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관 일기 79
담배를 끊은 지 오늘로 꼭 보름째 됩니다.
담배 끊는 놈한테는 딸도 주지 말랬는데,
저야 받을 딸이 없으니 그나마 독한 놈 소릴 들어도 괜찮을 듯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소리를 들을 만큼 의지가 강한 편은 아닙니다.
몸과 해놓는 약속에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운동을 하겠다. 술을 끊겠다 등등......
지금껏 무슨 약속이든 일주일을 넘겨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이번 약속은 보름째 버텨내고 있으니,
제가 봐도 대견스러운 일입니다.
.........
하지만, 이 약속은 저와의 약속이 아니라, 신자들과의 약속입니다.
아니, 신자들을 위한 약속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미사 줄곧 기침 때문에 분심거리가 되다 보니,
그 동안 제 기침소리에 애를 태우던 신자들에게 참 미안했습니다.
미사 때 기침 몇 번하고 나면, 다음날은 꼭 저를 위한 생미사가 오르고,
좋다는 약을 들고 줄줄이 늘어섭니다.
그리고, 건강과 안부를 묻는 인사 때문에 바빠지기도 합니다.
..........
물론, 사람들한테 받는 관심이야 받을 때마다 기분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 부질없는 위안을 행복으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를 주든 간에, 주는 존재로서만 행복하고 싶은데,
도무지 받아 챙기기만 하는 지금의 행복은 짐스러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사제는 주는 존재여야지, 받는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 존재의 본바탕을 잃어버릴 때, 사제의 행복도 달아나 버린다 여겨집니다.
저는 그 바탕을 놓치며 살고 싶지가 않는 것입니다.
..............
처음에는 잘못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주는 것을 챙겨 넣으면서, 그저 존경심의 발로로 주는 선물로만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그 한가지의 이유로 받기에는 너무 크고 많은 은혜였습니다.
여겨보니, 제 건강이 어쩌면 더 큰 이유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픈 모습, 힘을 잃은 모습의 사제 안에서 이들이 가지는 무한한 연민...
바로 저는 그 연민을 존경으로 알고, 나약하고 무익한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짐스런 부담이고, 도리어 제 삶을 예속하는 멍에였음을 아니,
불현듯 정신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충실한 착각 속에 살아왔던 제 삶을 더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전임자들의 잦은 이동으로 마음을 많이 다치며 살아온 우리 신자들.....
만날 때마다
"신부님, 제발 오래오래 계셔주십시오" 노래 부르는 그 간곡함을
그저 무심히 흘려 듣지는 않겠습니다.
저마저도 병을 얻어 홀연히 떠나버린다면,
이들이 받을 상심의 깊이를 안고,
저 역시 자책감 속에 살아야 할지도 모를 테니 말입니다.
.........
보름 전,
콜록거리면서까지 담배를 물고 앉은 저를 보면서,
이들 마음의 조바심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해보니 지금도 죄스러워집니다.
그래서 끊어버리기로 한번 정한 마음을 지켜내려고 보름을 견뎌왔던
것입니다.
어쩌면, 보름보다 더 많은 날을 유혹 속에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아끼고 위하는 신자들의 고운 마음을
꼭 가슴에 두면서 견뎌내겠습니다.
그리고,
연민 속에서 받는 사랑보다, 참 존경 속에서 사랑 받는 사제가 되도록,
받는 사랑보다는 주는 쪽의 사랑을 더 많이 하면서 사는 사제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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