게 살아온 그가 그의 문학과 정서를 길러준 고향의 흙과 바람,
할머니와 어머니 곁에서 쉬게 된 것은 그나마 태어나 튼튼한 몸으로 이생에
못 다한 일을 두루 이루기를 바라면서 명복을 빈다.
올 때는 흰 구름 더불어 왔고
갈 대는 함박눈 따라서 갔네
오고가는 그 나그네여
그대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홀로사는 즐거움 / 법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